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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58)화 (58/109)

58화

다니엘만큼은 아닐지언정 제게도 약간의 성력 정도는 있었으니까.

그 한마디에 한창 흥분했던 로지안이 조금은 진정된 얼굴이 되었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그가 ‘흠.’ 하고 짧게 고민하고 있는 찰나,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지안 님, 신전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무거운 문이 겨우 열리면서 보이는 건 시종 뒤에 서 있는 성기사 하나였다.

신전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하기에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신전에서 성기사는 주로 신관인 타미타르테를 위해 움직이기보다는 로지안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왠지 약간의 긴장감과 흥분이 공존된 얼굴의 성기사는 제 감정을 억지로 가라앉히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미타르테는 그런 성기사의 모습에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휘감겼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로지안 님.”

“찾았다고?”

흔적을 찾았다는 한마디에 로지안의 눈동자가 광기로 뒤덮였다.

덜컹하는 심장에 그가 바짝 굳은 얼굴로 성기사를 바라봤다.

로지안이 환희에 찬 얼굴로 성기사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다니엘, 그자를 찾았어?”

“흔적은 찾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뭐?”

환희에 찼다가 금세 실망감으로 희게 질리는 모습에 타미타르테는 계속해서 쿵, 쿵, 쿵, 뛰는 심장이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제발, 그냥 넘어가길. 제발 그 아이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길.

간절히 기도할 때,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다만 자식은 낳은 모양입니다.”

“자식이라고?”

“예.”

책장 뒤까지 뒤져가며 보내지 못한 서신을 찾은 상태였다.

“이름이 이리나 데빈인 듯합니다.”

타미타르테는 신관이면서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졌다.

* * *

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리나를 공작저로 데려갔을 때와는 조금 다른,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붕 뜬 분위기에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타고 온 말의 고삐를 잡아끌며 말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꼭 누가 와서 마을을 한바탕 뒤집어놓고 간 듯한 모양새에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때,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리안이 한 걸음 다가갔다.

“뭐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어, 도련님?”

이리나가 마을에서 일했던 베이커리 가게의 주인이 꽤나 반갑게 그를 알은체했다.

외지인 때문에 마을이 뒤집어졌어도 베이커리 가게의 주인이 리안에게 살가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리나를 공작저로 데려갈 때, 베이커리에 있는 빵을 죄다 사들였기 때문이다.

“어쩐 일이십니까?”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마을 분위기가 왜 이런가?”

“아…….”

눈을 데구룩 굴리던 주인이 리안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사람이 없는 곳으로 끌어갔다.

다른 사람들에게라면 말하지 않겠지만 상대가 리안이었던 만큼, 그리고 리안이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라고 해봤자 뻔하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알리샤.

“알리샤를 찾으러 오신 거죠, 도련님?”

귀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리안은 주인의 행동에도 달리 아무런 지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한담.

눈앞의 공자가 이리나를 데리고 갔고, 이리나가 공작저로 가기 전에는 알리샤와 잘 지냈다는 걸 잘 알았다.

알리샤와 함께 지냈던 이리나를 데리고 간 이가 누구냐고 물어봤지만, 마을 사람들이 리안의 정체에 대해서 알 턱이 없었다.

애초에 이리나를 데리러 왔을 때도 소수 인원으로만 움직였던 데다, 이리나에게 리안의 정체를 물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리안의 옆을 지키는 다른 기사들로 보아, 그리고 이리나의 태도로 보아 대단한 귀족가의 공자라고 생각할 뿐, 어느 것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마을에 신전의 성기사들이 왔었습니다.”

“성기사들이? 왜?”

“사람을 찾는다고 하던데……. 그게, 이리나와 같이 있던 알리샤와 연관된 모양인지라.”

한바탕 태풍이 불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편적으로 아는 것이라곤 성기사들이 사람을 찾아왔다는 것. 그 사람이 알리샤와 관련되었고, 알리샤가 성기사들을 따돌린 지금 그들이 이리나도 찾고 있다는 것.

“알리샤를 찾고 있는데, 이리나와 함께 지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된 모양이더라고요.”

“…….”

“신전에서 이리나도 찾고 있습니다.”

리안이 볼 안쪽을 꾹 씹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까? 한데 이리나와 신전이 엮일 일이 무에 있다고?

게다가…… 이리나가 공작저로 왔다는 사실을 수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건 곧 공작가에서 가짜 공녀를 내세운 사실을 들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 알리샤는?”

리안이 마을로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알리샤를 데리고 공작가로 가는 것.

예기치 못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 상황에 리안은 혼란스러움을 뒤로 삼켰다.

“알리샤는 지금 성기사들과 함께 있나?”

“아뇨, 마을에서 도망친 듯합니다.”

“도망쳤다고?”

“예, 그래서 신전에 나온 이들 몇몇이 알리샤가 지내던 집을 지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을이 어수선했던 이유가 신전 때문이었군.

확실한 건 이리나의 친부와 알리샤가 신전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리나가 아주 어렸을 적에 공작가로 왔었고, 그 당시에는 신전과 엮일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마을을 이 잡듯이 뒤지는 중입니다.”

“알려줘서 고맙네.”

들고 다니고 있는 돈은 없던지라 리안이 옷을 장식하고 있는 보석 하나를 떼어 베이커리 가게의 주인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알려준 값이고.”

“아이고, 고맙습니다! 도련님!”

알리샤가 이 마을에 없다면 리안이 이 마을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괜히 신전과 마주치면서 이리나의 존재를 밝히게 되는 걸 원하지 않는 만큼, 그가 말에 올라타 빠르게 말고삐를 잡아당기고는 박차를 가했다.

“마을에서 도망친 듯합니다.”

“차라리 잘된 건가.”

색색, 거센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알리샤가 신전 사람들에게 잡혀 있는 것보다야 오히려 알리샤가 도망친 게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이상, 리안이 보여야 할 행동은 한 가지였다.

바로 신전의 이들보다 빨리 알리샤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

“미치겠군.”

도대체 일이 어떻게 꼬여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불화설 종식.

탁! 내 앞에 떨어지는 가십지 1면에 외출 준비를 하다 말고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두 눈 새파랗게 뜨고 날 노려보고 있는 그를 보며 내 앞으로 던져진 신문을 들었다.

노크도 없이 멋대로 방에 들어온 바라크의 얼굴에 단장을 끝마친 내가 방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이게 뭐야.”

그가 내게 던진 기사를 확인하고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긴요, 제 기사네요.”

1면을 장식한 내용은 나와 페르포네, 그리고 데미안에 관한 기사였다.

지난 시간 동안 돌아다녔던 불화설을 단박에 정리하는 기사에 내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1년 동안 공작가에서 지낼 거면, 내가 설치지 말고 지내라고 했지.”

“…….”

“에이프릴로 지내는 거면 에이프릴답게 지내. 헛짓거리하지 말고.”

이를 으득 씹으면서 하는 말에 나는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댔다.

내가 이곳으로 돌아온 뒤로 공작가는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러잖아도 별장에서 요양 중인 에이프릴을 걱정한다고 예민한 바라크가, 이제는 나 때문에 늘 화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 주변에 있는 사용인들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숙였다.

보고도 못 본 척, 이 대화가 들리면서도 안 들리는 척하고 있는 사용인들은 공작가에서 엄선한 이들다웠다. 다만 내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앰버만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물러가라는 내 손짓에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이 밖으로 나갔다.

전담 하녀인 앰버만이 문 앞에 선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제가 아가씨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한 건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오라버니.”

“뭐라고?”

“전 오히려 에이프릴 아가씨가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그도 그럴 게, 전하와 사이가 안 좋으셨잖아요.”

페르포네와 함께 나가길 잘한 일이었다.

귀족 아가씨들과의 티모임에서 약혼자와 사이가 좋다고 백 번 천 번 말하는 것보다, 이런 기사 한 번이면 모임에서 전부 알게 될 테니까.

페르포네와 데미안과 함께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는 기사 내용과 건국제를 위해 부티크에 간 일, 그리고 검술대회의 토너먼트전까지 함께 구경했다는 기사에 내가 짧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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