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따라붙어 다녔던 게 기자가 아니라 스토커였나. 이렇게까지 일정에 대해 잘 아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1면 기사를 대충 눈으로 훑어본 내가 신문을 덮었다.
“오라버니라는 말 입에 담지 말라 했지.”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요.”
유치한 말과 행동이지만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전 이런 기사가 나오면 오라버니께서 좋아하실 줄 알았거든요.”
“……뭐?”
“진짜 에이프릴 아가씨께서 페르포네 전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밀어붙인 약혼이란 걸 누가 모르겠나.
그것도 내가 이 공작가를 떠나자마자 한 약혼이었다.
에이프릴은 어떻게 해서든 나인 척 연기하면서 페르포네를 잡고 있던 것뿐이었다.
“불화설에 대한 기사가 나는 것보다야 이런 기사가 나는 쪽이 훨씬 더 좋지 않나요?”
내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보는 거냐?”
바라크는 화가 나고 동시에 조금은 허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지키고 있다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에이프릴 힐 라이즈의 자리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불화설이 종식되어도, 넌, 네가 진짜 에이프릴이 아니니까 하는 말이야.”
결국에 에이프릴이 돌아온다면 다시 바뀌게 될 일이다.
“네가 자꾸 에이프릴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까……!”
“빼앗은 적 없어요.”
냉랭한 목소리에 한창 말을 이어가던 그가 멈칫했다.
“그리고 빼앗을 생각도 없고요.”
노을빛 눈동자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은은한 어둠이 깔린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에 내가 허리를 숙여 신문을 주웠다.
바라크는 내가 에이프릴의 자리를 빼앗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글쎄, 내가 만약 정말로 전처럼 생활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공작가로 돌아온 거라면 그건 빼앗는 게 아니라 원래의 내 자리를 돌려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빼앗은 건 내가 아니라 에이프릴이다. 바라크가 계속해서 내게 ‘빼앗는다’라고 말을 하는 이유는, 본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겠지.
사실은 내 자리를 에이프릴이 빼앗은 거라고.
“전 에이프릴 아가씨가 한 번도 빼앗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바라크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그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툭, 털었다.
“그리고 이런 기사가 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찾아와서 화내지 마세요.”
내 손길을 바로 내칠 줄 알았는데 바라크는 굳은 사람이 되어 가만히 날 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내가 방긋 웃었다.
바라크의 눈동자 속에, 에이프릴과 똑같이 생긴 내 얼굴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조마조마하고 불안해하는 거 다 드러나니까.”
“……너.”
“원래 겁 많은 개가 짖을 때 더 크게 짖더라고요.”
“네가 물어봤었지. 네가 그렇게 싫냐고.”
바라크는 내 손에 있는 신문을 들고 갈 생각도 없는지 날 빤히 보고만 있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불화설 종식에 대한 기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라크가 꺼낸 말은 현재의 말이 아닌, 진짜 에이프릴를 찾기 전의 과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바라크의 뒤를 종종 따라다녔을 때, 정 한 번 주지 않는 무심함에 야속함을 드러냈던 적이 있었다.
내 물음이 지금 현재가 아니라 오래전의 과거를 의미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굳고, 그를 바라보자 감정이라고는 읽을 수 없는 바라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네가 그렇게 싫었다.”
지금에 와서야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이 집에 들어온 널 볼 때마다 돌아올 내 동생이, 에이프릴이 안타까워 죽을 것 같았으니까. 네가 에이프릴로 불리는 게 너무 싫으니까.”
“오라버니의 싫다는 말이 지금의 저에게 큰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까?”
정말 궁금해서 던진 물음이었다. 바라크가 이런 감정적인 말을 내게 하는 이유는 뻔했다.
어렸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면 그 말이 내게 통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집의 아이가 되고 싶었고, 날 싫어하는 바라크에게 인정받고 싶었으니까.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이긴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싶을 때가 있긴 있었다.
“싫어하고 싶으시다면 그리하세요.”
날 향한 바라크의 감정은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절 싫어함으로써 오라버니의 죄책감이 좀 사라진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죠.”
시큰둥하게 대답하면서 기사를 장식하고 있는 내 사진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내 사진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생긴 에이프릴의 사진이었다.
그가 날 차갑게 바라보든,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든 이제는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그를 좋아할 때나 상처였고, 그가 특별하지.
“에이프릴 아가씨께 이런 가십지 기사를 들키진 마시고요.”
“네가 싫은 이유는, 내 죄책감 때문도 있지만.”
죽어도 내 앞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았던 죄책감을 바라크가 처음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웬일이래. 시선을 그에게 던지자, 날 똑바로 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인 그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너로 인해 돌아올 내 동생이…….”
뒷말을 전부 완성시키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을 전부 완성시키지 않은 그가 ‘망할’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고는 방을 나갔다.
“뭐야.”
말을 하다 마는 건 바라크의 성미에 어울리지도, 그리고 맞지도 않은 것이었다.
자신을 화나거나 거슬리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해결하고,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내뱉는 게 바라크였는데. 난생처음 보는 바라크의 모습에 내가 헛웃음을 삼키다, 숨 막힐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앰버에게 물었다.
“에이프릴 아가씨 때문에 오라버니께서 속이 많이 상하셨나 보네.”
앰버는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내 옆으로 다가와 단장을 도왔다.
“바라크 오라버니께서 에이프릴 아가씨를 많이 아끼셨지?”
“……저는, 공작가로 들어온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함께 지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많이 없습니다.”
치맛자락 끝을 정리한 그녀가 내게 얇은 실크 장갑을 건넸다.
현명한 대답이었다.
내 심기를 거스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에 뒷말이 나온다고 해도 문제되지 않을 말에 내가 빙긋 웃었다.
들어온 지 몇 년 되지 않았다지만 아주 똑똑한 자세였다.
단장을 전부 마친 내가 방을 나섰다.
홀로 내려오자 내가 지시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집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 장미로 풍성하게 채운 꽃다발을 건네받은 내가 꽃잎을 짧게 만지작거렸다.
“말씀하셨던 꽃다발입니다. 마차도 전부 준비되었습니다.”
“수고했네.”
앞에 준비된 마차의 문이 열렸다.
“꽃다발은 어느 분께 드리려고 준비하시는 건가요?”
다정하게 웃으면서 묻는 집사에 가볍게 대답했다.
“베트리체 경에게 주려고.”
“예?”
“베트리체 경에게 준다고, 꽃다발.”
“아…….”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분위기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말한 베트리체 경이 베트리체 백작을 말하는 것도, 아돌프 베트리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터였다.
꽃다발을 받을 만한 이는 아도니스 베트리체, 단 한 사람뿐이었고.
다만, 아도니스 경에게 꽃다발을 선물한다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귀족가라면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리체 백작이 아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아도니스 경을 마땅찮게 여긴다는 사실은 유명했으니까.
지금쯤 베트리체 가문은 축제 분위기가 아니라, 누구 하나 죽은 것 같은 분위기일 것이다.
승리해도 축하받지 못하고, 축하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지 않나.
베트리체 공작가를 보면 자식은 아돌프 베트리체 하나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이유가 없지. 아도니스 경을 축하하고픈 순수한 마음인데, 베트리체 백작께서 뭐라고 하겠어.”
게다가 공작가의 공녀가 직접 축하하러 갔는데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길 리는 없지.
“아무도 축하하지 않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슬픈 일 아니겠어.”
* * *
“오셨습니까.”
이리나를 데리러 갔을 때처럼 집을 비웠던 리안이 희게 질린 낯이 되어 공작가로 돌아왔다.
“이리나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조금 일찍 오셨다면 뵙는 게 가능했을 텐데요.”
“그건 그 애가 원하지 않는 일일 거다.”
이리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정말로 에이프릴의 대역을 잘해주고 있었다.
공작가에서 단 한 번도 버림받은 적 없던 것처럼, 오직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처럼 맑고 사랑스럽게 웃었으니까.
한 번씩은, 진짜 에이프릴보다 더 딸 같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머릿속을 채우는 건 부채감과 우유부단했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기도 했다.
쓰게 웃는 리안이 외투를 벗었다.
오히려 이리나가 잠깐 자리를 비운 지금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는 더 편할 것이다.
“아버지는 집무실에 계시나?”
“예.”
도대체 왜 신전이 이리나의 아버지를 찾았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