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리고 이리나는 신전에서 아버지를 찾는 이유를 알고 있는 걸까.
이상하게 어느 쪽이든 간에 그건 이리나에게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집무실로 올라간 리안이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확실한 건 이리나의 존재가, 큰 태풍이 될 거라는 직감뿐이었다.
리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알렉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리나가 3년 만에 공작저로 돌아왔을 때처럼 같이 알리샤와 함께 들어올 줄 알았으나, 리안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상을 살풋 찡그린 알렉시스가 리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화는 날지언정 이리나를 생각해서 올 줄 알았는데.
“오지 않겠다고 하더냐?”
알리샤라는 그 수인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안젤리카가 이리나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친부를 죽인 데다, 이리나를 끝까지 보살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즈 가문에 아무리 원한이 있다고 한들 이곳에 이리나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던 그 수인은 당연히 공작가로 올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에는 이리나가 있으니까.
“만나러 갔으나 마을에서 도망갔다고 합니다.”
“뭐?”
자세히 설명해 보라는 알렉시스의 표정에 리안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목 뒤로 삼켰다.
자신 역시 신전이 왜 이리나를 찾는지에 대한 건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전에서 이리나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알리샤가 이리나와 함께 지냈다는 사실 때문에 알리샤도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신전에서 대체 왜?”
“거기까진…….”
말끝을 흐리는 리안에 알렉이 자리에 털썩 앉고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알리샤를 찾으러 갔는데 갑자기 신전이 끼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걸까? 라는 말이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그들이 궁금한 건 하나였다. 이리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리샤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리샤가 도망갈 정도라면 이리나가 신전과 엮이지 않는 게 좋겠군.”
공작가에 있는 공녀가 신전의 성기사들이 찾는 이리나라는 건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찾는 이유가 확실해질 때까지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는 게 좋을 것이라 결단을 내렸다.
“에이프릴은…… 한동안 계속 별장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렉시스의 의견엔 동감하며 리안이 조심스럽게 덧붙인 한마디였다.
바라크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펄쩍 뛰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알렉시스는 리안이 꺼낸 말에 동감하는 바였다.
에이프릴이 다 나아서 돌아온다면, 이리나는 자연스럽게 이 공작가에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신전이 그녀를 찾는 이유를 제대로 알아내지 않는 이상, 알렉시스는 순순히 이리나를 공작가에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신전이 마냥 좋은 곳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수도의 평민들을 돕는 건 맞지만, 정말 그들이 제국민들을, 더 나아가 대륙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신의 손길을 건네고 싶었다면 치료라는 행위를 독점하려고 들었을까?
그러한 원초적인 의문 하나와 더불어, 로지안의 옆에 늘 붙어 있는 게 신관인 게 마음에 영 걸렸다.
“이리나도 신전에서 자기를 찾는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다 해도 말해줄지도 의문이고요.”
아니, 애초에 자신들이 본인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믿어주기는 할까?
리안의 질문에 공작은 답을 하지 않았다. 이리나가 부정적으로 생각할 게 분명했으니까.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알렉시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켰다.
만약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기기만 하다 이리나가 알게 됐을 때는 그 여파가 더 커질 게 분명했으니까.
알렉시스는 딱 한 가지 사실만을 제외하고는 이리나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지켜줘야지.”
신전이 만약 이리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어 데려가려고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켜줄 것이다.
그 아이가 믿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은 이리나를 딸로서 대우하고 싶어 데려온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대역이라고 말해도 제 딸로 있는 순간 끝까지는 이리나를 지켜줄 것이다.
친아버지와 한 약속을 3년 전에는 지키지 못했으나 이번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이 집에 있는 이상 그 아이는 내 딸이니까.”
알렉시스의 말에 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작게 미소 지었다.
뒤이어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공작의 집무실을 마음대로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공작가에서 유일했다.
“바라크.”
짐짓 엄한 목소리로 동생을 불렀지만, 바라크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자신이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리나를 데리고 왔다는 점 때문에 그런지 바라크는 자신을 유령 취급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딱딱한 목소리의 바라크를 보아하니, 이미 이리나와 또 한 번 말싸움을 한 모양이었다.
“한동안 별장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별장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오로지 에이프릴 하나 때문이라는 걸 이 자리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이리나와 함께 공작가에 있는 것보다 별장에 있는 편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기는 했다.
이리나에게도 바라크에게도, 그리고 별장에 홀로 있을 에이프릴에게도.
별장에 한동안 있겠다는 바라크의 말은 일종의 원망 섞인 한마디였다. 친딸은, 동생은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네가 이리나에게 그렇게 모질 게 구는 건 에이프릴을 향한 부채감 때문이냐?”
알렉시스가 심경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에이프릴을 찾았을 때,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던 바라크가 울었던 걸 공작가의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미안함, 안도감, 그리고 죄책감이 뒤섞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에이프릴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긴 시간 동안 에이프릴이 고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에이프릴을 찾았으니, 이리나와 함께 지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렇게 모질게 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에이프릴이 집으로 돌아오자 바라크는 이리나에게 더 모질어졌다.
알렉의 질문에 대한 바라크의 답은 침묵이었지만, 그건 곧 긍정이기도 했다.
“……이리나가 정말로 에이프릴을 밀었다고 생각하고?”
“그래도 한때는 그 애도 네 동생으로 지냈었다, 바로 이 집에서.”
이리나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저가, 정말로 그 아이를 밀었다고 생각하느냐란 질문에 그의 대답은 여전히 ‘아니오’다.
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걸 누가 모르나. 에이프릴과 똑같이 생긴 여자애를 구해와서 인형놀이 시키듯 시킨 게 제 부모님이었다.
아마 공작가에 있는, 이리나를 알고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에이프릴의 말을 편들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나.
좀 더 편하게 공작가에서 이리나를 쫓아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쫓아낼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 와서 이리나를 데리고 왔다는 건 바라크가 보기엔,
“라이즈 공작가의 사람들 모두가 이리나에게 상냥하다면, 그건 위선입니다.”
“…….”
“아버지도, 형도 이리나가 그렇게 마음에 걸렸다면, 기른 정을 그렇게 무시 못 했다면.”
바라크의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어떻게 해서든 그 앨 이 집에서 내보내지 마셨어야죠.”
“…….”
“그래 놓고는 이제 와서 그 애가 에이프릴을 밀었느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과거 일에 대해 미안해서, 사죄받고 싶어 다시 데리고 온 것은.
“그 앨 데리고 온 건 아버지의 위선 아닙니까.”
원래도 말을 매섭게 하는 바라크였지만, 지금 그 한마디 한마디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라크가 내뱉는 말들이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았더라면, 제게 남은 시간이 길었더라면 이리나를 다시 데려오지는 않았겠지.
이리나에 대한 부채감을 덜어내고 싶다는 제 욕심이었고, 제 위선이었다.
“그래, 내 위선이다.”
알렉시스는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 * *
“받으세요.”
내가 건넨 꽃다발에 아도니스 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다발과 내 얼굴을 몇 번을 번갈아 보고 있는 그녀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꽃다발이 너무 무거워서 제 팔이 떨어질 것 같아요.”
얼른 받아달라는 내 말에 그녀가 빠르게 꽃다발을 받았다.
나와 아도니스 경이 있는 곳은 수도 내에서도 유명한 디저트 가게였다.
축하 인사는 사람들이 많은 시끄러운 곳에서 하기는 싫었던 데다, 이런 곳에 올 손님이라면 어느 정도 명예나 재력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와 아도니스가 있는 걸 보고 지인들에게 말을 옮겨주는 것도 나쁘진 않았으니까.
“뭡니까?”
“토너먼트전에서 승승장구하셨다면서요? 곧 준결승을 앞두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
“일종의 축하 자리인 거죠.”
“축하는 그때 받았잖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토너먼트전에서 한 번 승리한 것과 이제 곧 준결승전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또 다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