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녀께서는 누구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마찬가지로 가족이요.”
“……바라크의 인정을 받고 싶으셨던 겁니까?”
내가 인정을 받고 싶은 상대는 바라크 단 한 사람의 인정이 아니긴 했지만, 바라크도 라이즈 공작가의 일원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좁은 의미로는 맞아요, 넓은 의미론 아니지만.”
내 긍정에도 아도니스 경은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살짝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시킬 겸 내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나저나 경이 검술대회에서 우승한다면 전하께서 가장 좋아하시겠군요.”
“아무래도 수족이 우승한다면 기뻐하시겠죠.”
페르포네가 집안에서 아도니스 경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짐작도 못 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본래의 성격이 다정한 만큼, 그리고 아도니스 경이 기뻐하기를 바라는 만큼 많은 선물을 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나저나 영애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무엇이요?”
이제는 다 식어버린 차를 편하게 입게 갖다 댔다. 잠깐 망설이는 얼굴의 아도니스 경이 볼 안쪽을 세게 씹다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데미안 님과 함께 지내고 계시잖습니까. 불편해하실 줄 알았는데.”
“아아.”
“데미안 님과 화해하신 겁니까?”
화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관계이지 않나. 데미안은 에이프릴이 내가 아닌 걸 알아차렸고, 그 점 때문에 에이프릴은 데미안에게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푼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데미안이 내게 고백했다, 따위의 헛소문을 에이프릴이 푼 격인데 곧 페르포네의 반려가 되고 싶은 에이프릴이 데미안과 소문을 청산하고 함께 지내도 좋은 이야기는 듣지 못할 것이다.
“전하와 파혼할 거예요.”
오히려 놀란 건 아도니스 쪽이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혹여나 누가 들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아도니스 경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아끼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1년 후에요. 그러니 데미안과 같이 지내도 이상할 건 없죠.”
“너무 갑작스러운데……. 어째서요?”
머뭇거리던 아도니스 경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좋아하는 분이 따로 있다는 말씀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절 위해서 하는 파혼이에요.”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페르포네의 곁에만 있던 에이프릴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제가 달리 원하는 게 있는데…… 그게 파혼을 해야만 얻을 수 있어서요.”
에이프릴이라면 오히려 페르포네가 저런 말을 했어도 마지막까지 파혼하지 않고 그의 곁에 있으려고 할 게 분명했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침묵을 어느 누구 하나 깨뜨리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페르포네에게 집착하던 에이프릴이 하기에는 영 이상한 말이겠지.
“요즘의 공녀는 정말로 제가 아는 공녀가 아닌 것 같아서.”
당연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아도니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딱딱하기만 하던 아도니스의 말이 조금은 누그러지게 들렸다.
“도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파혼에 대한 말과 순순히 그런 게 아니라는 내 말에 아도니스는 혼란 그 자체였다.
* * *
“외출하고 온 모양이구나.”
외출이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들리는 리안의 목소리에 몸에 두르고 있던 외투를 앰버에게 건넸다.
그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처럼 까끌해 보이는 낯이었다.
요 며칠간 공작가에서 보이지 않기에 어디 멀리 출장이라도 간 모양이었는데, 그새 돌아온 건가.
“아도니스를 만난다고 들었는데, 전하와 함께 만났나?”
“그렇다고 한다면 리안 오라버니께서도 바라크 오라버니처럼 구실 건가요? 전하를 만나지 말라고 말씀하시려고요?”
“바라크가 그리 말하든?”
“오늘 아침부터 가십지 기사를 들고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전 바라크 오라버니께서 기뻐하실 줄 알고 한 행동이었는데 말이에요.”
그 말에 리안이 피곤한 얼굴을 했다. 그의 피곤함이 나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바라크에게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라크가 네게 함부로 대했다면 대신 사과하마. 한동안은 공작저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 테니 조금 괜찮을 거고.”
“에이프릴 아가씨가 걱정돼서 가셨나 보네요. 그러다가 황성에서 잘리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공녀가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휴가를 계속 내는 걸 보니 곧 연금술 부부장직도 잘리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신은 어째서 바라크 같은 얼간이에게 분에 넘치는 능력을 주셨는지 모르겠다.
홀에 있던 걸 봐서는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무슨 할 이야기라도 있나?
본론을 꺼낼 것 같으면 한마디 해주기를 바라고 있을 때 리안이 입술을 달싹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께 가보거라. 네가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
“제가요?”
하고 싶은 말도 아니고, 알아야 할 이야기?
귀족들은 내뱉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의 사용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그랬기에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은 영 미심쩍고 의심스럽게만 들렸다.
바라크가 없기 때문인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공자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서 공작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굳게 닫힌 문에 노크를 두어 번 하고는 조심스럽게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다 들었습니다.”
“들어오거라.”
공작도 바라크와 마찬가지로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1년만 있을 대역치고 황태자와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걸 주제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앵무새처럼 ‘좋아하실 줄 알았다.’라고 대답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런 것뿐이기도 했으니까.
맞은편 소파에 앉으라는 공작의 손짓에 치마를 쓸며 앉았다.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공작은 찬찬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작 부부는 제 부모님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와 에이프릴이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내 친부와 공작이 조금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이 좀 길다고 느껴질 때쯤, 입가를 가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리안을 시켜 알리샤를 데려오려고 했다.”
바라크처럼 가십지에 대한 기사도,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내 예상을 완전히 비껴 나간 가족의 말에 몸이 절로 움찔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알리샤를 데려오려고 했다고? 담담한 표정은 알리샤라는 이름 한마디에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알리샤를 데려오려 했다뇨.”
“네가 그 애를 가족처럼 여긴다는 말을 듣고, 널 위해서 공작저로 데려오려고 했다고.”
하. 어쩜 이렇게 당당하게 말을 할 수가 있지. 그리고 어쩜 이렇게 뻔뻔한 태도로 ‘나를 위했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리안이 집에서 안 보였던 이유가, 그럼 알리샤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는 건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려고 할 때, 알렉시스 공작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 불만이나 반응을 보자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본인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가려는 눈치였다.
“그런데 데리고 오질 못했다.”
“…….”
“마을에 알리샤가 없었으니까.”
“알리샤가 없었다, 고요?”
“그래.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나는 공작이 연달아 하는 말에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알리샤가 마을을 떠난다는 건 내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저로 가겠다고 결정 내린 그날조차도 알리샤는 마을 산에 있는 나무집에 있겠다고, 그곳이 나의 집이니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고 말을 했던 이였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던 알렉시스 공작의 푸른 눈이 섬광처럼 빛났다. 잘 벼려진 칼처럼 내게 향하는 눈빛에는 짐짓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리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목소리였다.
알리샤를 데려오기 위해 마을로 갔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을에는 알리샤가 없었다는 것, 그게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앞의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다면,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라고 했을 테니까.
자신들이 알리샤에게 갔다는 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는 말과 같았으며, 내 이름을 부른 뒤 할 말이 본론이라는 걸 직감했다.
“혹, 신전과 무슨 관계라도 있느냐?”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한마디였다.
아버지가 신전에서 도망쳐 나오게 된 이야기도,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함께 도망 나왔던 어머니도.
알렉시스 공작에게 솔직하게 말한다면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지안에 대한 약점을 그의 손에 쥐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날 빤히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가 폈다.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공작이 날 위험에서 보호해 줄 것인가? 공작가가 또다시 날 버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널 보호해 주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