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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63)화 (63/109)

63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나온 한마디였다.

공작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애가 타는 모습이었다. 표정 변화가 좀체 없는 알렉시스 공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걱정을 드러낼 정도면 어느 정도는 진심이 섞인 말이겠지.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도 내렸다.

“필요 없습니다.”

전부 ‘아니다’이다. 사람을 믿어 배신당한 건 3년 전의 일로 충분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배신당함으로 인해 한 가지 크게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람을 구원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고.

“신전에 대해 드릴 말씀 같은 건 없습니다. 1년 후면 나갈 곳인데 제가 공작님의 무얼 믿고 저에 대한 걸 알려 드립니까?”

말마따나, 내게서 아버지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게 밝혀졌을 때 공작가가 나를 이용하기 위해 붙잡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멋대로 알리샤를 찾아가지 마세요.”

“네가 그 애를 아끼니까 데려오려고 한 거였을…….”

“그러니까!”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억지로 꿀꺽 삼켰다.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변하지 않았을까. 본인들이 하는 행동들이 날 위한 행동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귀족들 특유의 시혜적인 행동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멋대로 절 위한 행동이라고 판단하지 마시라고요. 그것 자체가 불쾌하니까.”

“…….”

“공작가에서 무슨 행동을 하든 간에 그건 절 위한 게 아니니까요.”

“이리나.”

“말마따나 절 협박하기 위해서 제 가족한테 접근한 걸지 누가 압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그가 입을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더는 붙잡지 않겠거니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의 집무실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네 친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안다.”

그리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나를 공작가로 데리고 왔으면, 친부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리고 저 말은 적어도 나 몰래 한 번 이상은 알리샤를 찾아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작가 사람들에 분노와 적대감을 갖고 있는 알리샤가 가만히 있지도 않았을 터였고. 아버지를 죽이고 날 버려다가 다시 데리고 간 마당이었으니 더 화가 났을 것이다.

공작부인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걸 사실대로 말했겠지.

“그래서요, 다시 내쫓고 싶어지셨습니까?”

“그런 말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낯색이 어둡게 변한 알렉시스 공작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너였다면 이곳에 죽어도 오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요?”

“그런데도 네가 여기로 왔다는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

“뭐 때문에 오기로 마음먹은 것이냐, 이리나.”

공작가에서 내게 지급할 수고비 때문이라는 말을 한들 믿지 않을 것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얼굴에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궁금하시면 제가 지내는 동안 찬찬히 두고 보시면 될 겁니다.”

“…….”

“제가 뭐 때문에 공작가에 돌아왔는지를.”

알렉시스 공작이 멍청하지는 않았으니, 내가 적대감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어쩌면 복수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도 생각하겠지.

내 목적을 알아차렸다고 한들, 날 당장 내쫓지는 못할 테다. 에이프릴이 돌아오기에는 무리가 있을 테니까.

다만, 내쫓지 않고 날 지켜볼 공작가의 의중이 궁금하기는 했다.

쥐뿔도 없는 계집애가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에 놔두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에 지켜볼 것인지.

아마도 전자에 가깝겠지. 부모도, 이렇다 할 신분도, 재력도 없는 계집애가 라이즈 공작가를 위협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일 테니까.

집무실을 나온 내가 향한 곳은 내가 사용하는 방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외출하기 위해 빠르게 홀로 향하자, 근처 계단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리안이 나를 붙잡았다.

“이리나, 이 시각에 어딜 가려고?”

“이거 놔.”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해도 태어났을 때부터 검을 잡은 인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하. 대답하기 전까지 놓지 않으려는 듯 보이는 리안 힐 라이즈에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날이 밝거든 가.”

“이거 놓으라고.”

“날이 밝거든……. 윽!”

좋게 말을 하는데도 알아듣질 못하는 리안 힐 라이즈에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발로 있는 힘껏 그의 정강이를 차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아래로 무너졌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나 되는 남자가 정강이를 붙잡고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은 못나다 못해 볼품없었다.

“네가 힘으로 하길래 나도 똑같이 힘으로 해봤어.”

통증 때문에 짧게 절뚝거리던 그가 인상을 살짝 쓰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었잖아.”

“라이즈 공작가의 말버릇인가 봐? 그 걱정돼서 했다는 말.”

마치 내가 그런 걱정을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는 행동과 말들에 비웃음만이 나왔다.

“누가 그런 걱정 원한대?”

“이리나.”

“날 원해서라고 말하지 마. 하나같이 본인들 위해서 한 행동들이고 말이잖아.”

“…….”

“진짜 날 위해서였으면 애초에 날 다시 찾으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 오라버니.”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내뱉을수록 무너지는 리안의 얼굴을 보니 이제는 웃음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구는 건 결국은 내가 못 이기는 척하고 사과를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 이유 때문인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으로 긍정도, 부정도 오지 않았다.

허망하게 날 올려다보는 리안에 내가 짧게 인상을 쓰다 허리를 숙였다.

“리안 오라버니, 오라버니와 공작님은.”

홀로 내려가는 계단 한가운데에서 내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퍼졌다. 오늘 하루 종일 맑았던 날이 꼭 비바람을 몰고 올 것처럼 음습했다.

“바라크보다 더한 쓰레기야.”

적어도 바라크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기라도 하지.

상처받은 푸른 눈동자가 어쩐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느껴졌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날 바라보고 있는 그에 몸을 팩 돌리고는 홀을 빠져나갔다.

날 걱정한다는 그 시혜적인 말과 행동이 얼마나 기만인지에 대해서 모르겠지.

“아가씨, 어디 가시는 겁니까?”

“아가씨!”

공작저의 로비를 빠져나갈 때, 다가오는 집사와 앰버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공작저에 있는 것을 알 터이고, 혹시라도 내가 마을로 가게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알리샤는 분명히 내게 연락을 줄 것이다.

다만 알리샤가 연락을 줄 때까지 가만히 손 놓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알리샤가 안전한 곳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싶었고, 공작저는 나나 알리샤에게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아니었다.

“하.”

엄지를 잘근잘근 물면서 목적지도 없이 걸음을 움직였다.

어느 정도 권력이 있으면서 신전으로부터 알리샤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 내가 가진 비밀에 대해서 끝까지 함구해 줄 수 있는 사람.

떠오른 한 사람에, 정처 없던 걸음에 목적지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거의 뛰다시피 도착한 장소는 공작저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 코밑을 훑고 지나가다 어깨 위로 툭, 하고 한 방울 떨어뜨렸다.

가문의 문을 지키고 있는 사병 둘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움찔했다.

“라이즈, 공녀님?”

“데미안에게 내가 만나러 왔다고 전해주세요.”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데미안 디니아 발슈타인.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요.”

그뿐이었다.

“하실 말씀 없으시다고 합니다.”

데미안의 수족이 나와서 내뱉은 한마디였다.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건데, 본인이 할 말이 없다고 하면 어쩌란 건지.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는 데다, 일교차가 큰 가을의 밤이니만큼 할 말이 없어도 예의상이나마 들어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딱 잘라 할 말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하다니.

데미안, 이 망할 자식.

하긴, 데미안은 날 별장에 있는 에이프릴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러는 것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기면서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데미안이 여태까지 찾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다고 전해주겠나?”

“여태까지 찾고 있는 사람이요?”

“그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걸 보아서는 데미안의 수족 역시 그가 누구를 찾고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에이프릴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내가 말하고 있으니 조금 당혹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짧은 침묵이 이어질 때 그가 숨을 작게 들이마시고는 몸을 비껴 섰다.

“들어오십시오.”

굳게 닫혀 있던 대공가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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