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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64)화 (64/109)

64화

보통 귀족들의 별장은 설산이 아름다운 북부에 있거나, 아니면 1년 내도록 온화한 기온을 유지하고, 푸른 바다가 장관인 남부에 있거나 하지만 대공가의 별장은 달랐다.

고향이 북부였기에 그들은 오히려 수도에 별장을 짓는 이가 되어버렸다. 이렇다 할 장식장도 없이 심플한 분위기였다.

바깥에서 빗방울을 조금 맞았다고 대공가의 사용인들이 수건과 몸을 녹일 만한 차도 건네주었다.

짧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찻잔을 두 손으로 세게 쥐었다.

결정을 내리기 무섭게 온 곳이긴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내 말을 들은 데미안은 또 어떤 얼굴로 날 바라볼까.

믿어주지 않을 거란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데미안은 이미 에이프릴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사람이었으니까.

닫힌 문 너머로 다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쾅! 하고 거칠게 열렸다.

“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니, 조금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데미안은 좀체 볼 수 없는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너 뭐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는데, 안 만나줄 것 같아서.”

레드와인 같은 붉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데미안이 에이프릴을 알아챈 것도, 그리고 나를 찾는 것도.

진짜와 가짜는 중요하지 않다고, 자신과 함께 지낸 이가 결국 진짜라는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를 것이다.

데미안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렇게 긴장이 됐는데, 막상 저 얼굴을 보고 나니까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이 얘기를 꺼내니까 효과가 좋긴 좋네. 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고.”

“너랑 말장난하고 싶은 기분 아니니까 본론부터 말해.”

“…….”

“너는 어딨는지 알고 있는 거지?”

공작가에서 나온 뒤로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에이프릴을 구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찾을 이유 같은 건 없었으니까.

내게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던 데미안이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평소의 딱딱하고 냉철한 모습이 아닌, 살짝 무너진 얼굴에 내가 혀로 마른 입술을 훑으며 말했다.

“잠깐 체스라도 둘래?”

“지금 장난해?”

“그렇게 화낼 일이야? 옛날 생각도 나고 좋잖아.”

데미안과 아카데미 시절 종종 두고는 했던 게 체스였다.

그게 어쩔 때는 내기이기도 했고, 또 어쩔 때는 다툼 끝에 건네는 화해의 신호이기도 했다.

옛날 생각이라는 말에 언짢게 굳었던 붉은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체스를 두면서 말해줄게, 데미안.”

조금 부드럽게 바뀌는 데미안을 보면서 소파에 앉았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데미안에게 상황을 꺼내는 건 내게도 힘든 일이었다.

아카데미 시절 때처럼 이야기를 꺼내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아 한 말이었다.

다짜고짜 공작가의 이야기도,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도, 그리고 알리샤를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꺼내는 것도 어려웠다.

연락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 다짜고짜 부탁을 꺼낸다면 얼마나 뻔뻔하게 느껴지겠나.

내 부탁을 들어줄 것처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또다시 말을 덧붙였다.

“체스가 끝난 후에 네가 찾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해줄게.”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떨어졌다.

데미안이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다 마른세수를 했다.

“렌시아.”

“예, 도련님.”

뒤에 있는 수족이 데미안의 부름에 재빠르게 대답했다.

“체스판 들고 와.”

“흐음…….”

턱을 괸 채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던 데미안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 체스게임이 당연히, 그리고 아주 쉽게 자신의 승리로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가 매번 체스를 진 상대는 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던 에이프릴이지, 지금 이 대역을 하고 있는 에이프릴이 아니었으니까.

말을 어떻게 둘지 고민하면서, 그가 슬쩍 맞은편에 앉은 에이프릴을 바라보았다.

체스를 두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만, 막상 체스를 시작하니 게임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상대의 입은 도무지 열릴 줄을 몰랐다.

이러다가 체스게임이 끝나고도 이야기를 못 듣겠다 싶을 때였다.

“공작가에 대해서 들은 거 없어?”

무심하게 툭 떨어지는 한마디였다. 공작가에 대해서 들은 거 없냐는 물음은 아주 포괄적인 물음이었다.

왜 없겠나. 입양아라고는 해도 대공가의 후계이니만큼 귀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제국 내에서 도는 굵직한 소문과 정보들은 전부 제 귀에 들어왔었다.

“공녀를 어렸을 때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찾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

“공녀를 찾기 전까지는 공작부인이 완전 미쳐 버렸다는 걸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나?”

약간 비꼬듯, 사실 그대로를 말하자 맞은편에서 ‘그러게’ 하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데미안이 멈칫했다. 일련의 대화가 정말로 아카데미 시절 체스를 두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로 돌아온 것 같아서.

“기적적으로 딸을 찾았다는 소문은 유명하지만, 막상 어떻게 찾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

“공작부인이 별장으로 가다가 찾았다고 알고 있는데.”

“제법 잘 알고 있네?”

‘요양차 별장으로 가는 길에 딸아이를 찾았다’라는 말만 길드를 통해서 들었지, 어떻게 찾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공작가에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이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딸을 찾았다는 사실이었지, 어떻게 찾았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다.

놀랍다는 듯이 짧게 감탄하는 에이프릴에 그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찾으려고 노력했으니까.”

말을 움직이려고 하던 에이프릴의 손이 멈칫했다.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누구를 찾고자 하는 말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이리나 데빈,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찾으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따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열심히 찾으려고 할 줄은 몰랐다니. 바보 같은 말이다. 자신에게 에이프릴은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이자 애틋함을 느끼는 상대였으니까.

대공가의 유일무이한 후계라고는 해도 입양아라는 점이, 그리고 현 대공인 대니언과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색 때문에 늘 사생아라는 소문이 뒤따라오던 자신에게 늘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다가왔던 에이프릴이 좋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가 에이프릴에게 마음을 열었던 계기가 된 건 남부로 견학 갔을 때였으니까.

“하긴, 남부 산에서 실종될 뻔하다가 같이 살아났으니 전우애가 생겨도 이상하진 않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고 있던 자신을 지탱했던 건 에이프릴이었다.

작고 여린 몸으로 끝까지 잡아 버텼던 기억은, 좋게 포장해도 즐거웠던 추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기억이 미화된 것처럼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흘리는 에이프릴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 일은 데미안에게서 추억이었지만,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 일은 그녀의 비밀이 데미안에게 드러난 날이기도 했으니까.

“너…….”

대체 뭐야. 분명히 가짜라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진짜 에이프릴처럼 굴긴 했었지만, 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만약 눈앞에 있는 이가 진짜 에이프릴이라면 제게 돌아왔다는, 정체를 밝히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데미안, 도플갱어라는 말 알아?”

“뭐?”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말은 에이프릴의 질문에 삼켜졌다.

“누군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말하거든.”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본론을 꺼내라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가 않았다.

지금부터 눈앞의 이가 할 말이 본론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네가 함께 시간을 보낸 진짜는 어디 갔었느냐고 물었지?”

에이프릴의 손에 있던 체스 말이 체스판 위에 올라갔다. 탁, 두는 명쾌한 소리에도 데미안의 시선은 계속 그녀에게 향한 채였다.

“공작가가 그 도플갱어를 버려서, 진짜 집으로 갔었어.”

“버렸다고……?”

“그래. 피가 이어진 진짜 공녀를 찾았거든. 그래서 필요가 없어졌어.”

눈앞의 에이프릴이 산뜻하게 웃었다. 데미안이 기억하고 있던 그 미소 그대로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공작가가 진짜 딸을 찾은 거야. 그리고 그 딸이 귀족가에 생활하기 시작했으니까…….”

“…….”

“가짜는 필요 없어진 거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체스판으로 향하자, 그 역시 시선이 스르륵 아래로 향했다.

에이프릴의 말이 움직임으로 인해 게임은 끝이 났다.

“이겼네.”

데미안은 일순 숨 쉬는 걸 잊었다.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카데미 시절부터 한 번을 못 이겨.”

앞에서 들리는 낮은 웃음소리에 그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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