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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65)화 (65/109)

65화

이곳이 대공가의 별장이 아닌 아카데미 시절 자신들이 공부했던 강의실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누군가 시계의 시침을 몇 년 전의 과거로 돌린 듯한 착각.

아카데미 시절부터 쭉 함께 지내왔던 제 친구이자, 연인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할 정도로 애틋함을 가지고 있는 상대.

데미안 디니아 발슈타인이 체스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상대.

“……에이프릴.”

진짜 에이프릴 힐 라이즈였다.

몇 년간 그렇게 찾았지만 머리카락조차도 찾지 못했던 이가 제 눈앞에 나타났다.

“데미안.”

잘게 흘리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데미안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 제 손등 위에 올라오는 작은 손의 온기에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부탁이 있어.”

두 사람의 체스게임은 부탁을 건 내기이거나 대화하기 위한 매개체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오늘 한 이 게임은 둘 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화를 하기 위한 매개체였으며, 동시에 그녀가 제게 하고 싶은 부탁이 있다는 것.

청회색의 눈동자에 제 얼굴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눈동자 속의 자신은 제법 멍청한 얼굴이었다.

“사람 한 명을 대공가에서 지켜줘.”

예상치 못한 간절한 부탁이었다.

붉은 눈동자는 놀람 그 자체였다.

데미안은 이로써 내가 본인이 찾고 있는 에이프릴이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체스판을 두고 대화를 나눈 것도, 아카데미 시절에 한 체스게임에서 그가 날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사실은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건 페르포네도, 그리고 진짜 에이프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너…….”

“내 가족 한 명을 대공가에서 지켜주길 바라.”

아무리 신전이라고 해도, 또한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는 로지안이라고 해도 대공가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황제는 오늘내일하는 것처럼 침상 위에 누워만 있으니 더더욱.

황실 사람들 모두가, 수도의 귀족들 전부가 황제가 죽길 바랐다. 그래야만 황제의 곁에 있는 로지안을 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찾는 이의 조건에 부합하는 이는 빌슈타인 대공가 하나뿐이었다.

데미안이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다,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게임에서 졌으니 부탁을 들어줘야지.”

“데미안…….”

“네 부탁인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그간 내게 보였던 냉랭함은 온전히 사라진 뒤였다. 싸늘하게만 느껴졌던 루비색의 눈동자가 따뜻한 불꽃처럼 느껴졌다.

그 따스함 그 자체에 마찬가지로 긴장이 풀린 내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다행이다, 데미안이 날 알아채서. 그리고 내 부탁을 들어줘서.

휴. 가벼운 한숨과 함께 활짝 웃자, 데미안이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좀체 보기 힘든 데미안의 미소였는데, 묘하게 미소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왠지 불길한데.

“이젠 내가 물어볼 차례네?”

불편한 상황이 올 것 같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에 몸을 옆으로 움직일 때,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몸을 숨겼던 3년의 시간 때문인지, 이번에는 도망가지 못하게끔 이야기를 전부 듣고 보내줄 것처럼 구는 그의 행동에 눈을 데구룩 굴렸다.

“여태까지 어디서 지냈어?”

“…….”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가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에피.”

애칭까지 입에 담으며 묻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정보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상대에게 길드장이 혀를 내둘렀다.

젊어 보이는 녀석이 어른에 대한 예의 같은 건 없는 모양새에 혀를 쯧쯧 찼다.

하긴, 어딘가의 귀한 도련님 같으니 저런 언행이 자연스러운 거겠지.

태어난 뒤로 모든 게 제 발밑에 있었던 것처럼 당당하고 뻔뻔한 모습에 테란은 그의 정체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느 집안의 도련님이기에 저렇게 행동하는 거지? 얼핏 느낌이 대공가의 도련님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이봐.”

짜증이 담긴 언성에 테란이 그제야 큼,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눈앞의 남자가 어느 집안의 사내든 뭐가 중요하겠나. 돈을 그만큼이나 줬으니 그만한 값어치를 해야 하는 것뿐이지.

“좀 더 알아보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많이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알아낸 거라도 보고해.”

큼큼, 테란이 헛기침을 몇 번 더 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시데반의 눈동자로 만든 팔찌까지 건네가며 알아보라고 했건만. 첫마디가 ‘그렇게 많이 알아내지는 못했다’라니.

페르포네가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면서 근처의 낡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전보다 수확이 있긴 한데…….”

테란이 볼펜 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5년 전쯤에 웬 남자가 사람 하나를 데리고 공작가로 왔었는데, 좀 특이했던 게 공작가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둘이서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나올 때는 남자 한 명만 나왔다고 합니다.”

5년 전이라면, 에이프릴이 달라지기 전의 이야기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일 것 같긴 했지만 작은 정보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던 만큼 페르포네는 테란의 말을 자르지 않은 채 전부 들었다.

“이름이 제임스 풀이라고 하던데, 도박쟁이더라고요.”

“그런 도박쟁이가 공작가에 갈 이유가 뭐지?”

“저야 모르죠. 근데 확실한 건 그 도박쟁이가 공작가에서 나온 뒤에 도박판에서 한탕 크게 했다는 것 같습니다.”

“…….”

“전부 다 날려먹은 거 같긴 했지만.”

공작가가 제임스 풀이라는 자에게 돈 같은 걸 줄 이유가 없는데.

페르포네가 짧게 혀를 찼다.

“같이 지내던 아들내미도 갖다 팔았는지, 아니면 도박꾼 애비를 놔두고 도망갔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고.”

“…….”

“공작가에 왜 간 건지 알아보려고 뒷조사도 하고, 직접 얼굴을 보기도 했는데…….”

사람을 시켜 제임스 풀을 직접 찾아갔던 길드원 하나가 고개를 저었었다.

“혀가 잘려서 말을 못 하더라고요.”

뭘 물어봐도 말을 못 해서 스스로를 답답하게 여겼던 도박 중독자를 떠올렸다.

“폐인이고, 도박 때문에 오른손도 없고.”

“내가 알고 싶은 건 공작가에 대해서라고 했지, 그 제임스 풀이라는 자에 대해서가 아닌데.”

구구절절 말을 하던 테란이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어린놈의 자식이 뭐 저렇게 싹수가 없어.

제임스 풀에 대해서 말을 계속 이어 가려던 테란이 멋쩍음에 뒷목을 쓸었다.

“설마 그 도박중독자에 대한 것뿐인가?”

“아, 아뇨. 조금 더 있긴 합니다. 사건이라고 부를 만한 건 두 개 정도였는데, 하나가 그 제임스 풀에 관한 거였고. 다른 하나가…….”

테란이 정보를 정리한 종이를 몇 장 뒤로 넘겼다.

“3년 전에 웬 사용인 하나가 비 오는 날 내쫓겼다고 합니다.”

“사용인이? 왜 쫓겨났지?”

“수소문해 보니까, 공작가에서 엄청나게 귀하게 여기는 보물을 건드렸다고 하더라고요.”

엄청나게 귀한 거라…….

공작가의 보물이라고 할 법한 게 있었나. 수도의 사람들이 비유적으로 하는 말로, 공작가의 보물을 에이프릴 힐 라이즈라고 하기는 했다.

공녀를 건드렸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아니다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에피는 하녀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이였다. 만약 진짜 에이프릴을 건드린 것이라면 그녀를 만났을 때 여타의 말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내쫓겼다는 사용인은?”

“모릅니다. 이름도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공작가에서 내쫓겼다는 표현을 쓸 상대라면 귀족 가문에서 아직까지 일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테란이 슬쩍 페르포네의 눈치를 살폈다. 기간을 1년 정도 주긴 했지만,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도 과거에 데미안이 정보를 의뢰했기 때문이라 조금 수월하게 찾은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건?”

“아시다시피 그 뒤로는 황태자랑 공녀가 약혼한 것, 약혼식 전날 라이즈 공작이 쓰러진 것, 몇 달 전 마차 사고가 일어난 것.”

“…….”

“그 정도뿐이죠.”

어깨를 으쓱이는 그에 페르포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더 있는데.”

이렇다 할 수확을 건지지 못한 페르포네가 마른세수를 하다 말고 턱짓을 했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정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공녀가 겪은 마차 사고가 사실은 사고가 아니라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은근하게 돌고 있습니다.”

“제국에서 공작가의 마차를 건드릴 자가 있나?”

“그러니까 가십거리 소문이죠. 도련님께서 가십거리도 함께 알아보라 했잖습니까.”

시키는 대로 한 건데 이런 타박을 주나. 테란이 짧게 툴툴거렸다.

“그런 소문이 도는 이유는?”

“그게, 공작가의 차남이 계속 별장 쪽으로 간답니다.”

“…….”

“일까지 쉬어가면서 별장이 있는 곳으로 가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마차 사고가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아주 중요하고 큰 비밀을 말해주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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