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67)화 (67/109)

67화

“알리샤라고, 늑대수인이 있어. 어렸을 때부터 가족처럼 지내왔고, 3년 동안 같이 지낸 내 유일한 가족.”

“늑대수인.”

“내가 공작가에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마 연락이 올 거야. 연락이 오는 대로…….”

“연락해 둘 테니 대공가로 가라고 해. 아니면 여기로 와도 되고.”

“수도는 안 돼.”

수도는 신전이 있기 때문에 안 되었다.

“아직까지도 숨기는 게 더 있나 보네.”

날 빤히 바라보던 그가 퍽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이야기도 할 때까지 안 보낼 거야?”

우스갯소리의 농담에 한참 굳어 있던 데미안이 처음으로 편안한 미소를 흘렸다.

“네가 말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 볼게. 3년을 기다렸으니, 아직까지는 더 기다릴 수 있어.”

복잡미묘한 표정이지만, 확실히 전과 다른 따뜻함이 있었다.

아카데미 시절 이야기를 나누던 때를 떠올린 것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겨우 토해냈다는 해방감에 어깨에 힘이 쭉 풀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말 안 할 생각이었나 보네.”

“그렇다기보단, 그냥 지금 당장은 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어서 이제는 마음이 좀 편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엉덩이를 가볍게 툭툭 털어냈다.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아까 전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얼핏 났다.

빗방울이 더 거세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창밖의 어두컴컴한 풍경을 바라보며 데미안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잠깐만.”

손끝에 닿는 따뜻한 사람의 체온에 내가 고개를 느리게 돌렸다.

손끝을 붙잡고, 천천히 손목으로 올라오는 데미안의 손길에 눈을 깜빡였다.

진중한 붉은 눈빛이었다. 깨끗하고 진한 눈동자 안에서 흔들리는 전등이 보였다.

“데미안?”

“그럼 이제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지?”

예기치 못한 물음에 “어?” 하고 되묻자,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이프릴은 네 이름이 아니잖아.”

“…….”

“내가 부르고 싶은 공작가 딸의 이름이 아니라 네 이름이야.”

그의 연분홍빛 입술 끝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네 이름을 알고 싶어. 이름이, 뭐야?”

이 수도에서 내 이름을 불러줄 타인이 생길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벅차오르는 감격에 손을 꽉 말아쥐었다.

페르포네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느꼈던 감격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웃음이 흘러나오려고 하지, 그리고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올 것 같지.

꾹꾹 참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빈.”

마른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데빈, 이리나 데빈.”

데미안의 눈이 반달로 아주 예쁘게 접혔다.

북부 사내들은 감정을 못 느낄 정도로 차갑다는 말이 제국의 속설 중 하나였는데, 그런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아주 다정한 미소였다.

“그래, 이리나.”

배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꿀꺽 삼켰다.

“날 찾으려고 해줘서 고마워. 연락을 해볼까, 싶기도 했었는데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거든.”

“지금이라도 말해줬으니 됐어. 네가 말한 부탁은 대공가 사람들에게 모두 전해놓을게.”

“고마워.”

새삼 수도의 귀족들이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이 잔인하고 감정을 못 느끼는, 냉정한 인물이라니.

그건 하나같이 그를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데미안은 마음을 연 상대에게는 한없이 무르고 다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전하에게는 말할 생각이 없는 거야?”

“아.”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데미안에게는 말했는데 페르포네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말은 할 거야.”

“…….”

“그게, 지금 말할 때는 아닐 뿐이지.”

페르포네에게 말할 순간은 정해져 있었다.

별장에 있는 에이프릴이 왔을 때, 나와 한 약속을 들먹이며 에이프릴이 보는 눈앞에서 파혼을 요구할 것이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상황을 보면서 말할 거야.”

“돌아온 데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데미안이 피식 웃었다. 내가 복수에 뜻이 있다는 말은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공작가로 돌아온 이유가 복수를 하기 위함이라는 걸.

“이리나,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줘. 그럼 나도 널 도와줄 수 있으니까.”

“내 개인적인 일이야.”

남의 손을 빌려서까지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 복수에 데미안을 끼워 넣어 그가 다른 이들에게 원한을 사는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너 에이프릴이…….”

“도련님!”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 덕택에 내 말이 싹둑 잘렸다.

예의에 어긋난 거긴 했지만, 데미안의 수족이 저렇게 나올 정도면 어지간히 급한 일이었나 보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언제라도 또 물어볼 수 있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입을 꾹 다물자 데미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렌시아.”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무슨 일이지?”

꼭 급한 일 아니면 가만 안 두겠다라는 얼굴로 묻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체스판을 조용히 치웠다.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예?”

렌시아의 말에 반응한 건 비단 데미안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기민하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포네가 대공가에 이렇게 언질도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데미안과 내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안으로 모셔라.”

“예.”

타닥타닥, 렌시아의 걸음을 뒤로한 채 내가 데미안에게 물었다.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찾아올 정도로 좋은 편이었나?”

굳이 따지자면 어색하거나 사이가 나쁜 쪽일 줄 알았는데.

데미안 역시 페르포네가 갑자기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닫혔던 문이 무겁게 열리면서 보이는 건 렌시아가 아닌,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카락이었다.

로브에 묻은 빗방울을 대충 털어내던 페르포네가 이리나를 발견하곤 이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겁니까?”

당연한 물음이었다.

이 늦은 시각에 나와 데미안이 함께 있다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테니까.

“나 몰래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요?”

싱긋 웃으면서 하는 다정한 말이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데미안의 집무실에 있다는 점에 페르포네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지려고 했다.

“두 사람이 나 몰래 다시 사이가 좋아졌을 줄은 몰랐네요.”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왜 자신은 또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데미안의 개인적인 공간에 에이프릴이 있다는 게 왜 이렇게 제 속을 긁는 걸까.

입고 있던 로브의 물기를 툭툭 털어낸 페르포네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나한테 파혼해 주겠다고 한 것도 데미안 때문인가?”

제 의지를 벗어난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말하자마자 싸늘해지는 집무실의 분위기와 더불어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이프릴에 페르포네가 볼 안쪽을 꾹 씹었다.

의도하지 않은, 명백한 말실수였다.

페르포네가 생각이란 걸 하기도 전에 먼저 나온 말. 마치 자신의 본심인 것처럼,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툭 튀어나온 말에 페르포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합니다, 말을 잘못했네요.”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던지라 페르포네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아카데미 시절 얼마나 돈독한 친구 사이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자신이었다.

화해를 했다면 축하해 주지는 못할망정. 제 속이 이렇게 좁은 인간이었다니.

황족에게서 사과의 말을 듣기란 굉장히 어려운 것이고, 또한 아무리 잘못을 했을지언정 쉽사리 사과를 입에 담지 않는 게 황족이었다.

빠르게 나온 사과에 에이프릴이 살짝 당혹감을 드러내다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불편하게 여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너무 경솔하게 행동했네요. 죄송합니다.”

에이프릴에게서 사과를 듣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에이프릴에게 속절없이 휘둘리는 건지 스스로 알 수가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에이프릴과 파혼하고 싶어 했던 제 모습 같지가 않았다.

도대체 왜지. 계속해서 저를 좋아할 줄 알았던 이가 파혼을 요구하니 당혹스러운 건가.

라이즈 공작가의 공녀를 내가 가지긴 싫고, 남을 주기에 아까운 그런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페르포네가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서 함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내가 방해한 것 같으니 다음으로…….”

“아뇨, 괜찮습니다. 이야기는 전부 끝났어요.”

에이프릴이 부랴부랴 집무실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런 에이프릴을 걱정스럽다는 듯이 따라나서려는 데미안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둘의 관계가 확실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