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페르포네가 에이프릴을 대하는 게 조금 달라진 것처럼, 데미안의 태도 역시 달라져 있었다.
“마차 타고 가.”
“아냐, 됐어. 괜찮아.”
봐라, 불과 얼마 전까지 에이프릴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쌀쌀맞았던 데미안의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지지 않았나.
제국에서 어떤 소문이, 무슨 이야기가 돌지 눈에 선했다.
차갑기만 하던 붉은 눈동자가 모닥불처럼 따뜻한 기운을 품은 채 에이프릴에게로 향하자 페르포네는 묘하게 속이 비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옛날, 두 사람이 함께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말 파혼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데미안 때문인가? 못난 생각이 자꾸만 페르포네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대공가에서 마차를 제공해 준다는데 타고 가도록 해요, 공녀.”
“전하?”
짓기 힘들었던 해사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면서 페르포네가 에이프릴에게 말했다.
“시각도 많이 늦지 않았습니까.”
“…….”
“호위도 없이 홀로 나온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이 늦은 시각에 마차 없이 약혼녀를 홀로 보낼 수는 없죠. 같이 돌아가죠.”
“절 보러 오신 게 아닙니까, 전하?”
호위 없이 홀로 나온 건 페르포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안위를 비교하면 더 걱정되는 건 페르포네 쪽이었다.
이렇게 몰래 나온 사실을 레르비앙이 알게 된다면 기함하다 못해 잔소리가 몇 날 며칠 이어질 게 분명했다.
“나온 김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데미안 경과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도 괜찮으니까요.”
그리고 페르포네의 입장에서도 데미안과의 대화보다 약혼자를 더 귀히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차가 필요할 듯한데, 데미안.”
이 늦은 밤, 에이프릴이 홀로 어두운 길을 걷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미소가 다시금 보이자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렌시아, 마차를 대령해라.”
그리고 에이프릴을 홀로 보내고 싶지 않은 건 페르포네뿐만이 아니기도 했다.
* * *
말발굽 소리와 더불어 마차 안이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다리를 꼰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금빛 눈동자가 무척이나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얼른 해줬으면 하는데.
그리고 호위도 없이 홀로 황실을 나온 페르포네가 의아하기도 했다.
“나온 김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데미안의 집무실에서 했던 그 말을 들어보면 데미안을 보고자 나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뭐 때문이지? 머릿속에 물음표로 빙빙 돌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긴 침묵을 깨우는 무거운 목소리였다.
늘 다정다감했던, 그리고 내게 처음으로 파혼을 요구했을 때조차도 상냥했던 페르포네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갈고리가 성대를 긁고 있는 것처럼 조금 거친 느낌이었다. 그리고 웃기게 그게 듣기 싫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냥 나보다 어린 동생으로만 느껴지던 페르포네가 처음으로 내 또래의 남자처럼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니, 우리가 1년 후에 파혼하겠다고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둘만 있는 마차 안에서 페르포네가 낯설게 느껴졌다.
파혼이라는 말이 다시 나오자 몸이 절로 움찔거리며 허리를 곧추세워 그를 바라보았다.
불쾌한 듯 서늘함만이 남은 눈동자였다. 평소의 따뜻한 햇빛이 아닌, 달의 표면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파혼하기 전까지 사이좋은 약혼자인 척 굴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 건 내가 아니라 공녀입니다.”
그리고 그가 무엇 때문에 불쾌한 건지 빠르게 눈치챘다.
“나한테 파혼해 주겠다고 한 것도 데미안 때문인가?”
실언이었다고는 했지만 그 말은 진심인 듯했다.
“늦은 시각에 데미안과 함께 있었다는 것 때문에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
“하지만 데미안과 저는 전하께서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전혀…….”
“아니겠죠. 두 사람은 늘 친구라고 했으니까.”
날 향하던 눈동자가 마차 밖으로 느리게 향했다.
“늘 친구라고 했었죠.”
뒷말이 더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페르포네는 굳이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1년 후에 파혼해 주겠다는 말은 페르포네와 레르비앙, 그 두 사람 앞에서만 했었는데 데미안 앞에서 거리낌 없이 한 걸 보면 페르포네가 알려준 모양이었다.
내가 아닌 에이프릴이 수도에 있었던 동안에 오히려 페르포네와 데미안의 사이가 퍽 돈독해진 것 같기도 했다.
돈독해지면 좋으련만. 레르비앙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사촌 관계이지 않나.
페르포네나 데미안이나 곁을 내주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지 사촌치고는 퍽 서먹한 관계였다.
둘이서 친하게 지낸다면 좋은 친구이자 동료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대공가에는 어쩐 일이었느냐고 물어볼까?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괜한 말로 페르포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까. 전에는 페르포네가 이렇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는데.
“부티크에서 옷을 고르지 않았던 이유는 어깨에 있는 상처 때문입니까?”
어렸을 적, 애완 표범에게 물렸던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도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려 하더니만 시간이 이만큼 흘렀는데도 저 말을 꺼내는 페르포네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르는 남자처럼 다가왔던 페르포네가 다시 어린 시절의 동생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가까워졌다.
“아닙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어요.”
애초에 부티크에 간 건 옷을 사고 싶다는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쭉 말씀드렸잖아요. 어깨나 등에 아무런 상처도 없다고요.”
펑펑 울던 페르포네가 저를 피하기 시작하자 꺼낸 비밀이었다.
변하지 않는 한마디에 턱을 괸 채 밖을 보고 있는 그가 푸핫,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처럼 다정한 말이네요. 지금 다시 그렇게 말하는 건 마음이 바뀌어서겠죠.”
“예?”
“아닙니다, 아무것도.”
표범에게 물렸는데 아무런 상처도 안 남았다는 말이 믿기 힘들어서 그런가.
내게 시선을 거둔 페르포네가 마차 밖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다시 긴 침묵이 흐르자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페르포네가 불편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올 줄이야.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 자체가 고요했다.
“로지안 님 말이에요.”
그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내게로 향했다.
새삼 페르포네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얼마나 눈부신지 알 것 같았다.
이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건 페르포네뿐이었으니까.
일단 말은 꺼냈는데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짤막하게 고민하다 말을 마저 이었다.
“신전과 친분이 굉장히 각별하신 것 같은데, 맞나요?”
“아무래도 신전 고아원 출신이니까요.”
신전 고아원 출신 고아들이 어떻게 이용되어 왔는지 타미타르테를 통해 들어왔던지라 더더욱.
친하게 지낼 리가 없을 텐데.
“생각해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요.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데…….”
거리를 밝혀주던 달빛이 구름 뒤로 사라졌는지 페르포네의 얼굴 위로 어두운 음영이 들어섰다.
“혼자만 변함없는 모습이시잖아요.”
로지안이 그 미모를 계속 유지하고 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은 얼굴이었다.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황제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 미모를 가꿨던 거라고 생각한 걸까.
만약 로지안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외모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지안 님이 후사를 보지 못하는 몸이기에 황실에서 크게 경계를 하지 않는 점이 염려됩니다.”
“…….”
“신관을 계속 곁에 두는 것도 영 꺼림칙하고요.”
“경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확실히 그렇죠.”
“…….”
“폐하께서 계속해서 기력을 찾지 못하는 것도, 또…….”
말을 이어가던 페르포네가 얼굴을 와작 찡그렸다.
아주 불쾌한 것을 본 사람처럼 흉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에 내가 몸을 가까이 붙였다.
“전하?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억지로 웃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공녀는 로지안이 후사를 보지 못하는 몸이기에 경계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예.”
공작가의 문 바로 앞에 도착했는지 말발굽 소리가 드디어 멈추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로지안을 경계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
“일곱 살 적부터요.”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바깥에서 ‘도착했습니다.’라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얼른 들어가 보세요.”
열리는 문과 함께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겨우 움직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공녀.”
“예.”
화사한 미소에 일순 심장이 무거운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사람의 나이를 먹게 하고, 또 새삼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된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곧 공작저로 사람을 보낼 테니, 내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예? 무슨…….”
“그럼, 이만 들어가 보세요.”
페르포네를 전처럼 대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