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예, 공녀님.”
그리고 퍽 순순해진 앨런의 모습도.
내가 문을 열고 방을 나서자, 별장의 사용인들이 내게 꾸벅 인사했다.
에이프릴의 상태가 호전됨에 따라 처음 별장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 여유로워진 낯들이었다.
“공녀의 모습이 제법 안정적이지?”
“예. 전과 같은 예민함은 많이 안 보이십니다.”
“맞아. 그렇게 보이더라고.”
부모를 잃어버린 뒤에는 노름꾼 양아버지 밑에서 쭉 지내왔었다.
공작가로 왔었을 때 딸자식 키운 값을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놈이었지.
내가 기억하는 에이프릴은 주로 예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공작가에 막 왔을 때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예민했고, 익숙해지는 2년 동안은 귀족들의 예법을 익히느라 예민했었다.
귀족들의 사교계에서도 그나마 버텼던 이유는 아마도 페르포네를 향한 연심 때문이었을 거고.
“지금은, 좀 편안해 보이네.”
그리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고, 그 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편안했던 날이 얼마나 되었나. 특히 공작가에서 내쳐진 뒤에는 하루하루가 악몽이었는데.
“후에 바라크가 없고, 두 사람만 있을 때 시기를 적절히 봐서.”
“예.”
별장문을 빠져나온 뒤에야 품에 있던 것 하나를 내밀 수가 있었다.
바라크가 내게 던졌던 신문이었다. 1면 하나만을 곱게 접어서 들고 온 것이었으니 앨런이 들고 있기에도 편할 것이다.
“펼쳐 봐.”
두 번 접힌 신문을 받은 앨런이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우는 풀벌레 소리와 더불어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려왔다.
구름에 몸을 숨겼던 달이 그가 글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슬그머니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두웠던 주위에 은빛의 빛줄기가 들어오면서 보이는 건 기사였다.
페르포네와 내가 다정하게 부티크로 들어가는 모습.
불화설을 잠식시키는 다정한 두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이걸 에이프릴에게 보여줘.”
“이리나 님.”
“왜?”
어쩐지 머뭇거리는 기색에 야트막하게 흘리던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친분이 생겨서 보여주기 힘들어?”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접은 선을 따라 똑같이 신문을 접고는 앨런이 나를 바라봤다.
“언제 보이면 될까요?”
“시기는, 어디 보자…….”
건국제가 지나서 보여주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라크가 없는 시기에 보여줘야 딱이겠지.
바라크가 없으니 며칠 속을 태울 것이다. 내가 만면 가득히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건국제 하루 이틀 전쯤?”
아, 기사를 보고 공작가로 가겠다고 난리를 칠 에이프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비식비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수고했어.”
다리를 완치시킨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약속한 값을 지불하는 바라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힘줄을 붙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나?”
“끊어진 힘줄을 새 다리로 이식받는 게 아닌 이상 힘들 듯하네요.”
신체이식은 불법이지만, 바라크가 원한다면 못 할 건 또 아니었다.
다들 쉬쉬하면서 도와주려고 하겠지.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평이한 물음에 그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그 역시 생각해 본 적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거기까지만 하지.”
머뭇거리면서 말을 잘라내긴 했지만 낯빛에는 고심하고 있는 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후에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슬쩍 던져둔 말에 그가 쑥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가라앉고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평소 같으면 값의 몇 배는 치를 테니 고쳐달라고 애원했을 게 분명한데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건.
내가 에이프릴에게 공작저로 돌아가면 된다고 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다리 이식에 대한 부분 때문에 그런 건가.
턱을 괸 채 그가 주는 금화 꾸러미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공녀님의 다리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아님 지금 공작저에서 공녀님 대역으로 있는 여자 때문에 그러세요?”
바라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걸 어떻게…….”
“아니, 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요? 제국민이라면 다들 신문 한 번쯤은 봤을 텐데요.”
“…….”
“굳이 신문이 아니더라도, 가십지는 봤을 거고.”
그리고 가십지에는 에이프릴 힐 라이즈의 이야기가 있을 거고.
보통의 신문들보다야 가십지 쪽에서 에이프릴의 이야기를 더 담았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을 테니까.
왜 갑자기 별장으로 갔는지, 황태자는 마차 사고 이야기를 들었으면서 왜 약혼녀의 병문안을 가지 않았던 건지.
“아, 그렇군. 그래…… 그랬지.”
한껏 날 서게 반응하려던 바라크가 수그러들었다.
에이프릴에게는 내가 있는 공작가의 가십지나 신문 같은 걸 보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을 것이다.
“공작저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던데.”
바라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이유가 지금 공작가에 있는 대역 때문인가요?”
제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이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한 물음일 게 분명한데 꼭 버니스라는 자가 모든 걸 다 알고 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자신과 비슷한 헤이즐넛 색의 눈동자에는 마냥 호기심이나 궁금증은 없었기 때문이다.
턱을 괸 채 자신에게 물어보던 버니스가 흐음, 짧게 소리를 내다 물었다.
“언짢게 해드릴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하는 모습이 마치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십지를 즐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바라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민 주제에 좀 건방지기는 했지만 눈앞의 이 여자가 에이프릴을 호전시킨 건 사실이었으니까.
혹여나, 후에 다시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요즘 제국의 신문만 봐도 그 여자의 얼굴이 나오잖아요.”
“쯧.”
그렇지. 지금 제국의 황색신문이나 가십지에서 떠들어대는 게 황태자와 라이즈 공녀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불화설이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에이프릴이 공녀의 자리를 찾으면서 데미안과 연락이 끊어진 지가 몇 년이었는데 얼마 전 황태자와의 외출에서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게 보였다.
정말 이리나 그 애가 온전히 에이프릴을 위해서 한 행동일까? 이리나의 의중을 읽을 수가 없어 수도에서의 생활이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기도 했다.
“근데 그렇게 똑같이 생긴 거 보면 정말 신기하네요. 여튼,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빨리 내보내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픽, 순간 웃음소리가 들리는 느낌에 가게의 낡은 나무 바닥을 향했던 바라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웃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환청을 들었던 모양이다.
버니스의 얼굴에서는 미소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제 대답을 듣고 싶어 응시하는 눈동자였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그 얼굴 위로 누군가가 덧대어졌다.
버니스와 만나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버니스를 보고 있자니 새삼 누군가가 떠올랐다.
자신이 치를 떨며 싫어하는 인물. 그리고 또…….
치를 떨며 싫어해야 하는 게 맞는 그 인물 말이다.
“공작가에 들어온 뒤로 헛된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요.”
이리나 데빈을 떠올리던 바라크가 일순 흠? 하고,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의 대화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주 실낱같은 미묘함이어서 정확히 ‘이게’ 이상하다, 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안 그런가요?”
헛된 생각이라. 에이프릴을 연기하고 있는 이리나에게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무언가 속셈이 있다고.
그런데 참 이상하지. 자신이 이리나 데빈 그 계집애를 폄하하고 욕보이는 건 상관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 버니스란 작자가 그런 말을 하니 속이 베베 꼬인다는 점이었다.
그 계집애 욕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게 싫어 바라크가 단언했다.
“그런 애는 아니니까.”
대역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여서 놀란 걸까, 아니면 에이프릴을 공작가로 데려가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그걸 미루는 말처럼 들리기에 놀란 걸까.
확실한 건 눈앞의 여자가 표정 관리에는 실패했다는 거였다.
큼, 그런 노골적인 표정에 그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말을 빠르게 덧붙였다.
“못 쫓아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렇게 멀쩡한 다리로 움직이는데, 갑자기 지팡이로 지탱하며 걷는 모습으로 나타나면 이상할 테니까.”
“…….”
“제 성력으로는 끊어진 힘줄을 다시 붙일 수 없는데 어쩌시려고요?”
“방법이…….”
그래,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저 여자, 버니스의 말처럼 이식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했고 또 제 양심과 도덕을 버리는 일이기에 말을 하지 않는 것뿐이지.
에이프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서 양심이란 게 계속해서 걸렸다.
바라크가 손을 한 번 꾹 말아쥐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더는 에이프릴이나 공작가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화제를 전환했다.
“새삼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