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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74)화 (74/109)

74화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려나. 여태 황족들이 입었던 스타일의 옷은 대체적으로 얌전하고 고아한 느낌의 옷이었다.

풍성한 벨라인의 드레스? 그것도 아니면 엠파이어라인의 드레스?

머릿속으로 대충 스케치를 그려가며 페르포네의 뒷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때, 잠깐 고민하던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날개뼈가 드러나는 옷이었으면 좋겠군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페트라샤가 멍하니 페르포네를 바라봤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의 진지한 모습을 보아하니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 진심이십니까?”

“예.”

당연히 진심이지, 라는 얼굴에 페트라샤가 어어, 눈치를 살피면서 레르비앙을 바라봤다.

보통 귀족 영애들이 입는 옷에서 어깨를 드러내긴 하지만…….

진심이냐는 눈치에 레르비앙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페트라샤가 이렇다 할 대꾸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페르포네가 말을 마저 이었다.

“어깨가 드러나고, 날갯죽지를 살짝 볼 수 있는 옷이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페트라샤가 아아, 하면서 일단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렇게 말한 사실은 공녀가 몰라야 하고요.”

“아, 예. 전하.”

그리고 페트라샤는 일련의 대화로 인해 깨달았다.

어쩌면 황태자 전하께서 조금 남다른 취향을 가진 분일지 모른다는 걸 말이다.

* * *

“전하께서 이번 건국제 때 공녀님께서 입으실 옷을 만들어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곧 공작저로 사람을 보낼 테니, 내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그때 했던 말의 의미가 이런 거였나.

공작저에 도착한 황실 수석 디자이너에 내가 음, 짧게 신음을 흘렸다. 약혼자라고는 해도 보통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거절하면 거절하는 대로 잡음이 생길 게 뻔하였고, 거절한다고 해서 페르포네가 순순히 그 거절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호의인 척하는 꿍꿍이를 내가 받아들이게끔 만들겠지.

“그래서…… 치수를 재려고 하는데…….”

내치지 말라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리며 앰버에게 지시했다.

“앰버, 손님용 차도 함께 준비해.”

“예, 아가씨.”

앰버가 방긋 웃으며 조용히 응접실을 나서자, 내가 물끄러미 페트라샤를 바라봤다.

바짝 긴장한 모양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페트라샤에 내가 대신 물었다.

“치수 안 재나요?”

황실에서 일하면서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 재도 되, 되나요?”

“네.”

치수를 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 늦어도 15분만 지나면 금방 끝날 일이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페트라샤가 줄자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팔길이와 어깨 너비를 재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허리에 줄자를 둘렀다.

이내 사이즈를 보던 페트라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많이 여위셨습니다.”

습관처럼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이 하는 대신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옆의 조수가 치수를 전부 다 메모했다.

“생각하고 계신 디자인은 있나요?”

“아, 그, 어, 그게, 생각하는, 디자인은, 어.”

없는 건가? 살벌하게 한 질문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하고 눈치를 보는 거지?

아까 전부터 쓸데없이 긴장하고 있는 페트라샤가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달리 생각하고 있는 게 없다면 내가 원하는 취향을…….”

“아뇨! 아뇨, 그, 생각하고 있는 디자인, 있습니다!”

“있다고요?”

“예! 원하는 디자인, 막, 제가 생각해 둔, 공녀님을 위한 디자인이 있습니다!”

어째 거짓말 같은데.

내가 의아한 듯 바라보다, 이내 얌전히 치수를 재는 게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치수 재는 일이 끝난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앰버가 곧 차를 들고 올 것이기에 내가 자연스럽게 그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요. 황실에서는 쉴 틈도 없을 텐데.”

“아, 아가씨…….”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뒤로 다시 한번 문이 거세게 열렸다.

조용한 공작저 안에 시끄러운 소음이 귀를 때렸다.

열린 문 뒤로 페트라샤의 차를 준비한 앰버가 사색이 된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앰버가 저럴 이유는 하나뿐이지.

별장에만 계속 있던 바라크가 드디어 공작저로 온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곧 있으면 건국제이니 온 거겠지. 이번에는 별장을 한동안 비울 바라크에 내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오라버니, 노크는 하고 들어오셔야죠.”

“황실에서 사람이 왔……!”

이미 사람이 간 줄 알았던 모양인지 매섭게 올라가던 목소리가 억지로 참는 것처럼 낮아졌다.

황성 연금술부 부부장이 예민한 미친개라는 이야기는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지라 페트라샤가 조금 겁을 먹은 눈치였다.

여기에 있다가는 페트라샤에게 괜한 불똥이 튈 것 같다는 생각에 내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좀 힘들겠네요.”

“아, 예. 예예!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안경을 치켜올린 페트라샤가 황급히 챙겨온 짐을 들고 응접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예?”

페트라샤를 붙잡는 한마디에 눈가가 살풋 찌푸려졌다.

그녀는 바라크가 왜 자신을 붙잡는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냉랭한 얼굴의 바라크에 페트라샤가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뒷걸음질을 칠 때였다.

“황실 수석 디자이너가 왜 공작저에 온 거지? 누가 보냈나?”

“아, 저……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맹수 앞의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페트라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왜 바라크가 화난 얼굴로 자신에게 이유를 물어보는지 모르는 눈치겠지.

앰버가 차를 응접실 테이블에 내려놓자, 내가 한 모금 삼켰다.

“어째서?”

“예?”

순순히 대답하면 보내줄 줄 알았는데 또 질문을 하는 그에 페트라샤가 죽상이 되었다.

“왜 황태자 전하께서 공녀에게 궁정 디자이너를 따로 보냈냐 이 말이다.”

“……그거야.”

거진 울 것처럼 변한 얼굴을 보면서 내가 한숨을 내쉬고 끼어들었다.

“약혼녀니까 그렇겠죠.”

끼어들지 말라는 듯, 바라크의 눈매가 매섭게 치켜올라 갔다.

“예예! 마, 맞습니다. 수도로 돌아오셔서 그, 고, 공녀님을 위한 드레스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

바라크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재생되는 착각이 들었다.

에이프릴이 다쳤다는 이야기에 병문안 한 번 오지 않고, 서신 한 번 보내지 않던 페르포네가 갑자기 이런 호의를 보인 것이니 속이 바글바글 끓는 거겠지.

하물며 그 호의의 상대가 진짜 에이프릴이 아닌 내가 받고 있으니까 더더욱.

유치한 심보에 비죽비죽, 하고 잔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내야만 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짧게 묵례한 페트라샤가 부랴부랴 응접실을 나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약혼자라고 챙기는 꼴이 웃기기 짝이 없군.”

“오라버니께서는 절 안 믿는 것치시곤 제법 저를 믿으시나 봅니다.”

“뭐?”

“방금 한 말을 제가 전하에게 가서 하면 어쩌려고요? 전하에게 못 해도 공작님에게는 할 수 있죠.”

“너…….”

아무것도 모르는 놈의 꼴이 웃긴다― 라니. 웃기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정작 바라크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동생을 애지중지 아꼈는데, 동생은 정작 황태자의 파혼을 요구받았다는 이야기를 오라비에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도 믿지 않는 건지, 아니면 아직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지.

“자기 약혼자도 구분 못 하는 이를 뭐가 좋다고……!”

“뭐, 당연하죠.”

“뭐?”

“황태자 전하는 에이프릴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구분 못 하시는 거겠죠.”

“…….”

“현실 파악은 제대로 하셔야죠. 전하는 에이프릴에게 큰 애정은 없으십니다.”

“말조심해.”

“큰 애정이 없다는 말이 좀 듣기 싫으시다면, 큰 애정이 없다는 말 대신, 음, 큰 애정이 없다는 말을 대신할 만한 말로 뭐가 좋을까요?”

큰 애정이 없다는 말만 골라서 하는 나에게 그가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그래, 큰 미움도 관심도 없다.”

“……전하와 에이프릴은…….”

“좋은 소꿉친구 관계였다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바라크의 말에 내가 싹둑 자르며 끼어들었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웃겼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소꿉친구로 사이가 좋았던 건 나였지, 에이프릴이 아니었으니까. 본인이 말하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전하 앞에서 괜한 수작질 부리지 마.”

“오히려 수작질을 부려서 좋아하게 된다면 에이프릴 아가씨한테 더 좋은 일 아닐까요?”

“그 입 닥쳐. 아버지가 널 공작저로 데려온 이유는.”

바라크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이내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오만하고 도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일평생 누군가를 무시하고 깔보는 게 익숙한 바라크다운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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