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안젤리카가 죽기 직전에는 에이프릴을 이리나처럼 생각했기도 했다.
“허억! 윽……!”
뻐근하게 굳어가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알렉시스가 의자에서 엎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물이 그의 상의로 튀었다.
“으윽, 윽……. 헉. 켁!”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서 크게 들이마시고 주먹 쥔 손으로 심장을 쿵, 쿵, 세게 쳐보았지만 고통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콜록, 켁! 하면서 기침을 내뱉자, 핏덩어리가 울컥하며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제시간에 꼬박꼬박 먹어야 하는 약의 정량을 먹지 못했기에 굳어지는 감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작은 약병에 평소보다 적던 내용물을 떠올렸다.
“으, 으윽…….”
바깥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알렉시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심장의 통증과 더불어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공작님, 잠깐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패트릭에게 들어오라는 말도 차마 나오지 않고 있을 때, 무언가를 느꼈는지 다급하게 “공작님, 들어가겠습니다.” 한마디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님……!”
책상에 엎어져 있는 그의 모습에 패트릭이 기겁하며 뛰어왔다.
“소란, 피우지 마라.”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약은 안 드신 겁니까?”
“약…… 윽.”
약?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과 더불어 알렉시스의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점점 굳기 시작하니, 온몸에 있는 장기가 살려고 괴롭게 발버둥 치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가씨께서 약을 드렸는데, 안 드신 겁니까? 이, 일단, 조, 조금만 견뎌주세요.”
“이리나는…….”
이리나에게 약을 건넸었구나. 그래서 그 애가 물잔을 들고 이 집무실로 향했던 거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알렉시스가 힘에 겨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은…… 건네줬다.”
패트릭이 알렉시스를 소파에 부축해 뉘었다.
“그 약이 오늘 마지막 분이었는데, 제가 어서 신전에 다녀오겠습니다.”
“괜…….”
괜찮다, 라는 말을 채 잇기도 전에 패트릭이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심장이 굳어지는 병, 아글리티니.
알렉시스가 가진 병명이었다. 발병하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희귀병이다 보니 발병의 원인도,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영양제라고 사람들에게 속이며 먹는 약의 실체는 진통제와 근육이완제처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해주는 약이었다.
패트릭이 빠른 걸음으로 공작가의 홀로 향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글리티니라는 병명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약을 제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신전에 공작의 병명을 말할 수나 있을까.
대신전 출신이 아닌 다른 신관을 겨우 불러 알아낸 병명이었다.
자신이 그 병에 걸린 것처럼 약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는 것도 더는 무리지 않을까란 불안이 몰려왔다.
내일 도착하기로 한 약을 생각하며 패트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외투도 입지 않은 채 나가려고 할 때였다. 약을 먹었는데도 그렇게 아픔을 느낄 정도라면 병이 심상찮게 진행되고 있다는 거였다.
“아가씨……!”
때마침 들어오는 이리나에 패트릭이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양팔을 콱 잡았다.
“집사?”
놀람과 불쾌감이 한데 섞인 시선이 패트릭에게 콕 하고 박혔다.
그녀가 공작저에 악감정이 남아 있다는 건 알지만, 정말 건네준 걸까?
공작님은 약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그 역시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나.
불안하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하지 않을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무슨 일이지?”
“공작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신전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이리나가 눈을 깜빡이다 그 물음에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알렉시스와 비슷한 닮은 눈동자에 사색이 된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이리나가 거의 절망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어보는 패트릭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 입술을 달싹였다.
“공작님께서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한가?”
대답하려고 하던 패트릭이 머뭇거리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리나는 일순 제 양팔을 잡고 있는 패트릭의 손에 힘이 빠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조금 머뭇거리고 있던 패트릭이 저와 쓸데없는 실랑이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이제는 밤이라 쌀쌀할 텐데 외투도 입지 않고 공작저를 나가는 패트릭의 뒷모습을 보다 그녀는 공작의 집무실 쪽 계단으로 향했다.
패트릭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지?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가? 살벌한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드는 것과 별개로 이리나의 걸음은 여유롭고 우아했다.
다급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음으로 계단을 하나씩 밟고, 아무도 없는 긴 복도를 걸어 공작의 집무실 앞에 섰다.
평소라면 노크를 하고 들어갔겠지만, 지금 알렉시스 힐 라이즈가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궁금해 문을 벌컥 열었다.
“……허?”
집무실은 깔끔한 알렉시스의 성격과 달리 엉망이었다.
자신이 엎었던 물컵 때문에 젖은 집무실의 종이와 책상 밑으로 떨어진 물.
그리고 소파에 누워서 고통스러워하는 알렉시스의 신음까지. 심장을 붙잡고 컥컥대고 있는 그를 집무실 문 앞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공작님?”
은회색의 긴 장발이 소파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상태였다.
눈을 감고 있던 알렉시스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땀방울이 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리나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나가, 거라.”
알렉시스는 자신의 고통을 이리나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정을 산다 생각할까 봐 두렵기도 했으며, 동정심 때문에 이리나가 어쩔 수 없이 자시을 용서하게 되는 상황이 오는 것도 싫었다.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이런 쓸데없는 자존심이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어서, 나가래도……!”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녀를 억지로 내쫓으려고 한 것과 별개로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들어오는 건 다급히 제 쪽으로 뛰어오는 이리나의 모습이었다.
“공작님……?”
이리나가 공작가로 돌아와서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목소리였다.
통증 때문에 드문드문 끊기려는 정신을 근성으로 버티고 있는 알렉시스의 머리 위로 이리나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정신이 끊기기 전 흐리게 이리나의 손 너머로 보이는 이리나의 입가와 당혹감이 사라진 차분한 목소리였다.
“공작님, 눈 감으세요.”
어렴풋이 보이는 흰 빛 사이로 그의 시야가 삽시간에 점멸되었다.
* * *
“어서, 나가래도……!”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그렇게 외쳤던 걸 봐서는 이런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게 확실했다.
손바닥과 옷깃에 얼핏 묻은 피를 봐서는 알렉시스 공작이 각혈까지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기에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인 거지?
야윈 모습을 보며 몸 상태가 크게 나빠진 건 아닐까 했던 생각이 그대로 들어맞자 당혹스러웠다.
알렉시스 공작과 병이란 단어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아직도 어디가 불편하고 아픈 것인지 괴로워하는 알렉시스의 모습에 이리나가 그의 이마에 손을 다시금 갖다 댔다.
“죽을병은 아니면 좋을 텐데 말이지.”
가느다란 흰 빛이 그의 몸을 감싸는 걸 보며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알렉시스 공작이 토한 것으로 보이는 피를 손끝으로 대충 슥 닦아냈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피 얼룩에 이리나가 짧게 혀를 찼다.
에이프릴의 약혼식 하루 전날 쓰러졌다고 해도, 그 뒤로는 아무렇지 않게 지내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어디가 아프다고 해도, 자신이 갖고 있는 성력을 사용한다면 금방 나을 거라는 걸 알지만…….
알렉시스를 향하던 손을 거둬들였다. 저가 해줄 수 있는 건 딱 이 정도였다.
그가 느끼고 있는 통증을 거둬주는 것.
아직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평온하게 잠에 빠져든 그를 보다 걸음을 돌리려고 하던 때였다.
“공작님, 들어가겠습니다.”
허락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패트릭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뛰어왔는지 살짝 헐떡이는 숨은 그가 굉장히 다급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가씨.”
패트릭의 시선이 이리나의 뒤, 소파에 누워 있는 알렉시스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