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저가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고통스럽게 숨을 컥컥대던 알렉시스는 평온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사실 잠을 자고 있는 건지 극심한 고통 때문에 기절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주무시는 중이야.”
“아…….”
이리나가 자신이 한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통증은 많이 가신 얼굴에 패트릭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동안 괜찮은 것처럼 보였는데, 아글리티니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진행된 게 아니라면…….
이리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패트릭이 그녀를 살짝 곁눈질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공작님께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던 영양제, 전해 드리신 거 맞으십니까?”
……그게 아니면 이리나가 부러 알렉시스에게 약을 건네지 않았던가.
나이 든 집사의 심장이 불안감으로 두근두근, 크게 뛰었다.
“어디 편찮으신 곳 없다 하지 않았나? 그저 단순한 영양제라면 오늘 하루쯤 안 드셨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텐데.”
“아가씨!”
“공작님의 몸이 급격하게 나빠진 거라면 오늘 드시지 않은 영양제가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나빠졌다고 봐야 하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설득력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리나는 알렉시스의 몸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말씀은 전하지 않으신 거라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공작님께선 뭐라시던가?”
이런 반응이라면 패트릭이 알렉시스에게도 직접 물어봤을 것이다.
‘공작님, 오늘 치 약을 아가씨를 통해 전해 드렸는데, 드시지 않으셨습니까?’라고.
“공작님께 물어봤을 것 아닌가. 공작님은 뭐라고 하셨지?”
대답하라는 재촉에 망설이던 그가 대답했다.
“공작님은 약을 받으셨다 하셨습니다.”
자신을 감싸주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말마따나 전해달란 것만 전해주었다면, 공작이 각혈까지 하며 쓰러질 일은 없었을 테니까.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던 걸까.
죄책감 때문에? 아무리 죄책감이 든다 한들, 본인 목숨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
“그런데 내게 또 묻는 건 내가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
“…….”
“하긴, 나 같아도 내가 가장 의심스럽겠군. 집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심이지.”
“그런 생각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패트릭이 부랴부랴 부정했지만 이리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곁눈질하다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공작을 향하고 있는 이리나의 눈빛이 퍽 무거워졌다.
청회색의 눈동자가 깊숙한 심해처럼 무거운 빛을 띨 때, 연분홍빛 입술이 움직였다.
“공작님께서 어디가 편찮으신 거지?”
물어보기는 하나,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걱정 같은 게 아니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사실 그대로의 혼잣말과 질문 사이의 말에 패트릭이 멈칫했다.
옷가지에 있는 피 묻은 얼룩과 더불어 오늘 상태를 보았으면 알렉시스의 몸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디가 아프신 건가.”
공작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
그리고 패트릭은 그런 이리나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공작가의 일원들이 3년 전 이리나에게 못 할 짓을 한 건 맞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그래도 한때는 아버지였고, 상처받은 이리나에게 어떻게 해서든 배상해 주고 싶어서 부른 거였는데 이렇게 일말의 감정도 없는 눈빛을 할 수 있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 가문의 가주의 건강 사항은 가문의 기밀이니까요.”
원리원칙대로 대답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패트릭에게 이리나의 나붓한 입술에서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튀어나왔다.
패트릭이 말해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주의 병명은 집사장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공작의 병에 대해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나에게 말하고 싶었다.
혹여나 아글리티니라고 말한다면 저 무감각함이 사라질까 해서.
다시 전과 같은 얼굴로 공작가에 있으실까 싶어서.
“공작님께서도 많이 약해지셨나 보네. 옛날에는 정말 가차 없는 분이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작가로 날 데려오라고 한 게 혹시나 싶지만.”
“…….”
“몸이 급격하게 나빠져서 데려오라 하신 건가 싶어서.”
“…….”
“내가 아는 공작님은 본인이 내린 결정에 후회하지 않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분이신데.”
한쪽 입술 끝을 비뚜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얄궂은 미소에 패트릭이 자신도 모르게 혀를 짓씹었다.
보지 못했던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이리나 데빈은 너무 많이 변했다.
사랑스럽고 다정한 미소가 늘상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었는데, 이제는 그런 미소는 보기가 어려웠다.
냉소적이고 비뚜름한 감정만이 그대로 남았고, 늘 내주던 곁은 이제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차갑게 벽을 치고 있었다.
“아가씨.”
그리고 이리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이즈 공작가라는 걸 알았기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패트릭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발걸음을 옮기려던 이리나의 몸이 멈추었다.
“아가씨께서 공작가를 미워하시는 걸 압니다.”
“…….”
“아주 많이 미우시겠죠. 야속하시기도 할 겁니다.”
패트릭이 손에 들고 있는 진통제를 꾹 쥐었다.
이리나가 3년 전 공작가에서 나간 뒤 사람들이 어땠었나.
알렉시스 공작이 어땠었나. 알렉시스의 시선이 늘상 이리나가 돌보던 정원으로 향했었고, 리안은 무심결에 늘 이리나를 찾거나, 이리나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챙겨오고는 했었다.
집에 없었지만, 흉터처럼 그녀의 존재가 공작가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3년간 누구보다 절절하게 후회했던 사람들이다.
돌아가신 공작부인께서 임종 직전에 찾았던 인물이 에이프릴이 아닌 이리나였다면 말 다 한 것이겠지.
“공작가의 모두가…… 아가씨를 그리 떠나보낸 걸 후회했었습니다.”
모질고 차갑게 겨울비가 내리는 날 보낸 걸 많이들 후회했었다.
이리나가 어떤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보고 있을지 몰라 패트릭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공기가 턱턱, 막혔지만 패트릭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가씨께서…… 조금만 마음을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
“조금만 노력해 주시면…….”
차갑다고 한들 이리나의 본성은 다정하고 선량한 이였다.
할아버지뻘의 나이 든 집사가 이렇게 말한다면 조금 수그러드는 모양새로 받아들이겠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한 번 내쉬면서 알겠다고 대답해 주겠지.
“내가, 왜?”
그리고 예상치 못한 물음이 툭 떨어지자 패트릭이 살짝 숙였던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내가, 왜라니……?
이런 질문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이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할지도 몰라도 패트릭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리나의 이마에 주름이 살짝 생긴 걸 보아 그녀가 지금 마땅찮아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
“패트릭, 나는 조금 어이가 없을 지경이야.”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왜 이 관계에서 노력을 해야 하나 싶어서.”
패트릭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뭐 때문에 이들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가…….”
가족이잖습니까. 아니, 가족이었잖습니까, 라는 말이 입안에서 빙빙 맴돌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이리나가 할 한마디는 뻔했다.
그 가족을 먼저 버린 건 공작가라고.
“나는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데, 내가 왜, 무얼 위해서 노력해야 하냐고.”
“…….”
“차라리 바라크 힐 라이즈처럼 허튼짓하지 말고 에이프릴인 척 똑바로 연기해 달라고 부탁해.”
이리나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날 서고 아프다.
뾰족한 창이 멀리서 날아와 제 몸을 헤집는 느낌이었다. 고작 집사인 자신도 이렇게 아픈데 알렉시스나 리안이 들었다면 저보다 몇 배로 아파할 것이다.
“집사, 나는 여태까지 많이 노력했었어. 내 이름을 잃고 에이프릴로 지낼 때도.”
“…….”
“진짜 에이프릴을 찾게 돼서 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그 순간에도.”
고저 없는 평이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메아리처럼 윙윙 울렸다.
“노력도 상대에게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거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밀가루 찌꺼기처럼 남아야 노력이라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이리나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이미 과거에 충분히 많은 노력을 했고.”
이리나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집무실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도, 공작가에 일말의 애정도 없어.”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가는 이리나를 보면서 패트릭이 쥐고 있던 진통제가 부드러운 카펫 위로 툭 떨어졌다.
이리나가 공작가에서 버려진 뒤, 혼자 지냈던 3년의 시간은 그녀를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금의 이리나는 자신들이 함께 지내왔고, 기억하고 있던 그때의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