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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80)화 (80/109)

80화

“웃기지도 않아.”

마음을 조금이나마 열어달라니.

어쩜 그렇게 뻔뻔한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지금껏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데.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다시 왔는데.

방 안으로 들어온 이리나가 입고 있던 겉옷을 대충 의자에 걸쳐두고는 침대에 누웠다.

방 안의 까만 천장을 바라보다, 협탁 위에 돌고 있는 오르골로 손을 쭉 뻗어 태엽을 몇 번 돌렸다.

어린 시절 자주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오자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신관을 유혹해 함께 도망쳤다는 게 그 사람의 죄였지만 실상은.”

“다니엘을 도망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죽임당한 거야.”

핏발 선 타미타르테의 눈동자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슬픔, 분노, 증오까지.

그리고 그가 신관의 신분이면서 아직까지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알게 만들었다.

“그러니 도와줘, 이리나.”

자잘한 흉이 많던 그의 손이 내 손등 위로 올라왔었다.

“내가 버니스 님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공작가의 힘을 빌려줘.”

타미타르테가 마지막으로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언젠가 필요하다면 신관으로서 나도 도와줄 테니.”

타미타르테는 울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오고 또 오기만을 바란 사람처럼 핏발 선 눈동자에서 얼핏 희열감까지 느껴졌다.

“내가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줘.”

“하아…….”

이리나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까만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타미타르테가 들고 있던 어머니의 초상화였다.

* * *

“일자리는 우리가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여관에서 자신을 도와준 제시의 말에 옆에 서 있는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겠지.

알리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으니까.

하긴, 금방 떠날 건데 일을 하는 것도 조금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만약 신전이 여기까지 찾아온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었고. 친절을 베푼 두 사람에게 괜히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편지는 누구한테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혹시 연인?”

제시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퍽 음흉하게 물어보자 알리샤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렇게 긴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제 인생에서 제시 같은 인간은 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가족한테 보내려고요. 가족이 수도에 있거든요.”

“아, 가족∼ 수도∼”

가족이라는 말에 내심 흥미를 잃은 눈치였다.

“그럼 짐을 싸서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냥 여행이면 수도로 가는 편이 더 낫지 않나?”

“확실히 수도가 그나마 수인 차별이 덜하긴 하지.”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까. 한 번씩 출장차 수도로 가는 일이 있어서 가게 되면, 북부에서 느끼던 시선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북부보다는 사람들의 신기하다는 눈길이 덜했다.

방금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어서 알리샤가 조금 난처한 미소를 띠었다.

눈치 빠른 제시나 보리스가 그 내색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사람마다 여러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

슬슬 집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부에서 칙칙한 녹색을 갖고 있는 건물은 대공가가 제공하는 기사들 숙소뿐이었으니까.

“저기가 우리 둘이 지내는 집……. 어?”

“아벨 아냐?”

지내는 집을 쭉 가리키던 제시가 멈칫하고, 보리스의 입에서 다시 낯선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벨?

알리샤 역시 집 앞에서 기웃대고 있는 이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머리가 귀밑으로 살짝 내려오는 단발이었는데, 다부진 몸이나 큰 기로 봐서는 남자로 보였다.

“아벨?”

보리스의 부름에 아벨이라는 남자가 단발을 찰랑거리며 몸을 팩 돌렸다.

“아, 집에 없다더니. 어디 나갔다 왔나 보네.”

“휴무니까.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단장이 기사들을 전부 모집하래.”

“휴문데?”

“휴무여도.”

알리샤가 보기에 아벨이라는 남자는 퍽 특이한 이였다.

눈동자는 보랏빛인데 머리카락 색은 뭐랄까, 굉장히 얼룩덜룩했기 때문이다. 갈색 머리 사이로 검은색, 붉은색이 얼룩덜룩하게 뒤섞여 있었다.

휴무에 또 부르는 이유가 뭐람. 보리스와 제시 두 사람이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했다.

얼마만의 휴간데. 설마 또 강제 출장은 아니겠지.

굉장히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면서, 제시가 품 안에 있는 열쇠를 알리샤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눈빛에 제시가 가볍게 대꾸했다.

“안에 들어가서 204호인 곳이 나랑 보리스가 지내는 방이에요. 거기서 보낼 편지 쓰고 있어요.”

“아니, 그래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가볍게 집 열쇠를 내밀어도 돼? 어처구니가 없어 알리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런 제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보리스가 가볍게 덧붙였다.

“도움이 엄청 간절해 보였는데 그럴 것 같지는 않아서요.”

“…….”

“게다가 일자리까지 부탁한 것 정도면 한동안은 이곳에 있을 거고.”

“…….”

“대공가 소속 기사들이라고 했는데 뒤통수 치고 도망갈 정도로 간이 클 것 같지도 않아서요.”

보리스의 옆에 있는 아벨이 뭐야, 뭐야? 하면서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샤워 시설은 3층 끝에 있으니까 쓰면 돼요. 누가 물어보면 나나.”

제시가 보리스의 어깨에 손을 툭 올리며 대답했다.

“보리스 이름 대면 되고.”

“아니, 그래도…….”

사람을 엄청 잘 믿는 건가, 아니면 이 세상에 더없을 호구인 건가?

그러고는 순식간에 아벨이란 남자를 끌고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야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자, 그제야 알리샤가 뒤를 돌아 집을 바라봤다.

‘집’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으나 알리샤가 알고 있는 여타의 집과는 달랐다. 주택가가 아닌 뭐랄까, 일종의 여관 같았다.

출입구는 하나, 그리고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유리 창문은 여러 개.

집이라고 한 걸 봐서는 일종의 대공가의 기사들을 위한 숙소인가……?

“일단 들어가 보긴 하겠는데.”

204호 열쇠라니.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런 친절을 받아본 건 난생처음이었던지라 괜히 어색했다.

수인에 대한 차별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아직도 바다에 가라앉은 모래처럼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

잠겨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휑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대공가에서 내준 기사들의 숙소인 게 맞는지, 홀과 더불어 곳곳에 기사들의 물품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사람이 그렇게 의심이 없어도 되나 싶었지만.

“나한텐 다행이지.”

알리샤가 작게 중얼거리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아까 뭐야? 누구야? 아는 사람?”

대공가로 향하면서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는 아벨에게 보리스가 짜증 난다는 얼굴을 했다.

보통 기사라면 사람이 좀 묵직하고 점잖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아벨은 그 편견, 선입견과 완전히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대공가 기사들 사이에서도 아벨이 화려한 촉새라는 이야기가 돌겠나. 그의 별명이 화려한 촉새라고 붙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저 얼룩덜룩한 머리카락 때문.

머리색 바꾸기가 취미이다 보니, 한 달 걸러 아벨의 색상이 매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날은 붉은색이었다가 또 한날은 푸른색이었다, 보라색이었다가, 검은색이었다가.

“수인인 것 같던데, 보리스 친척?”

“시가지에서 차별당하고 있는 거 데리고 온 거야.”

“너희들이 무슨 자선사업가라도 돼? 이 동네 수인들 다 데리고 오겠네.”

“그건 대공 각하 이야기 아니고?”

“아.”

북부의 떠돌이 수인들에게 음식과 더불어 제대로 된 훈련을 시켜 훌륭한 기사로 만든 게 발슈타인 대공과 대공부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공가 기사단의 인간과 수인 비율은 반반, 아니, 어쩔 때는 수인의 비율이 더 높을 때도 있었다.

무조건 실력 위주이다 보니 대공가에 수인 비율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 기사단장이 수인이기도 했으니까.

“여튼 너희들 간도 크다. 사람을, 어, 의심할 줄 알아야지. 나 같으면 그렇게 막 함부로 사람을 데리고 오고 집 열쇠까지 내주는 멍청한…….”

“아우, 시끄러워, 시끄러워. 이 촉새야. 입 좀 다물어.”

구구절절 떠들어대는 아벨에 제시가 손을 휙휙 저었다.

한 번 말을 시작하면 쉬지도 않고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바람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단장이 뭐 때문에 불렀느냐고 물어나 볼까 했는데 지금 이 꼬락서니를 보니 한 번 물어보면 끝없이 말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물을 수가 없었다.

단장님이 쓸데없는 일로 다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보리스가 음, 짧게 고민하는 시늉을 하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제국 내에서도 해가 가장 빠르게 지는 곳이 바로 북부였고, 이미 어두운 거리 내에서도 대공가만의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단장, 두 사람 데리고 왔어요!”

멀찍이서 보이는 기사단장인 챔프의 모습에 아벨이 두 손을 휙휙 저었다.

“세 사람 다 얼른 제자리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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