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그런 인사에 아도니스는 대답 대신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베트리체 가문에서 검술 실력은 아도니스에게, 그리고 사교적인 성격은 아돌프에게 죄다 몰아진 모양이었다.
자신과 검을 부딪쳤던 아돌프와 시선이 공중에 맞닿자 동생이 어색하게 웃었다.
“힘내십시오, 누님.”
“……그래.”
그리고 그 대화에서 비단 불편한 건 아도니스뿐만이 아니었다.
힘도 써보지 못하고 졌다는 사실에 집안에서 저만 시달렸던 게 아니라 아돌프 역시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승한 뒤로 폐하께 부탁할 소원은 정하셨습니까?”
“예.”
“뭡니까?”
“쉽게 말하면 그게 어디 소원이겠습니까.”
아비드의 물음에 아도니스가 비밀이라며 차갑게 말을 잘라냈다.
알아내지 못한 점 때문에 아쉬운지 아비드가 작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소원에 대한 건 들어보지 못했군. 소원이 있긴 한 건가?”
리안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실, 건국제의 검술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이라면 자신이 갖고 있는 소원은 거의 동네방네 떠들기 마련이었다.
작위를 원하는 자라면 작위를, 부를 원하는 자라면 부를 말하고는 했다.
그런데 아도니스는 그런 게 하나도 없으니 궁금했겠지.
사실 아도니스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베트리체 백작이 아도니스를 내켜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그녀는 백작가의 장녀였고, 근위대의 일원이었으며, 어느 정도의 부와 명예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예.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뭡니까?”
아도니스의 소원이 궁금한지 아비드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리고 그건 동생인 아돌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님이 이 검술대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호기심 가득한 동생의 눈빛에 그녀가 픽 웃으며 손으로 저보다 키가 조금 더 큰 아돌프의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비밀입니다.”
저가 가문에서 나간다면 아돌프도 어느 정도 중압감에서 벗어나겠지.
“그리고 리안 경에게 물어볼 게 있습니다만…….”
“무엇이지?”
“움직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도니스와 리안이 연무장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기사들의 검술 연습하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조용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아도니스가 살짝 긴장한 채 물었다.
“공녀님께서도 건국제 검술대회 때 보러 오십니까?”
“글쎄. 따로 하신 말은 없었는데.”
“아, 그렇습니까……?”
살짝 시무룩해지는 아도니스의 모습에 리안이 잔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경과 에이프릴이 그 정도로 친한 사이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제 소원에 대한 실마리를 공녀께서 제공하셨던지라.”
아도니스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집안을 버리라는 제안은 아도니스에게서는 굉장히 센세이션한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응원해 준 것도 에이프릴 공녀였으니까.
그런 제안을 해준 공녀이니만큼, 공녀 앞에서 괜찮은 성과를 내보이고, 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고맙다는 말도 사실이지만……
저가 빌 소원을 사람들이 듣는다면 그 누구도 축하도, 응원도 해주지 않을 테니까.
그런 걸 전부 각오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씩 걱정과 함께 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에이프릴이?”
“예. 그래서 만약 운 좋게 우승을 하게 된다면.”
아도니스가 허리를 똑바로 곧추세웠다.
“그 영광을 공녀님에게 드리고 싶어서요.”
“그 정도라고?”
“예.”
“두 사람의 사이가 그렇게 돈독할 줄은 몰랐군.”
“저도 공녀님과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아마, 공녀님께서 전과 조금 달라지셔서 그렇겠죠.”
비단 에이프릴 공녀만 달라진 건 아니지만.
“물론 제일 많이 달라진 건 바라크 경이겠지만요.”
요즘의 바라크는 오락가락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에이프릴에게 그렇게 냉랭하더니, 3년 전부터는 또 다정했다가, 요즘은 또 전보다 더 차갑게 굴고 있었다.
바라크가 돌아버리기라도 한 걸까. 스쳐 지나가듯이 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리안도……
이런 말을 하면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사 표시를 할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딱딱해진 얼굴로 서 있을 뿐. 리안도 마찬가지로 이상해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공작가의 자제들 모두가 정신이 나갔다는 말이 되었다.
“물론 바라크 경이 잘못한 거겠지만.”
“바라크의 잘못으로 확정되는 거냐.”
“빤하죠. 공녀께서 잘못하셨을 린 없을 테니까요.”
두 사람의 걸음이 잠깐 멈출 때, 황성 안으로 들어온 마차 두 대가 차례대로 멈춰 섰다.
똑같은 속도로 온 마차 두 대의 문에 장식된 문장은 백조였다.
라이즈 공작가를 상징하는 백조에 리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작가에서 마차를 두 대나 사용하며 올 일이 뭐가 있다고?
맨 처음 도착한 마차의 문이 쿵, 소리가 나며 열리더니 내린 이는 바라크였다.
바라크? 그리고 두 번째로 도착한 마차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는 구두를 신은 발이 나타났다.
드레스 차림에 구두를 신었으니 불편한 것은 당연하고, 보통은 사내가 에스코트함이 자연스러울 텐데도 바라크는 에스코트도 없었다.
드레스의 끝자락을 부드럽게 너풀거리고 나타난 주인공은 아니나 다를까 이리나였다.
“보세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을 본 아도니스가 말을 덧붙였다.
“두 사람이 마차까지 따로 타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까.”
“하아…….”
바라크 저 자식을 정말.
에스코트도 하지 않고 황성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려고 하는 바라크의 뒷모습을 보며 리안이 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바라크.”
리안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바라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에이프릴.”
이리나가 공작가로 돌아오면서 평소에도 서먹하던 형제 관계는 아예 예민의 극을 달하고 있었다.
마차를 따로 타고 가던 바라크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지 무던한 얼굴이던 이리나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느리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드레스의 양 끝자락을 붙잡고는 거의 뛰는 듯한 걸음으로 리안에게로 다가왔다.
좀체 보기 힘든 이리나의 미소에 리안의 가슴이 일순 철렁거렸다.
금세 다가온 이리나의 연분홍빛 입술이 움직였다.
“아도니스 경.”
자신은 왜 이 아이가, 왜 저를 향해 웃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철렁했던 가슴이 순식간에 싸늘히 식어 내렸다.
“대회에 결승전까지 가셨단 이야기 들었어요.”
이리나가 산뜻한 미소와 함께 아도니스의 손을 꼭 잡았다.
스스럼없는 스킨십에 아도니스가 일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크게 불편하거나 불쾌한 얼굴은 아니었다.
“축하드려요, 많이 힘드셨을 텐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살짝 발그레해진 걸 보아, 오히려 이리나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조금 기뻐 보이기도 했다.
제 부름에 다시 제 갈 길로 가려고 하는 바라크에게 오라는 의미로 고갯짓을 했다.
바라크가 표정을 구겼다가 터덜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황실에는 어쩐 일이냐.”
저를 투명인간 대하듯 아도니스만을 보고 있던 이리나가 리안의 물음에 그제야 청회색의 눈동자가 리안에게 콕 하고 닿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이리나의 모습은 정말로 에이프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리나와 에이프릴, 두 사람이 작정하고 사람을 속이려고 한다면 그 누구도 구분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나가 에이프릴을 완벽하게 따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에이프릴이 이리나를 따라 하고 있는 건지 이제는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 오라버니.”
정말로 에이프릴처럼 행동하고 있는 이리나의 태도는, 공작가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오라비를 대하는 친근한 모습에 리안의 목울대가 일순 일렁였다.
이리나가 이런 태도를 보일 때면, 시계를 되돌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으니까.
자신이 희망하는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러게요. 황실까진 어쩐 일이세요?”
“아, 페트라샤를 만나러 왔어요.”
궁정 디자이너를? 아도니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페트라샤가 라이즈 공녀를 찾은 이유는 빠르게 눈치챘지만, 보통은 궁정 디자이너가 공작가로 방문하는 편이지 그 반대가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도니스를 보며 이리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도니스를 제외한 세 사람은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리나가 직접 황실로 올 수밖에 없었던 원흉인 바라크는 정작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짐이 많으니까 오고 가는 게 힘들 것 같아서요. 온 김에 전하도 뵙고 가고 싶었고.”
“아하.”
라이즈 공녀가 황태자를 열렬히 연모하고 있는 거야 수도의 세 살배기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법이었다.
“건국제가 지나면 국혼이 기정사실화되겠네요.”
당연한 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