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두 사람의 약혼이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는 점도 그렇지만, 보통 페트라샤와 같은 황실 수석 디자이너는 황가의 일원들만 옷을 직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페트라샤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다면 아도니스처럼 ‘곧 국혼이 치러지겠군.’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도니스는 뭔가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이런 말을 한다면 기뻐하는 내색을 보일 줄 알았던 모두가 미묘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바라크가 말이다.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 무는 모습을 보아하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도니스 경이 페트라샤 님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시겠어요?”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라버니들.”
드레스 자락을 쥔 손을 살짝 올린 이리나가 방긋 웃고는 아도니스와 함께 걸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왜.”
이리나와 아도니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그제야 바라크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왜 자신이 불렀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신경질적이고 또 철딱서니 없는 모습에 리안이 한숨이 섞인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리안이 못마땅한 듯 짧게 혀를 찼다.
“집안의 사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이해한다마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제대로 행동하도록 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몰라서 물어?”
한심스럽다는 눈빛에 바라크가 일순 울컥했다. 본인이 알아차리라는 듯 빙글빙글 돌리는 말이 정말 불쾌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바로 말하면 될 것을.
“사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그냥 말해.”
리안의 청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황실 중앙문 근처에 있는 사람은 리안과 바라크뿐이었지만, 혹여나 다른 누군가가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리나가 에이프릴인 척하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거든, 똑바로 행동하란 말이다.”
“……뭐?”
“네 행동에 사람들이 이상하다 생각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나 보지?”
리안의 시선이 바라크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형인 리안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이 오늘 각자 타고 온 마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티를 내는데.”
그리고 사람들이 지난 3년간 에이프릴을 지나치게 아꼈던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리라는 것도.
이를 꽉 깨문 바라크가 리안을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눈치채겠지, 너로 인해서.”
“그래서 그 계집애한테 웃어주기라도 하란 말이야?”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싫으면 처신을 잘하란 말이야.”
“대체 형은……!”
바라크의 목소리가 일순 올라갔다. 지나가던 병정들의 눈길이 자신들 쪽으로 와 닿자 바라크가 꾹꾹, 눌러참으며 물었다.
“누구 편을 들고 싶은 거야?”
“…….”
“이리나 그 계집애? 아니면 에이프릴?”
“지금 당장 누구 편을 들어야 할 상황으로 보여? 네 편, 내 편 나눌 상황으로 보이냐고.”
“그래. 적어도 나는 그래.”
“…….”
“이도 저도 아닌 형의 태도 때문에 에이프릴이 더 이상 집에서 상처받지 않길 바라니까.”
이내 바라크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 처신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짓씹듯이 말하는 바라크의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형은 형 처신이나 똑바로 해.”
몸을 팩 돌리는 바라크의 뒷모습을 보며 힘이 들어갔던 리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바라크는 믿지 않겠지만 리안은 에이프릴도, 이리나도 똑같이 소중한 동생이었다.
“……하아.”
이 관계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리안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어머, 어머, 어머.”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가렸던 커튼을 걷어내자 절로 터져 나온 감탄사였다.
에이프릴 공녀는 이미 지친 듯한 얼굴이었지만, 페트라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손뼉까지 쳐가면서 감탄하는 모습이 본인이 만든 드레스에 감탄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거에 감탄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리나의 맞은편에 서 있던 페트라샤가 단박에 다가와서는 입고 있는 드레스를 확인하면서 몇 번이나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붉은색이나 검은색도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목도 가늘고 길어서 머리카락을 올려도 참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어댔지만, 에이프릴 공녀는 이제 제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지쳐서 축 늘어진 얼굴은 종종 봐왔던 모습인지라 그녀가 피시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동시에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공작가에서 지내다 보면 이 정도는 기본일 텐데.
지친 듯한 에이프릴 공녀를 뒤로한 채 페트라샤가 입고 있는 벨벳 원단의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에이프릴 공녀의 옷까지 만들어야 하냐며 구시렁거린 게 엊그제였는데, 새삼 공녀의 소화력이 좋아서 꽤 재미를 붙인 상태였다.
“다 끝났으면 이제 그만…… 벗어도 될까요?”
“아뇨, 아뇨. 조금 더 보고요. 음……. 국혼까지 생각한다면 흰 드레스는 조금 별로일 것 같고, 오히려 색감이 있는 게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기존에 만들어두었던 드레스를 휙, 휙, 넘기면서 페트라샤가 작게 중얼거렸다.
몸선이 가녀리고, 어른스러운 인상인 에이프릴 공녀에게 연분홍색은 어울리지 않으니 패스, 같은 의미로 연노란색의 드레스도 패스, 파스텔톤보다는 조금 채도가 낮은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잘 어울리는 색상이 무엇인지, 원단은 또 어떤 게 잘 어울리는지 싶어 걸려 있는 드레스 자락을 몇 벌이나 확인했다.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이 사슴처럼 고왔던지라 그 부분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드레스 한 번만 더 입어보시겠어요?”
보통, 황족들은 잘 입지 않는 머메이드 형식의 드레스였다.
“디자인이 거의 완성되어 간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도 볼 수 있어요?”
“아…….”
이리나 물음에 페트라샤의 갈색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데구룩, 왼쪽으로 한 번 데구룩 움직였다. 한창 즐거워하던 페트라샤의 기색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한 사실은 공녀가 몰라야 하고요.”
보여주고는 싶지만, 페르포네의 명령으로 만드는 옷이다 보니 먼저 보여줄 수도 없고.
“서프라이즈로 준비하고 있는 옷이니까 당일에 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완곡한 거절이었다.
조금 아쉬워하는 기색의 이리나를 뒤로한 채 페트라샤가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를 벗는 걸 도와주려고 그녀의 뒤에 설 때였다.
“어깨가 드러나고, 날갯죽지를 살짝 볼 수 있는 옷이면 좋겠습니다.”
영 이해 못 할 요구였다. 어깨가 드러나고 날갯죽지를 볼 수 있는 드레스라고……?
만드는 건 어렵지 않지만, 도대체 왜?
날갯죽지 부근에 뭔가가 있기라도 한 건가, 싶어 에이프릴 공녀가 옷을 몇 번 입고 벗고 하는 동안 슬쩍슬쩍 확인했지만 등에는 이상한 건 없었다.
흉터나 상처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 매끈하고 깨끗한 등이었다.
굳이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많이 여위었다는 것 정도? 마차 사고 때문에 그간 힘들었었나?
에이프릴 공녀의 불운한 마차 사고가 수도 전역을 맴돌았을 때, 그리고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에이프릴 공녀가 수도로 돌아오지 않은 점에 비추어 큰 부상을 겪었을 거다…… 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페트라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트라샤?”
“아, 죄송합니다. 금방 도와드릴게요.”
대단한 성력을 가진 신관에게 도움을 받았나? 에이프릴에게서는 잔흔 같은 거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작가의 공녀치고는 거칠한 손이 조금 신경 쓰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도대체 페르포네 전하는 뭐가 궁금했던 걸까? 페트라샤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단순히 노출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던 건가.
도대체 뭘까. 감도 잡지 못한 채 마지막 드레스를 에이프릴 공녀가 전부 입었을 때였다.
똑똑,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바깥의 다과를 가져왔던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 페트라샤 님.”
“왜?”
이리나의 옷 상태만을 보고 있던 페트라샤가 하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그,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날 보러? 오실 분 없는데.”
굳이 따지자면 페르포네 전하가 있긴 하지만 전하를 상대로 하녀가 ‘손님’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게, 페트라샤 님을 보러 오신 게 아니라.”
하녀의 말이 멈추고 페트라샤의 곁에 있는 이리나에게로 시선을 슬쩍 옮겼다.
“에이프릴 공녀님을 보러 오셨습니다.”
“날……?”
누구? 도대체 누구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있을지 모를 그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다시 한번 활짝 열리자, 페트라샤가 빠르게 이리나의 몸을 천으로 가렸다.
“에이프릴 공녀가 여기 있다고 해서 만나러 왔는데.”
손님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