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리고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너른 의상실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봤지만, 연베이지색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보이지 않자, 페르포네의 고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저, 전하.”
“……에이프릴 공녀는?”
라이즈 공녀를 찾는 한마디에 페트라샤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일순 울상이 된 페트라샤가 우물거렸다.
말하기 퍽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 페르포네와 레르비앙은 일순 에이프릴이 의상실에서 무슨 난동이라도 부린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에이프릴은 요즘 퍽 얌전한 편에 속했고, 황실에서 난동을 부릴 만큼 몰상식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난처해하고 있는 건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페르포네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에이프릴 공녀는 어디로 갔는지 물었습니다.”
“그게…….”
“공작저로 돌아간 겁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고개를 휙휙 저은 페트라샤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로지안 님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레르비앙은 페트라샤가 난처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페르포네의 손에 이끌리듯이 나오자 머릿속이 일순 개운해진 느낌이 들었다.
미향인지 뭔지 모를 것이 로지안의 응접실에서 가득 채웠는데 독하고 단 장미향과 더불어 마시는 차마저도 과일 차이다 보니 입안이 텁텁해졌다.
취향이 아닌 걸 몇 모금 마신다고 제법 노력하기도 했었다.
손목을 잡고 이끌던 페르포네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왜 로지안과 같이 있었던 겁니까?”
몸을 돌리고는 날 바라보는 페르포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늘 반짝거리던 금색 눈동자가 지금은 꼭 분노로 끓어오르는 듯했다.
이 며칠간 보았던 페르포네는 쉽사리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감정적 동요 없이 늘 차분한 인상을 주었는데 지금은 불안함에 일렁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자를 왜 경계하지 않느냐고.”
마차 안에 단둘만 남았을 때 내가 했던 그 말을 따라 한 페르포네가 나를 혼내고 있었다.
살짝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기는 많이 흘렀구나, 라는 걸 또다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매번 페르포네를 걱정하는 사람은 나였는데, 이제는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위험한 인물이라는 거 잘 알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따라간 겁니까?”
“……전하, 지금 저 걱정하신 건가요?”
“걱정을 안……!”
차분함이 매력적이던 페르포네의 목소리가 높아지다, 이곳이 황성의 복도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숨을 한 번 목 뒤로 꼴깍 삼키면서 말했다.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으세요. 로지안 님이 황성에서 저를 해코지하실 것도 아니고.”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한테는 그러지 못하시죠.”
로지안을 만나고 난 뒤 제게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인물들이 내 뒤로 주르륵 있었다.
로지안은 날 견제하고 싶은 거지, 날 위험하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 테니까.
방긋 웃으면서 내 손목을 잡고 있는 페르포네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됐습니다.”
“하…….”
페르포네가 마른 숨을 토해냈다. 내게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으니 자연스럽게 내 손을 놓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죠.”
하지만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는 페르포네에 내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훌쩍 커진 키와 더불어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다부진 몸에 절로 긴장이 됐다. 페르포네를 상대로 이렇게 긴장하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파혼을 요구받았을 때도, 맨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었는데.
그저 단순히 동생처럼 여기던 그에게 몇 번이나 긴장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기억했던 것보다 어른스러워진 모습이라서 그런가.
심장이 조금 빠르게 쿵, 쿵, 뛰는 걸 애써 내색하지 않으면서 페르포네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같이 있는 걸 보면, 소문이 돌 텐데요.”
“불화설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길 바란 건 공녀가 아니었습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때만 원했던 거기도 한데. 그리고 걱정이 되는 건 또 다른 부분이었다.
“전하께서 마음을 품은 분께 오해라도 사시면 어쩌려고요?”
그 한마디에 페르포네가 다시 걸음을 멈추자 몸이 일순 앞으로 휘청거렸다.
앞으로 살짝 넘어질 뻔한 몸을 페르포네가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으며 부축했다. 허리를 한 번에 감는 단단한 팔에 저도 모르게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전하?”
날 내려다보는 금빛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복잡함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답답함이 뒤섞인 눈동자에 슬그머니 허리를 감싼 팔을 끌어내리자 그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건 공녀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그냥 따라와요.”
걱정할 필요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페르포네의 연애사이니만큼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여태까지의 페르포네를 보면, 달리 가까이 지내는 귀족 아가씨들도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따로 무슨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이쯤되면 파혼을 하고 싶어서 한 거짓말 아니야?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보면서 내가 음, 짧은 신음을 흘릴 때였다.
“전하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면서까지 걱정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공녀가……!”
내가? 말을 하려다가 지금 서 있는 곳이 황실 복도의 중심이라는 걸 깨달은 그가 분홍빛 입술을 잘게 물었다.
말하지 못해서 답답한 듯, 짜증 나는 듯, 거칠게 고개를 팩 돌리는 페르포네가 할 뒷말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과거 내가 아는 에피처럼 굴고 있는데.”
날 향해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던 페르포네의 말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짜 에이프릴을 찾아내려고 한다던 그 말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지금 페르포네의 눈에는 내가 3년 동안 그의 곁에 있었던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아니라, 10년간 소꿉친구로 함께 지내왔던 나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입꼬리가 내 의지를 벗어나 삐죽삐죽 올라가려고 했다.
평정심, 평정심. 너무 웃지 말아야 해.
나와 오래 지냈던 이들이 에이프릴과 나를 구분할 수 있을 때마다 오븐 속에서 부푸는 빵처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이런 모습을 보이실 때면 꼭 제가 전하께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아주 기뻐요.”
그가 부정하고 싶은 듯이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무엄한 생각이겠지만 꼭 제가 전하의 첫사랑 같은 인물이었나, 싶기도 하고요.”
서로의 뜻이 맞은 파트너이니만큼, 이 정도의 가벼운 농담은 해도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던진 한마디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런가…….”
그런가요? 순순히 수긍하며 물러나려고 하는데, 보이는 게 있었다.
밟지 않은 새하얀 눈처럼 하얀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로지안과 만나고 난 직후에는 조금 흥분하기는 했지만, 금세 자기 페이스를 되찾은 줄 알았는데…….
평온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귓끝은 불에 데인 것처럼 빨간 상태였다.
“설마 진짠가요, 전하?”
놀라서 되묻자 눈동자가 일순 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진짠가 보네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한 그 순간이었다.
“아……! 후,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부정하려던 본인의 혀를 세게 씹는 그가 퍽 귀여웠다.
나이가 들 만큼 들었고, 페르포네가 많이 변하기도 했으니 그를 더 이상은 귀엽다― 라고 생각하는 날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 말이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가 한마디와 함께 입술을 꾹 다물다, 화제를 급하게 돌렸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로지안에게 가지 마십시오. 내가 이런 것까지 공녀에게 말해줘야 합니까?”
“무방비하게 간 건 아닙니다. 다만, 로지안 님이 저를 해코지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해코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럼? 내가 멀뚱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의 뒷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바짝 힘이 들어갔던 페르포네의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그자에게는 사람을 홀리는 뭔가가 있으니까요.”
순간 로지안의 방에서 가득 나던 단향을 떠올렸다.
머리나 속이 울렁거리게 만들었던 그 향에, 마셨던 과일 차가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인가요?”
“폐하께서 로지안을 만나고 난 뒤로부터 변하셨는데, 합리적인 추론이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러네요.”
현 황제가 대단히 뛰어간 군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전에는 좋은 황제였다.
황제의 자리가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되는 자리는 아니지만, 정말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페르포네의 말 그대로 로지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