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로지안을 만나고 나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던 걸 떠올렸다.
황후마마가 살아 계셨을 적에도 후비를 들이지 않던 폐하께서 사내 정부를 들였으니, 당시의 황실이 얼마나 경악했었는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귀족들도 기겁한 마당이었는데, 어렸던 페르포네는 얼마나 놀랐겠나.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위에서 조금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태양을 등진 채 날 내려다보고 있는 페르포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냥 순수한 느낌의 미청년이라 생각했는데 하얀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지자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니, 어른스럽다는 말도 웃기지.
나이로만 따진다면 페르포네가 지금 어른이 맞기는 맞았으니까.
말 안 듣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엄해진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흠칫한 그 찰나였다.
“그놈의 ‘님’ 자는 빼요.”
“……네?”
“폐하의 정부라고는 해도, 직위도 뭣도 없는 사내인데 내 약혼녀인 공녀가 말을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일종의 연장자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었다.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제야 그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큼!”
그리고 바로 뒤에서 들리는 헛기침에 몸을 퍼뜩 돌렸다.
페르포네와 함께 로지안의 궁으로 왔던 레르비앙이 조금 멋쩍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다정하신 모습은 참 보기 좋습니다만.”
방금까지의 대화를 레르비앙이 다 들었다는 생각에 결국 페르포네의 얼굴이 확 하고 붉어졌다.
레르비앙은 온화하지만 조금 곤란한 모습이었다.
“황실 복도이니만큼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 페르포네와 내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레르비앙의 말 덕분에 페르포네의 궁으로 대화 없이 조용히 돌아왔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이제는 신경 쓸 사람이 없었기에 긴장이 풀어진 건지 목을 조이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고는 근처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로지안이 공녀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정말로 국혼을 올릴 예정이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생각해 보면 내게 한 질문들은 좀 이상하긴 했다.
“국혼을 제가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건 아니냐 물어보시더군요.”
“그리고요?”
“전하와 함께 있으면서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하라고.”
“쯧.”
노골적인 혀 차는 소리가 너른 집무실에 울렸다.
자기 감정 같은 걸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 페르포네가 언짢음과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다시 한번 에이프릴이 되면서 내가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페르포네의 모습을 보게 되니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동시에 신선하다. 페르포네가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내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리고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런 얼굴이었다.
내 기억 속의 페르포네는 늘 다정한 미소를 그린 이였으니까.
“웃기는 질문만 해댔군요. 공녀가 그걸 본인에게 말해줄 리도 없는데.”
“그 부분이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되네요.”
그래, 질문이 이상하다 생각된 이유는 바로 이 점이었다.
페르포네와 로지안과의 관계를 알고 있고, 풋내기 귀족이 아닌 이상 로지안이 공작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를 리가 없다.
당사자라면 더더욱 잘 알고 있을 부분이고. 에이프릴이 미치지 않고서야 황태자와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로지안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꼭 제가 본인에게 시시콜콜 다 말할 것이라 확신하는 모습이었거든요.”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콤한 향 사이로 매혹적이게 웃는 로지안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서 선명했다.
마치 세이렌이 뱃사람을 홀리는 것처럼 짓던 표정과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목소리까지.
“혹시.”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 레르비앙이 눈을 데구룩 굴렸다.
일순 지끈거리는 머리에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왜 그럽니까, 공녀? 무슨 문제라도?”
자리에서 일어난 페르포네가 제법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내게 다가왔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 라기보단.
“제가 물어보면 물어본 대로 대답을 전부 해줄 것처럼 보였습니까?”
그렇게 멍청해 보였나?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레르비앙과 페르포네가 날 빤히 바라보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 불러서 곧이곧대로 물어보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제가 그렇게…….”
멍청해 보였다고요?
그건 그것 나름대로 굉장히 자존심 상할 일이었다.
대역이라지만 귀족가의 공녀로 지내기 위해서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없던 3년간 에이프릴이 내 평판을 어떤 식으로 망쳐놨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그럴 리가요, 공녀님.”
빠르게 부정하는 레르비앙과 레르비앙의 말에 긍정하는 페르포네에 살짝 안도했다.
그나마 그렇게 모자라게 보이는 인간은 아니어서 다행이네. 두 사람의 부정에 불쾌감이 살짝 가셨다.
“대답하지 않을 게 빤한데 물어본 게 영 이상하긴 하네요.”
“응접실에서 이상한 건 없었습니까?”
페르포네의 물음에 내가 흠, 하고 조용히 방금 전의 상황을 되짚었다.
의상을 갈아입고 있을 때 로지안이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그 뒤로 그의 응접실로 갔었다.
그 향을 좋아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응접실에서는 이미 살짝 달콤한 향이 났었고, 마셨던 차도 마찬가지로 달콤했다.
입에 맞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건 잘 못 느꼈어요. 다만, 로지안 님, 아니, 로지안의 취향만 알게 되었어요.”
“취향?”
“유달리 달콤한 걸 좋아한다? 그 정도? 그 외에 이상하다고 느껴진 건 딱히 없었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다음엔 부른다고 해서 순순히 가지는 말고요.”
어지간히 로지안과 같이 있었던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가 집무실의 창문을 조금 열고는 레르비앙을 향해 고갯짓했다.
“공녀가 입가심할 만한 걸 가져와요.”
“예, 전하.”
스르륵,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는 레르비앙의 뒷모습을 곁눈질했다.
로지안의 응접실에 있을 때는 약간의 두통과 함께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리고 간간이 페르포네에게서 나는 청량한 향이 머릿속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좀 괜찮은가요? 살짝 어지러워 보이던데.”
“네, 괜찮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르포네가 소파에 앉으라는 시늉을 보이자 드레스 자락을 스륵 잡아 자리에 앉았다.
“…….”
그러고는 침묵.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까 전처럼 살짝 오만한 자세의 페르포네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아까 전에 조금 놀렸다고 불쾌하기라도 했나?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떤 말을 꺼낼지 좀체 예상할 수 없었다.
로지안에 대한 이야기도 끝났으니, 이어갈 만한 마땅한 대화 주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좋으련만 그런 것도 없었고…….
내가 달리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어쩐지 압박 수사를 받고 있는 범죄자 된 것 같기도 했다.
“전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편히 해주세요.”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 내가 먼저 말하자, 일순 미소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러고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있었던 듯, 몸을 내게 가까이 해왔다.
“편하게 물어보면 무엇이든지 대답해 줄 건가요?”
“예. 전하께서 물어보시는 거라면 당연히 말씀드려야죠.”
“…….”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방금 전은 살짝 스치듯 지나간, 실금 같은 미소라고 착각할 만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양 입술 끝이 매끄럽게 올라간 상태였다.
누가 봐도 페르포네가 웃고 있었다.
본인이 원한 답을 얻은 사람처럼.
도대체 뭘 물어보려고 저러는 거지 싶을 때, 그의 입술이 열렸다.
“데미안 경과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그리고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내게로 향했다.
알고 있는 무엇이든, 이라고 말했지만 저절로 말문이 막히게 하는 말이었다.
그때 저택에 함께 있던 상황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눈만 데구룩 굴리면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자, 페르포네가 다시 물었다.
“그걸 말해주기 힘들다면, 데미안과 사이가 틀어진 진짜 이유에 대해 말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갑자기 그걸 궁금해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데미안 경은 저랑 같은 이유 때문에 공녀와 멀어진 거라고 하더군요.”
“…….”
“근데 전처럼 다시 지내는 거라면, 그 이유가 해결됐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날 바라보던 금빛 눈동자가 조금 어두운 빛을 띠었다.
유심히 관찰하고, 내면 그 깊숙한 곳까지 찾아보려는 눈빛에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 이유가 해결됐다는 건…….”
말을 길게 늘이던 페르포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 심장을 바짝바짝 죄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중에 그에게 내 정체를 밝힐 것이긴 하지만,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