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처음 보는 어두운 눈동자가, 긁는 듯한 저 낮은 목소리가, 정말로 날 그리워하는 저 모습 때문에?
미소 한 줌 없던 얼굴에 두둥실 미소가 떠올랐다.
“어서 빨리 건국제 날이 오면 좋겠네요.”
“……어째서요?”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지만, 페르포네는 상관이 없다는 눈치였다.
말을 돌리는 그에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그가 여유만만한 얼굴로 웃기만 할 뿐, 달리 답은 해주지 않았다.
나도 답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보니 대답해 달라 닦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파티의 첫 댄스는 누구와 하실 겁니까?”
“공작님과 할 생각입니다.”
바라크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랑 추지 않을 인물이고, 리안은 그 기회로 변명 같은 말을 할까 봐 사전에 차단하고 싶기도 했다.
그가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원하는 대답이 이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떤 대답을 원한 거지? 짧은 침묵 동안 그가 원할 만한 대답을 머릿속에 빙빙 돌렸다.
그리고 바로 답을 내렸다. ‘첫’ 왈츠곡의 상대를 물어보고 있다는 걸.
“첫 왈츠곡은 당연히 전하와 함께 출 겁니다.”
보통 첫 왈츠곡은 배우자, 약혼자, 연인과 함께 추는 곡이니까.
“그래야죠.”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그가 눈을 살풋 접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이네요. 혹시 데미안 경이랑 추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약혼자가 있는데 어떻게 데미안 경과 첫 춤을 추겠습니까. 사람들한테 가십거리만 던져주는 셈이죠.”
“데미안 경과 가십거리를 먼저 만든 공녀께서 그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니까.
그런 짓을 벌인 건 죄다 에이프릴인데 뒷수습을 하고 뒷말을 듣는 건 내가 되는구나.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전하께서 조금 걱정하신 모양이네요. 혹시 제가 데미안 경과 왈츠라도 출까 싶어서요.”
“…….”
“더는 가십거리 같은 일을 만들 생각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페르포네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지자, 내가 퍽 스스럼없이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그러니 그런 질투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질투가 아니라고 바로 반발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말과 행동은 없었다.
그저 내 친밀한 행동을 제지하지 않은 채,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끌어내렸을 뿐입니다.
“공녀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면, 내가 기대하게 됩니다.”
늘 봄같이 다정하고, 따뜻한 음성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지금 듣는 그의 목소리는 쓸쓸한 가을처럼 느껴졌다.
불어보는 살짝 차가운 바람에, 페르포네의 금빛 머리카락이 바다의 수면이 일렁이는 것처럼 부드럽게 너울거렸다.
날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기대하게 만들지 마세요.”
질척이는 눈동자에 내가 볼 안쪽을 꾹 삼켰다.
꽉 잡힌 손목을 그가 부드럽게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세요.”
“…….”
“로지안과는 더 얽히지도 마시고요.”
페르포네의 말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한 뒤 집무실을 벗어났다.
집무실 바깥에 있는 레르비앙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가십니까?”
묘하게 조금 더 있다가 가라는 말이었는데, 그건 페르포네가 내켜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공녀님, 정말 괜찮은 거 맞으세요?”
억지로 괜찮은 듯이 웃으려고 하자 레르비앙이 영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얼굴이 굉장히 붉습니다.”
차가운 손등을 볼에 대었다.
“괜, 괜찮아요. 이만 가볼게요.”
괜찮지 않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으니까.
페르포네가 저런 얼굴을 할 때면, 익숙한 소년이 아닌 낯선 사내로, 청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페르포네에게 잡혔던 손목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 * *
“부모님과 집사에게 말을 해둔 상태이니 편하게 지내면 된다.”
통신구 속에서 보이는 올리브색 눈동자에는 긴장과 경계가 한껏 드러나 있었다.
일부러 모두를 물린 채 말하고 있는데도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통신구 속의 알리샤의 모습에 데미안이 짤막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프릴, 아니, 이리나에게는 내가 말해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리나를 알고 있어요?]
에이프릴이라 부르지 않고, 이리나라고 부르는 자신의 말에 알리샤의 경계가 살짝 누그러졌다.
자신이 이리나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리나가 먼저 도움을 청했으니까.”
[아…….]
“어째서 도망친 것인지에 대해선 자네가 직접 말해주면 될 거야.”
[그, 그럼 이리나를 만날 수 있어요?]
“물론.”
애초에 만나게 하려고 대공가에서 보호하겠다고 했으니까.
제 억지스러운 부탁에 거절하지 않았던 부모님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신 점에 미안함이 일순 들었지만, 섣불리 저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리나와는 언제쯤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근시일 내로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무래도 공녀로 지내다 보니 지금 당장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휴.]
놀란 가슴을 쓸어내는 모습으로 알리샤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운이 좋았지. 대공가의 기사들 중 알리샤와 마주친 이가 생길 거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나.
“이리나에게는 오늘 말을 전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감사, 합니다. 공자님.]
“오랜 친구의 부탁이니까.”
[그리고 이리나에게 혹시 대신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뭘? 하고 물어보는 눈짓에 알리샤가 바짝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근처에 있는 물을 들이켰다.
[……신전이, 이제 이리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요.]
“…….”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지금은 공작가에 있어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래. 이리나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꼭 지킬 테니.”
[고맙습니다, 도련님.]
알리샤의 안도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통신구가 뚝 끊기면서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듯 흔들리던 올리브색 눈동자가 마음을 영 불편하게 만들었다.
신전이 이제 이리나의 존재를 알았다라. 아마 아카데미 시절 짧게 보았던 성력으로 보이던 그 능력 때문에 그런 거겠지.
신전이 정말로 깨끗하고 믿을 만한 곳이었다면, 이리나가 오히려 공작가보다 신전에서 지내는 게 더 나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신전은 어떤 곳인가. 로지안의 말에 휘둘리기나 하는 곳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런 곳이라는 걸 알기에 이 알리샤라는 수인도 신전의 손아귀에서 도망 나온 것이겠지.
알리샤에게 1순위의 목표는 신전에 이리나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렌시아.”
집무실에 있던 데미안이 문을 활짝 열고는 앞을 지키고 있던 렌시아를 불렀다.
“예.”
“지금 라이즈 공작가로 갈 테니, 준비해.”
“예.”
우선 알리샤를 찾았다는 말과 함께 안도하는 이리나의 얼굴이 가장 보고 싶었다.
“10년 전쯤에 공작가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았다며 데리고 온 건 진짜가 아니라 나였어.”
“너도 알겠지만, 내가 워낙 에이프릴 아가씨랑 똑같이 생겼다 보니.”
공작가의 치졸함에 혀를 내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리나에게서 멋대로 부모를 앗아가더니, 평생을 대역으로서 살게 만든 것 아닌가.
만약 이리나를 딸로 대하고 싶은 거였다면, 그녀를 정식 절차에 따라 입양하는 것이 맞았다.
“……단물만 먹고 버리는 꼴이라니.”
수도의 귀족들다운 행패였다.
버릴 땐 언제고, 다시 필요해서 데리고 오는 꼬락서니도 우스웠고.
데미안은 어서 빨리 이리나가 묶여 있는 계약 기간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리나를 보호해 줄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작가가 친딸을 버리면서까지 이리나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페르포네가 이리나를 도와주겠지만…….
글쎄. 신전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는 로지안이 황실에 있는데,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클뿐더러, 자유로운 성향인 이리나에게 황성은 너무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이리나만 원한다면 북부, 대공가 근처에 그녀가 지낼 안식처를 만들어줄 요량이었다.
부모님께도 사정과 상황을 설명하다 보면 이리나를 안타깝게 여기시겠지.
알리샤와 위험해질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보다 북부가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도련님, 공작저에 도착했습니다.”
렌시아의 말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 보이는 백조 문양이 있는 호수를 올려다봤다.
연락도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온 손님에 공작가의 사용인들 모두가 당혹스럽다는 듯이 데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연락도 없이 온 이가 데미안 디니아 발슈타인이기에 더 당황한 눈치였다.
빠르게 나온 익숙한 낯의 집사장이 데미안에게 짧게 인사했다.
“라이즈 공작가의 집사, 패트릭입니다. 대공가의 도련님께서 연락도 없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는지요.”
“에이프릴 공녀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가씨를요?”
이렇게 서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만큼 두 사람이 친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