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사용인들도 수도를 떠돌던 두 사람의 가십거리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공녀님께서 지금 외출하신 상황이라, 다음에 약속을 잡으시고 방문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외출이요?”
“예.”
오늘은 만나지 못하니 이만 돌아가라는 완곡한 표현이라는 걸 이 자리에서 모르는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데미안이 대공 부부의 친자식은 아닐지언정, 후계로서 교육은 완벽하게 받았을 터이니 당연히 돌아갈 것이라 예상하여 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공작가에 방문했는데 빈손으로 오기에는 뭣해 들고 온 디저트를 패트릭에게 내밀었다.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 든 패트릭이 디저트와 데미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수도 내에서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은 가게의 디저트였는데, 그 이유는 크게 달지 않고 담백한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콤한 걸 좋아하는 에이프릴이 썩 좋아할 만한 디저트는 아니라는 것.
“영애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죠.”
“언제 돌아오실지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게 영 불편하거든, 공녀께 사람을 보내는 게 어떤가요.”
에이프릴이 먼저 오면 먼저 왔지, 자신이 먼저 가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었다.
그리고 예의에 제법 어긋나는 행동이기도 했다.
난처한 얼굴의 패트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을 때였다.
“무슨 소란이지.”
한때 전장을 호령했던 힘 있는 목소리가 공작가 홀 안에서 들려왔다.
“공작님.”
“무슨 소란이기에 사용인들이 다 밖에 있지?”
“발슈타인 경께서 아가씨를 뵈러 오셨습니다.”
“에이프릴은 공작저에 없을 텐데?”
“오실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셔서.”
그림자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알렉시스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조금 야윈 알렉시스의 청록빛 눈동자가 데미안에게 일순 닿았다.
공작이 나서서 다음에 오라―고 한다면 그로서도 싫다 할 말이 없었다.
오늘은 글렀군. 저녁에 서신이라도 보내야겠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 알렉시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이 오기 전까지 응대는 내가 하도록 하지.”
“예? 고, 공작님.”
“안으로 모시도록.”
예상외로 쉽게 떨어진 허가였다.
공작저로 방문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가문의 가주가 응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응접실의 분위기는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응대하는 사람이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응접실의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었다.
이리나와 함께 있던 응접실에서의 시간은 봄꽃이 가득 피어난 곳 같았는데, 알렉시스가 있는 응접실은 차분한,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느낌이 나는 듯했다.
에이프릴이 오기 전까지 응대를 공작이 하겠다고 하였으나, 사실 지금 상황은 응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응대보다는 관찰 쪽에 더 가까웠다.
응접실에 온 뒤로 알렉시스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사물을 관찰하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으니까.
“발슈타인 가의 영식이 여기까지 발걸음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에이프릴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공녀라는 말도 생략한 채, 정말 친구이기 때문에 찾아왔다는 말에 알렉시스의 눈이 일순 가름하게 떠졌다.
“사이가 다시 좋아졌나 보군. 들리는 소문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었는데.”
데미안은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소문 당시의 에이프릴과 지금 이 공작저에 있는 에이프릴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공작의 말은 마치 같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끔 만드는 말이었다.
자신이 이리나의 존재를 눈치챘으니 망정이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알렉시스의 행동은 타인을 향한 기만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리나가 이런 식으로, 공작저에서 계속 이용당했을 거라 생각하면 화가 나기도 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알렉시스에 데미안이 눈을 접었다.
그 미소에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던 알렉시스의 손이 짧게 움찔했다.
좀체 웃지 않고 딱딱한 성정이라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대공과 성격이 판박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데미안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는 게 놀라웠기 때문이다.
“에이프릴이 바뀌었으니 저도 바뀌어야죠.”
사람을 바꿔치기 했다면 찰나라도 당혹감을 드러낼 뻔한데도 알렉시스 공작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전쟁터와 정계를 휘몰고 다녔던 인물이니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능숙한 건지, 아니면 들켜도 상관없어 무표정한 것인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친구였었다지?”
“예.”
데미안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긍정했다.
아카데미 시절은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 추억들 중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의 긍정에 알렉시스의 시선이 스르르 아래로 향했다.
긴 속눈썹이 아래로 향하자, 데미안은 강인해 보이던 알렉시스 공작이 처음으로 약하게 보였다.
공작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가늠이 잡히지 않을 때, 공작이 빙긋 웃었다.
“그 아이와 계속 사이좋게 지내주면 좋겠군.”
“…….”
“그 애의 편이 되어주게.”
그리고 데미안은 이 두 마디로 이상함을 눈치채야만 했다.
계속 사이좋게 지내달라는 말이, 그리고 편이 되어달라는 말에서 의미하는 ‘그 아이’의 주체가 에이프릴이 아닌 이리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데미안이 되었다.
……방금의 자신의 말로 알렉시스 공작이 눈치챈 걸까?
눈치를 챈 거라면 이게 이리나를 위해 하는 말인 걸까.
“발슈타인 영식?”
데미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알렉시스에 그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예.”
그리고 데미안은 알렉시스가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끝까지 이리나의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그는 아카데미 시절 이리나에게 목숨을 한 번 빚진 적도 있었으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잿빛 같던 얼굴 위로 처음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정하고 다감한 제 아버지가 종종 제게 보여주던 미소와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그 아이의 모습을 발슈타인 가의 영식께서는 많이 알고 있겠지.”
“…….”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카데미 시절 함께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오히려 가족이었던 공작가보다 함께 있을 때가 더 많았을 테니까.
알렉시스 힐 라이즈의 시선이 제게 향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어깨 너머,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아주 먼 과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과거를 그리워하는 눈빛이었다. 밝은 청색의 눈동자가 침잠되자, 이리나 같은 청회색의 눈동자와 일순 겹쳐 보였다.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떼어내며 데미안이 말했다.
“공작님께서 부탁하지 않으셔도 그 아이와는 끝까지 친구로 남을 생각입니다.”
이리나를 찾기 위해 소비했던 시간이 몇 년이었다.
데미안은 새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또 끝까지 모를 거라며 이리나를 다시 데리고 온 공작가가 우스웠다.
에이프릴과 이리나가 바꿔치기한 뒤로 알게 된 이가 벌써 둘이나 있지 않나.
페르포네는 바꿔치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면서도 눈치채지 않았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공작가의 자만이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아이의 편이 되어줄 것이고요.”
안도한 듯 보이는 미소에 불쾌감이 꿈틀거리면서 올라오던 찰나였다.
바깥에서 똑똑, 들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집사인 패트릭의 등장에 두 쌍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그에게 쏠렸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에이프릴이 왔음을 알렸다.
* * *
“이상해.”
아직까지도 잔잔하게 뛰는 심장을 꾹 잡으면서 짧게 중얼거렸다.
간혹가다 한 번씩 페르포네를 볼 때면 심장이 북소리처럼 크게 들릴 때가 있었다.
꼭 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 혹은 달리기를 한 뒤에 뛰는 심장 같기도 했다.
마차가 공작저 앞에서 멈추고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보이는 건 앰버의 얼굴이었다.
“오셨어요, 아가씨?”
“응.”
마차에서 내린 그 순간이었다.
“아가씨,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누구?”
“발슈타인 가의 영식께서 오셨습니다.”
데미안이 왔구나!
그리고 데미안이 왔다는 건 알리샤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 소식이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간에 말이다.
“응접실에 있나?”
“네. 한데 그게, 공작님께서 응대하겠다 하셔서 같이 계십니다.”
“뭐?”
알렉시스 공작이 상대하고 있다고?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두 사람이 나눌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접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오로지 나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미간에 주름이 살짝 생기자, 앰버가 말을 덧붙였다.
“어떻게 할까요?”
“방에 갔다가 응접실로 바로 갈 테니까, 집사에게 내가 왔다고 전해.”
“예, 아가씨. 그리고 아가씨 앞으로 편지 하나가 왔습니다.”
“편지?”
“예. 책상 위에 올려뒀습니다.”
앰버는 편지 발신인에 대해서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