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마도 발신인이 ‘에이프릴 힐 라이즈’에게 보낸 게 아니라, ‘이리나 데빈’에게 보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에이프릴에게 편지 같은 걸 보낼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알겠어.”
그러고는 나선형 계단을 밟아 방으로 올라갔다.
편지가 왔다고? 누구한테서……?
에이프릴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도 많지 않지만, 내게 편지를 보낼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알리샤 정도인데……. 알리샤의 소식이라면 데미안이 들고 왔을 것이고.
문을 활짝 열자 방 안에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라벤더꽃의 향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공작저로 돌아온 지 시간이 제법 흘렀건만 방 안의 풍경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에이프릴이 공작저로 곧 돌아오면 그때는 이 방이 과연 어떻게 될까.
비릿한 웃음을 눌러 삼키며 책상 위에 있는 편지를 확인했다.
발신인은 타타.
풀네임이 아닌 애칭으로 보이는 이름이었지만 이 한 단어로도 보낸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타미타르테. 대신전의 신관.
그리고 편지 봉투 안에는 약병 같은 게 잡혔다.
알렉시스 공작이 꾸준히 섭취하는 약에 대한 답변이겠군.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어도 응접실에 데미안과 공작이 같이 있다는 점 때문에 편지 봉투를 서랍 안에 대충 집어넣었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침대 위로 대충 던지고는 거의 뛰다시피 하는 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정원이 훤히 보이는 1층의 응접실로 향하자, 막 안에서 나온 패트릭과 눈이 마주쳤다.
“데미안은?”
“안에 계십니다.”
노크도 없이 문을 활짝 열자 보이는 두 사람에 내가 자세를 똑바로 취했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에 대해선 데미안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만, 내가 궁금한 건 공작의 의중이었다.
발슈타인 가의 영식이 대단치 않다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작이 직접 나와 응대하기는 애매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의 친구를 상대한다― 라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공작이 굳이 나서서 그렇게 행동할 것 같지는 않았다.
“데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냐, 공작님께서 상대해 주셔서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고.”
“그래?”
두 사람의 분위기는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바쁘셨을 텐데.”
“그리 바쁜 것도 아니었고, 네 친구가 왔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니.”
다정한 미소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가 온화하기 짝이 없다.
비단 연기력이 는 건 나만이 아니라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이 아무것도 몰랐다면 사이좋은 부녀로 받아들였겠지만, 내가 에이프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데미안도 이런 촌극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난 나가 볼 테니 편히들 이야기 나누렴.”
“예, 아버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이 적응되지 않았다.
알렉시스 공작이 어서 빨리 응접실을 나가기만을 바랄 때였다.
“아, 그리고 에이프릴.”
쉽사리 나가지 않는 그에 내가 나오려는 한숨을 목 뒤로 꿀꺽 삼키고는 미소와 함께 뒷말을 기다렸다.
“발슈타인 영식과 이야기가 끝난다면, 집무실로 오거라.”
“…….”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 빙긋 웃는 그가 조용한 걸음걸이로 응접실을 나갔다.
앰버가 준비한 다과를 들고 들어오면서 공작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테이블 위로 내가 마실 차와 디저트를 올려두었다.
“시키실 일 있으시면 편히 부르세요, 아가씨.”
“그래.”
내게 할 말이라.
짐작되는 건 사흘 전의 밤, 그가 내게 들켰던 그 모습 때문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타미타르테가 보냈던 편지를 먼저 읽고 내려올걸.
짧게 혀를 차고는 의자를 드르륵, 끌어내고 풀썩 앉았다.
귀족가의 아가씨가 보이기에는 꽤 허물없는 행동이었다.
차도 몇 모금 마시고 난 뒤에야 내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숨을 토했다.
페르포네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불편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정체를 밝혀서 그런가 데미안과 있을 때는 누구보다 편했다.
연기할 필요도, 꾸밀 필요도 없기 때문이겠지.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좋을까.”
그녀가 가식적인 미소 대신에 정말 즐거운 듯 빙긋 웃었다.
“네가 방문한 이유부터 묻는 게 좋을까, 아님 공작님이랑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부터 묻는 게 좋을까.”
“내가 온 이유부터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추천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
“네가 기뻐할 만한 이야기거든.”
기뻐할 만한 이야기라는 말에 벌써부터 입술 끝이 말아 올라갔다.
“기뻐서 웃는 것도 보고 싶고.”
덩달아 날 보며 웃는 데미안에 내가 그쪽으로 몸을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알리샤에 대한 이야기구나. 그렇지?”
내 물음에 정답이라는 듯 그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다행이다. 신전 때문에 알리샤가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며칠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나.
“찾았어.”
살짝 조마조마하다 확신 어린 말이 나오자 함박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혼자서 찾기란 힘든 일이었는데 역시 데미안에게 부탁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데미안.”
발슈타인 대공가의 힘이었다.
아마 나 혼자서 찾아내려고 했으면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어떻게 찾은 거야?”
“운이 좋았지.”
데미안이 꽤나 산뜻하게 웃었다.
“대공가 소속 기사 중 한 명이 우연히 그녀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아.”
“지금은 대공가에서 지내고 있고.”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가느다란 숨을 토해냈다.
데미안이 알리샤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좋은 소식이 바로 나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몰려오는 안도감에 등을 그제야 편하게 기댈 수 있었다.
대공가라면 신전에서도 쉽사리 건들지 못하겠지.
발슈타인 대공이 쉽게 다가가기 힘든 사람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내는 현 황제의 여동생이니만큼 신전도 몸을 사릴 상대들이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어.”
다정다감한 데미안의 목소리에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멈추었다.
페르포네가 오늘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행이네요. 혹시 데미안 경이랑 추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비꼼이었는지, 걱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페르포네가 신경 쓸 만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신전이 네 존재를 알았다고 전해달라 했어.”
웃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리안에게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 한 문장에서 날 향한 걱정이 물씬 느껴졌다.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물었다.
“다른 다친 곳은 없었지?”
“다친 곳도, 아픈 곳도 없다고 전해달라더라.”
“…….”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원하는 대답을 들었으니 되었다.
알리샤가 다치지 않았고, 대공가의 저택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렇다면 됐어.”
“당연히 보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당연히 보고 싶지.”
그런데 왜 만나지 않느냐는 눈짓이었다.
찻잔에 손 한 번 대지 않은 데미안과 달리 나는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찻잔에 손을 대고 있었다.
아까 전 페르포네와 함께 있었던 순간을 떠올리자 긴장 때문인지 다시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내가 계속해서 대공가로 방문하는 것도 안 좋을 것 같아서.”
“안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데미안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왜 자신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
그리고 이건 데미안이 나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나오는 모습이기도 했다.
“소문이 이상하게 날지도 모르잖아.”
그러잖아도 에이프릴 때문에 데미안이 나를 좋아하네 마네,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마당인데.
페르포네와 친근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와중에 가십에 휩싸였던 데미안과 함께 있다면 좋은 이야기는 못 들을 것이다.
나야 1년 뒤에 공작가를 미련 없이 떠날 것이기에 상관없다지만 페르포네는 아니니까.
로지안이나 병상에 계신 폐하 때문에라도 신경 쓸 게 많은 페르포네에게 이상한 소문까지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난 그런 소문 신경 안 써.”
시원스레 대답하는 데미안에 응접실이 잠깐 정적이 맴돌았다.
그래, 데미안이 사람들의 소문을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에이프릴을 좋아한다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았어도, 주위 귀족들을 신경 쓰지 않았던 게 그였으니까.
호쾌하다고까지 생각되는 반응에 내가 짤막한 웃음을 흘렸다.
“나는 신경 써.”
바른 자세로 나를 응시하고 있던 데미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린 순간이었다.
크게 뜨인 눈과 짧게 당혹감이 스치다가, 미묘하게 살짝 찡그려졌다.
시선을 피한 그가 잠깐 눈을 내리깔고는 한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렸다.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이상하고 특이했나? 그러진 않을 텐데.
“이 1년간은 전하의 약혼자잖아.”
“……그렇지.”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도 데미안은 한순간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1년 후에는 관둘 예정이라고 했지?”
“그렇지.”
“그래, 그럼 됐다.”
데미안의 얼굴 위로 작게나마 굳어 있던 근육들이 서서히 이완되는 게 눈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