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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91)화 (91/109)

91화

도대체 어디서 마음이 편안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1년 후에 황실을 떠난다는 사실이? 아니면 공작저를 떠난다는 사실이?

“공작님과는 무슨 이야기를 했어?”

알리샤의 소식을 들었으니 이제 알렉시스 공작에 대해 물을 차례였다.

“별말씀은 안 하셨어.”

별말도 안 할 건데 데미안이랑 이야기를 나눴다는 게 더 이상했다.

내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데미안을 보자 그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너랑 오랜 친구냐고 물어보셨고, 앞으로도 잘 지내라고 말씀하신 것뿐이야.”

정말 여타의, 보통의 부모와 다를 바 없이 한 말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네 편이…….”

말을 마저 잇던 그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공작과의 대화에서 이상함을 느낀 얼굴이었다.

그래, 알렉시스 공작이 아무런 의중 없이 데미안과 단둘만 있을 리가 없었다.

“끝까지 네 편이 되어달라고 하셨어.”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는 데미안이 말을 마저 잇기를 기다렸다.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공작님께서.”

시간이 아주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산 정상이 아닌데도 데미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윙윙 울리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아.”

눈을 스르륵 내리깐 데미안 찻잔의 손잡이를 만졌다.

“끝까지 편이 되어달라는 그 상대가, 에이프릴 힐 라이즈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어떤 말이 나올지 쉽게 상상이 갔다. 그랬기에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나와 공작가의 관계가 주워 담을 수 없는 물이라고 분명히 말하였음에도 어떻게든 주워 담아보려고 노력하는 공작의 행태 따윈 알고 싶지 않았다.

“이리나 데빈.”

살짝 거칠한 데미안의 입에서 내 풀네임이 나왔다.

“네 편이 되어달라는 말처럼 들렸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 * *

데미안에게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걸까. 에이프릴을 위해서?

공작이 적어도 날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부질없는 짓이야.”

데미안의 말을 듣고 난 뒤로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알렉시스 공작의 이야기를 대화 주제로 이어가는 게 불편해 주제를 바꾸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다.

공작이 데미안에게 그렇게 말한 건, 내게 보이지 않았어야 할 모습을 보여서 그런가?

그게 본인의 약점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내가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해서?

별별 생각이 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시원하게 떨어지는 답은 없었다.

“답도 안 나오는 거 붙잡고 있어봤자지.”

데미안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나중에라도 알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데미안을 만나러 가기 전 서랍 안에 구겨 넣었던 편지 봉투를 꺼내었다.

타타라는 발신인을 보고, 봉해져 있는 앞부분을 찢어 편지를 펼쳤다.

편지 봉투 안에 있는, 내가 타미타르테에게 건네었던 알약과 작은 물약병이 튀어나왔다.

책상 위에 올려둔 채 타미타르테가 보낸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편지는 ‘얼마 전 부탁하신 약물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어 편지를 씁니다.’로 서문이 시작되었다.

쓸데없는 인사말을 생략한 채 바로 본론이 들어가는 게 퍽 타미타르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맡기셨던 약 중 알약은 진통제입니다.

반쯤은 예상하긴 했지만, 예상이 들어맞자 오히려 당혹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진통제 하나만으로도 알렉시스 공작의 몸 상태가 나쁘다는 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다른 하나는?

―그리고 다른 물약은…….

펜촉으로 찍은 점의 잉크가 크게 번져 있었다. 타미타르테가 내 앞에 직접 있는 것도 아니지만, 번진 잉크로 그가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야기의 본론은 진통제가 아닌 이 물약인 모양이었다.

―다른 물약은,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는 알아냈지만 무엇 때문에 이 약을 먹고 있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편지는 쭉 길게 이어졌다.

―물약의 소재가 된 것은 제법 많지만 그중 약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마그나, 피히꽃의 가루, 자류의 즙입니다.

―보내주신 약은 대개 안면 마비나 신경이 굳는 병에 함께 쓰이는 약입니다.

“치료제라는 소리인가?”

―그렇다고 치료제라는 말은 아닙니다.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편지 다음 자락에 한마디가 나왔다.

―몸에 마비가 일어났을 때, 마비를 이완시키는 약입니다. 몸의 어딘가가 마비되고 있는 상태인데, 병에 대한 치료제가 있지 않을 때 보통 이 두 약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손발이 마비되거나 폐가 굳는 병은 치료제가 나와 있는데…….

알렉시스는 몸의 어느 곳이 굳고 있는 걸까? 손과 발은 마비 증상 같은 걸 보인 적이 없었다.

겉으로 볼 때는 문제가 있는 곳은 없었고, 그리고 만약 겉으로 문제가 있는 곳이라면 아직까지 공작과 패트릭이 병명에 대해서 숨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수도의 모두가 알고도 남았겠지.

그렇다면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몸 안의 어딘가가 굳는다는 거고.”

―이 약을 쓴다는 건 불치병이라는 말이고요.

불치병.

알렉시스 힐 라이즈가 불치병에 걸렸을 거라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 기억 속의 그는 흔들림 없이 강인한, 제국의 유일한 공작가의 가주였으니까.

약간의 당혹감이 머릿속을 강하게 때렸다.

알렉시스를 향한 당혹감이 아니라 나에 대한 당혹감이다.

그래도 10년이란 세월을 지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 안타까움과 슬픔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니까.

알렉시스 공작은 본인이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알고서 날 데리러 왔다는 건.

“하.”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죽을 때가 다 돼서 나를 부른 거냐고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진담이 될 줄이야.

정말 본인이 죽을 때가 되어서 나를 불렀던 모양이다.

에이프릴이 아파서 별장에 있는 1년 동안 날 공작저에서 지내게 만든 이유가 이런 거겠지.

남아 있는 죄책감을 이 1년 동안 털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혹시 몰라 덧붙이자면, 해당 약이 필요한, 치료제가 없는 병명도 알고 싶을 것 같아 덧붙입니다.

“아글리티니.”

휘갈겨 쓴 편지의 글자를 조용히 입에 담았다.

“심장이 돌처럼 굳는 병…….”

마지막 문장과 함께 덧붙인 말은 보는 눈이 많으니 한동안 신전에 발걸음하는 건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단단히 당부하는 추신을 확인하고는 타미타르테가 보내준 편지를 촛불로 빠르게 태웠다.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린 편지 조각들을 바라보다 한숨을 뒤로 삼켰다.

죽기 직전에 내가 생각나기라도 한 건가? 왜 죽을 사람이 내가 생각난 걸까.

그렇게 버렸다는 것에 대한 게 미안해서? 용서받고 싶어서?

정말 내게 미안했다면 날 끝까지 찾지 않았어야 했다.

내가 본인을 온전히 미워할 수 있도록.

“귀족다운 건지, 이기적인 건지.”

날 생각해서 불렀다기보단 본인을 위해 날 불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에이프릴이.”

에이프릴을 단 한 번도 안타깝게 여긴 적 없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에이프릴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피가 이어진 진짜 가족, 가족, 하더니 어쩜 이렇게 볼품없는 관계인지.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네.”

짧은 비웃음이 입가에 머물렀다.

알렉시스 힐 라이즈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한때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가지는 정에 기인한 말이 아니다.

죄책감을 해소하며 편안하게 눈을 감으며 죽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죄책감에 시달리기를 바란다.

태워서 재가 되어버린 조각이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너풀 떠다녔다.

허공을 떠돌다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까만 재를 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열린 창문을 부드럽게 닫았다.

“무슨 일이야?”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데미안이 가고 난 뒤로 이야기 좀 나눴으면 한다고 했는데, 내가 찾아가지 않으니 패트릭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날, 공작이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던 날 이후로 날 대하는 패트릭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살짝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기도 했으면서, 전보다 나를 경계하기도 했다.

알렉시스 공작이 내가 약을 건네줬다고 말을 했지만, 패트릭은 믿지 않는 거겠지.

에이프릴이 계단에서 자신을 밀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공작가의 가솔들 중 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속으로는 내 말을 믿는 이들이 있기도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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