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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92)화 (92/109)

92화

하지만 난처하다는 얼굴로 전부 나를 외면한 인간들뿐이었다.

오래 지냈다고 한들 나는 가짜였고, 공작저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에이프릴은 진짜 딸이었으니까.

“아가씨.”

공작가의 집무실로 향하는 긴 길을 걸어가면서 조용히 나를 부르는 패트릭을 흘긋 쳐다봤다.

못 본 사이 나이가 많이 든 모습이기는 했지만, 며칠 전의 일이 있은 뒤로 그의 안색이 몇 년은 더 늙은 사람처럼 변한 상태였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시겠지만, 그날 집무실에서 본 일은 못 본 척해주십시오.”

“공작님의 건강이 관련된 일이라?”

“…….”

“공작님의 건강에는 아무 문제 없다고 말을 한 건 자네이지 않나.”

패트릭의 목울대가 짧게 움직였다.

“그렇게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게 거짓말이란 걸 알지 않느냐.

날 향하는 늙은이의 탁한 눈동자에 원망 어린 기색이 살짝 섞여 있었다.

모든 걸 다 봤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느냐는 눈빛.

“가주의 건강에 대해 아는 이는 가문의 후계와 집사장뿐이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걸음을 멈춘 내가 딱 잘라 대답했다.

살짝 메아리처럼 울리던 목소리가 푹신한 카펫에 부드럽게 흡수되었다.

“나는 집사장도, 가문의 후계도 아니니.”

“…….”

“그날 본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고.”

“…….”

“내 행동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 날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집사장, 자네의 얼굴은 마치…….”

오렌지빛의 노을이 창 안으로 들어와 나와 패트릭을 품어주었다.

해가 완전히 진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우리 두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가 어두웠기 때문이겠지.

“내가 공작님의 간병이라도 했으면 하는 얼굴이군.”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패트릭이 내게 바라는 게 간병은 아닐 것이다.

공작이 오래 살지 못하니만큼 내 태도가 좀 온정적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내 예민함과 날카로움이 조금 누그러지길 바라는 것이고, 3년 전 공작저에 있었을 때처럼 굴기 바라는 걸 거다.

“공작님을 보살피는 건 집사장인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가씨에게 바라는 일은 그게 아니라…….”

“집사.”

말을 마저 이으려고 하던 그의 말을 가위처럼 싹둑 잘라냈다.

“자네는 내게 바라는 게 제법 많군.”

멈칫한 그에 내가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가. 움찔거리는 주름진 손가락을 보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날 진짜 공작가의 공녀처럼 대해주겠다고 말한들 난 1년만 이곳에 있는 대역일 뿐이야.”

“…….”

“나는 그 이상 바라지 않고, 집사장도 내게 그 이상 바라지 않으면 좋겠네.”

그 말을 뒤로한 채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걸어갔다.

이번 일로 알게 된 것이 제법 많았다. 공작가의 몸 상태도, 에이프릴과 그 외 사람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알렉시스 공작이 리안을 아직 후계로 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바라크를 후계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라크는 명문 라이즈 공작가를 이끌어 나가기엔 부족한 점이 제법 많았다.

리안이 가문을 이어받겠지만, 아마 그 몸 상태에 대해 아는 것은 죽기 직전일 것이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는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데미안은 갔나?”

“예.”

달리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선 물어보지는 않았다.

꾹 닫힌 집무실의 문을 한 번 확인하고 나자, 그가 집무실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시늉에 내가 소파에 풀썩 앉자, 그 역시 마찬가지로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 네가 집무실에서 보았던 일은…….”

“어느 날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말을 잘랐다.

“저는 공작님의 집무실로 들어온 기억이 없는데요.”

“…….”

말해도 못 들었고, 보아도 못 본 척할 테니 쓸데없는 말 따위는 하지 말란 의미였다.

서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데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공작이 바라는 건 내가 본 걸 입 다물고 있어달라는 거지, 시시콜콜한 대화가 아니다.

하아. 파르르 떨리는 한숨 소리가 맞은편에서 조용히 퍼졌다.

불치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가, 그의 모습에는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약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병이 시작됐던 걸까.

“네게 함구령을 내리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다.”

“…….”

“네가 나한테 그날 보였던 능력에 대해서 궁금해서 부른 것이다.”

“…….”

“네가 내게 어떤 힘을 쓰지 않았느냐.”

그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에 내 손에서 퍼져 나갔던 성력을 본 모양이다.

그가 정말 아글리티니를 앓고 있다면, 그때 사용했던 성력이 완치까지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 데 도움은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통제의 역할도 했을 것이고.

“네가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몰랐는데.”

“마력 같은 능력이 제게 없다는 건 누구보다 공작님께서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공작가에서 10년을 지냈지만, 내게는 리안 같은 검에 대한 능력도, 바라크처럼 연금술이나 마법에 관한 능력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더 쉽게 버려졌겠지.

청회색의 시선이 빤히 날 향하고 있었다.

공작이 내 능력에 대해서 아무 짐작도 못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나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고등교육을 받아온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아마 보통의 평범한 제국민들보다 내가 가진 능력을 빠르게 눈치챘겠지.

“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성력이냐?”

무겁게 툭 떨어지는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줄 필요도, 말하고 싶지도 않은 주제였다.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

“물어보신다고 하여 제가 순순히 대답할 의무도 없고요.”

“내가 널 처음 데리고 왔을 때 말하였지. 네가 공작가에 있는 이상 이 1년간 너를 내 딸로 대우할 것이라고.”

“그러셨죠.”

“그렇다면 이 1년간 내가 네 아비로, 너를 지키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공작님께선 진정 제 아버지도 아니실뿐더러, 평생도 아닌 고작 1년을 지켜주기 위해 알고 싶으신 겁니까?”

하, 내 입에서 헛웃음이 짧게 흘러나왔다.

“저를 지켜주고 싶어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공작님의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 물어보시는 것은 아니고요?”

“이리나.”

“제가 정말로 성력을 갖고 있었다면 3년 전에 진즉 말씀드렸을 겁니다.”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상대의 얼굴을 보는 건 꽤나 재미있었다.

말로 상처 주는 건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구나. 그냥 되는대로 떠들면 되었으니까.

“공작가에서 절 버리기 전에요.”

“…….”

“그리고 제가 성력이 있다고 한들 공작님과 무슨 상관인가요? 공작님께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시잖아요.”

그날 밤 보았던 일을 아예 없었던 일 취급하겠다는 내 행동에 공작이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널 정말 걱정해서 물어보는 거다, 이리나.”

그가 중죄를 지은 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성력이 있다고 한다면, 신전에서 널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

“로지안 스타리유가 신전을 쥐고 있는 이상, 네가 신전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으니까.”

“수도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을 텐데요.”

이 대화가 문득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신기하네요. 제가 성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으면, 공작님께서 가장 먼저 그 부탁을 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양손에 얼굴을 묻었던 그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에이프릴 아가씨의 다리부터 낫게 해달라고요.”

“…….”

“부모라면 응당 그런 부탁부터 하실 줄 알았는데요.”

리안이나 바라크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그들은 필히 폭풍 같은 감정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렉시스는 큰 감정적인 동요는 내보이지 않았다.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가 마치 폭풍우가 곧 칠 것 같은 바다처럼 보이긴 했으나, 바라크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가 염치가 있다면, 네게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해.”

“보통 부모들은, 그래도 염치불구하고 자식에 대해 부탁하긴 하더군요.”

하하. 짤막한 웃음소리가 가볍게 흘러나왔다.

“이런 말씀 하시려고 부르신 거라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몸에 대해서 함구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진 성력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라면 나는 답변할 것이 없었다.

소파에서 어설프게 일어날 때, 알렉시스 공작이 다시금 내게 물었다.

“병명이 무엇인지 궁금해할 줄 알았다.”

“…….”

“내가 병에 걸린 것에 쾌재를 부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고.”

그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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