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3년 전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벌 받았다고 생각할 법하지 않느냐.”
“끝까지 모르는 척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공작이 일어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타깝게도 아프신 걸 보고 쾌재를 부르지도, 3년 전 일에 대해서 벌을 받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발목을 붙잡은 말에 내가 조금 난색을 표하며 대답했다.
“건강하신 편이 좋았을 텐데란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길 바랐으니까.
내게 가족의 정이 남은 걸까란 기대는 가지지 않길 바라지만,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집사장에게 솔직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더군요.”
“약을 주지 않았던 것 말이냐?”
“예.”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흉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하겠느냐.”
이제 와서 꺼내는 저 부모라는 말이 우습다.
내가 1년간 에이프릴의 대역을 하는 건 일종의 놀이였다.
알렉시스 공작의 마음을 편히 해줄 놀이.
“그날 드리지 못했던 약입니다.”
속으로 한 번 혀를 차고는 품 안에 있던 약 꾸러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돌려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어차피 약을 먹지 않을 그에게 산뜻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드실 수 있다면 드시도록 하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며칠 전 온 비 때문에 젖은 흙냄새와 독한 약이 섞인 냄새가 어둡고 폐쇄적인 지하에 맴돌았다.
로지안이 수도 외곽에서 구입한 작은 산에 위치한 별채는 신전의 고아원이 폐쇄된 뒤로 생긴 곳이었다.
한때는 신전의 고아원이 실험실로 이용되었지만, 타미타르테가 로지안의 곁에 남음으로써 고아원은 정말 고아원의 업무를 충실히 실행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사택부지로 온 로지안에 안쪽에서 나온 베탄이 공손하게 그를 향해 인사했다.
로지안이 이곳 실험실에서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자신의 노화를 막는 것.
타미타르테가 성력으로 제 몸 상태를 관리해 준다고는 하나, 다니엘처럼 성력으로 자신을 완벽하게 케어해 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곧 있을 행사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예. 다만 실험 때문에 몇몇을 좀 새로 들여와야 할 것 같습니다.”
“치트리아 남작에게 말해두지.”
그리고 실험실에 부족한 인원을 채우는 건 자신에게 굽신대고 있는 치트리 남작이었다.
사택의 지하는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감옥 같은 곳이었다.
죄수들을 넣어둔 것처럼 칸칸마다 있는 이들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한때, 로지안 역시 저 안에 있던 적이 있었다.
“공녀님의 옷은 황태자 전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날개뼈 쪽이 드러나는 디자인을 말씀하셨어요.”
날개뼈가 드러나는 드레스라.
로지안이 팔짱을 낀 채 살짝 언짢은 얼굴을 했다. 어깨 부근에 뭔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기라도 했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봤자 이제는 연해진 상처뿐일 텐데.
“이상한 일이네.”
“뭐가 그렇게 이상하십니까?”
로지안의 중얼거림을 들은 베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의아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페르포네가 갑자기 황실 수석 디자이너에게 에이프릴의 드레스를 맡긴 것도, 그리고 이틀 전 만났던 에이프릴의 상태도 말이다.
독하게 나는 약 냄새에 로지안이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로 입가와 코를 가렸다.
이곳에 오면 신전 고아원에서 지내던 순간이 떠오르고는 했다.
아마 타미타르테가 이 꼴을 보면 저를 죽이려고 들 것이다.
신전에서 관리하던 고아원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거라고 생각 못 했을 테니까.
타미타르테가 남는 조건으로 인체 실험은 두 번 다시 행하지 않겠다고 약조했지만, 로지안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타미타르테가 갖고 있는 성력은 다니엘이 가졌던 것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화를 타미타르테가 막고 있기는 했지만…….
타미타르테가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다니엘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면 전처럼 약으로 제 노화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완전한 약이 필요했다.
“자네가 만들어준 미향 말이야.”
“아, 예.”
“그게 통하지 않을 수도 있나?”
에이프릴에게 미향이 먹히지 않았던 게 아직까지도 찝찝했다.
에이프릴이 간 뒤, 궁정 디자이너에게 미향을 사용했을 땐 저가 알고 있는 효능 그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나사가 풀린 것처럼 물어보는 것마다 시시콜콜 다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로지안 님처럼 완전히 내성이 생긴 사람이 아닌 이상 통하지 않긴 어렵죠.”
“잘 자란 귀족가 아가씨가 이런 미향을 쓸 일이 있나?”
“있겠습니까. 이런 미향 찾는 귀족들은 하나같이.”
베탄이 사제복을 입고 있으면서 성행위를 의미하는 저질스러운 손짓을 했다.
인상이 절로 찡그려질 법한 불쾌한 제스처였지만, 로지안은 익숙한지 찡그림 없이 베탄을 응시했다.
“색정에 미친 인간들뿐인데요.”
“…….”
“그리고 본인이 쓴다기보다는 장난감들한테 쓰는 것이고요.”
“그렇지.”
자신이 황제에게 썼고, 신전의 신관들이 제게 썼던 것처럼 말이다.
로지안이 영 의아하다는 듯 혀를 끌, 찼다. 에이프릴이 색정에 미친 인간도 아닐 것이고…….
“그 외에는 없나?”
“굳이 예외가 있다면…… 맡아도 바로 해독할 정도의 성력을 갖고 있는 자일 겁니다.”
“……성력?”
“예.”
베탄의 말에 로지안의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에게 성력이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에이프릴에게 성력이라니.
“누가 성력을 갖고 있기라도 합니까?”
“에이프릴 힐 라이즈.”
“예?”
예기치 못한 말이 떨어지자 베탄이 펄쩍 뛰었다.
“공녀한테 성력이 있다고요? 와, 그건 또 놀라운 일이네요.”
공작가의 귀한 공녀께서 성력이 있다면 여기저기 떠들어댈 법한 일이었다.
성력을 얼마나 갖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타미타르테 정도의 성력만 갖고 있다고 해도 어쩌면 ‘성녀’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자식에게 성력이 있는 걸 알면서도 여태까지 꽁꽁 숨겨왔던 공작가에 베탄이 혀를 내둘렀다.
하긴, 지금은 로지안이 신전을 잡고 뒤흔들고 있으니 라이즈 공작가에서는 조금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물며 에이프릴은 황태자의 약혼녀이기도 하니까.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확실하진 않고.”
“그렇다면 확실한지 확인해 보시면 되잖습니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그 물음에 베탄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력을 갖고 있으면 생긴 상처가 금방 치료되거든요.”
“…….”
“남들보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빠릅니다. 흉도 남지 않고. 종이에 살짝 베이거나 과일을 깎다가 베이는 정도는 그 자리에서 바로 치료될 테니까요.”
베탄이 신전에서 가둬서 키웠던 다니엘 데빈을 떠올렸다.
다니엘 데빈이 있었을 때는 못 하는 실험이 없었는데. 베탄이 그때가 그립기라도 한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무리 큰 상처가 생겨도 흉도 남지 않는 게 성력을 가진 이들이니까요.”
베탄의 말에 로지안이 멈칫했다.
“……허어?”
페트라샤가 미향에 취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페르포네가 그렇게 시켰다고 했으니, 그러면 페르포네 역시……
“알고 있었군.”
에이프릴에게 성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었군.
재밌게 돌아가는 상황에 로지안이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 만들어줬던 미향보다 좀 더 강한 걸로 만들 수는 있나?”
로지안의 물음에 베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사람에게 사용하는 건 어렵습니다.”
“왜?”
“그 약보다 세면 정말 몇 날 며칠은 제정신 유지하기 힘들 테니까요.”
“상관없으니 만들어놓도록 해.”
하라면 해야지.
로지안의 명령에 베탄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로지안이 황제의 애첩이 되고 난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신전에 있던 몇몇 신관을 없앤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사제복을 벗는 몇 명부터 시작해서,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신관들이 몇이었다.
로지안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 신관들이 없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 납작 엎드린 이들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지.”
“사…….”
로지안이 걸음을 옮길 때, 순간 발에 채이는 게 있었다.
비쩍 마른, 작은 여자아이의 몸에 로지안이 발로 툭, 찼다.
오르락내리락 움직이지 않는 가슴을 보니 일순 죽은 건가?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애는 뭐냐?”
“아, 곧 버릴 애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지저분한 얼굴일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먹지 못해서 핼쑥해진 두 볼, 앙상한 손아귀, 그리고 몸에서 폴폴 나는 독한 약 냄새까지.
한 번도 불쾌감을 얼굴로 드러낸 적 없던 로지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곧 있음 죽을 애여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