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힘없이 늘어져 있는 팔뚝에 보이는 주사 자국에 로지안이 쯧, 혀를 찼다.
베탄의 말이 틀린 게 아닌지 계집애는 정말로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꼬락서니를 보니, 실험체로 쓸모를 다하고 곧 시신으로 밖에 나가게 될 이였다.
“몸이 영 쓰레기가 되는 바람에…….”
“별수 없지.”
다니엘이 죽고 없으니까.
제 발목을 잡고 있는 손을 차내고는 지그시 밟자, 일순 깔려 있는 여자애가 움찔한 것 같았다.
“다니엘의 자식을 찾는 대로 이곳으로 데리고 올 테니까 한 번 실험해 봐.”
자식이라는 이가 다니엘만큼의 성력을 갖고 있어야 할 텐데.
* * *
크게 튀지 않는 수수한 드레스 차림에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뒤 거울 앞에 섰다.
오늘 밤, 치러지는 검술대회 결승전을 시작으로 건국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들뜬 분위기를 이어가기라도 하듯 불꽃 소리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가 볼까.”
지금 나가서 꽃다발을 사야지, 늦지 않게 도착할 것이다.
베트리체 백작 부부가 꽃다발 같은 걸 준비할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마지막으로 살짝 도톰한 외투를 들고 일어선 찰나였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발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려왔다. 바로 들어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앰버는 아닌 것 같고.
알렉시스 공작이라면 내 방으로 오는 대신 직접 불렀을 인물이었다.
바라크라면 자기 멋대로 쳐들어왔을 인물이었고.
그나마 이 집 안에서 상식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단 한 사람뿐이겠네.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니?”
바로 리안 힐 라이즈.
짧게 고민하다 닫혀 있던 문을 열자, 정복 차림의 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편히 생활하는 옷차림이 아닌 외출할 것처럼 서 있자, 그가 잠깐 당혹감을 드러내었다.
“왜 그러십니까?”
“축제 구경 가려고?”
건국제 구경이야 공작가에서 지내던 10년간 자주 봐왔다.
질릴 만큼 봐왔으니 별 관심 있지는 않았다.
“아, 그럼 아도니스 경이 나오는 결승전을 보러 가는 거구나.”
“…….”
“요즘 두 사람 같이 지냈으니까. 게다가 아도니스 경이 네가 대회를 보러 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아도니스라는 이름에 절로 몸이 멈춰졌다.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동행하고 싶어 아도니스 경의 이야기를 꺼내나 싶어 눈을 갸름하게 뜨고 그를 쳐다보자, 그가 당황했는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 주면 좋겠다고 직접 내게 말했었다.”
눈치 빠르긴. 말해주고 싶지 않아도 알아서 정답을 도출해 내는 리안 힐 라이즈를 보며 작게 구시렁거렸다.
보통 이런 말이 나오면 뒤에 덧붙여져서 나오는 말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가지 않겠니?’
“그…… 검술대회에 가는 거라면 같이 가는 건 어떠냐……?”
이것 봐라.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그에 내가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이런 제안을 하는 게 답지 않게 정말 긴장이 됐던 건지 손까지 말아쥐고 있었다.
쥔 주먹을 보면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움직일 생각이어서요. 동행했으면 한다면, 바라크 오라버니께 부탁해 보세요.”
바라크가 같이 움직여 줄 리는 만무하지만.
“아, 바라크는…….”
바라크에게 쉽게 건국제 구경을 하러 가자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난처함을 표하는 그에 내가 빙긋 웃고는 리안의 곁을 지나치려고 할 때였다.
“안 그래도 검술대회 때문에 외출하는 것이니 굳이 동행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나도, 검술대회를 보러 갈 예정인데.”
“예?”
“네가 나랑 따로 간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하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
에이프릴은 공작가의 보물이었고, 별장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 돌아왔기에 과보호 받으며 동행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조건 싫다고만 말하기에는, 리안이 정론만 말하고 있는 데다가 공작가에 있는 1년 동안에는 대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니까.
“에이프릴로 행동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내가 망설이고 있는 기색을 눈치챘는지 리안이 빠르게 덧붙였다.
하……. 고개를 푹 숙인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대답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었지만 리안의 귀에는 그런 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환해지는 낯을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팩 돌렸다.
리안의 시선이 내 품에 있는 화려한 꽃다발에 짧게 닿았다.
아도니스의 우승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준비한 꽃이다 보니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풍성했다.
축제를 위해 공작가에서 준비한 마차처럼 말이다.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던 마차를 억지로 타며 수도 중심부로 나갔다.
아무리 제국 유일의 공작가라고 하지만, 지금 탄 마차는 너무 과한 게 아닌가.
공작가를 상징하는 백조 문양은 보석이 세심하게 붙어 있고, 은은하게 붙어 있는 보석 가루까지.
마차 한 대에 도대체 돈을 얼마나 퍼부은 건지 모르겠다.
공작가에서 지내던 시간 동안에는 이런 건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생계를 꾸려 나가다 보니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생겼다.
게다가 리안은 자기가 신청한 에스코트에 내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널 위해 최상으로 준비했다’라는 듯한 그 뿌듯한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아도니스 경이 받으면 기뻐하겠구나.”
“예, 그랬으면 좋겠네요.”
검술대회가 열리는 경기장, 팔레스트라로 가는 마차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리안은 대화를 이어가려고 말을 붙였지만, 내가 말을 짧게 하고 끝내니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리안이 나와 같이 검술대회를 가고 싶어 하는 데는 어느 정도 본인이 상상하던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하등 쓸데없는 바람이지만, 이번 기회로 사이가 조금 괜찮아지는 것, 이런 것 말이다.
마차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길거리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다, 입술 끝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바라크 오라버니를 요즘 못 뵌 지 꽤 됐네요. 아직도 별장에 있는 건가요?”
“한동안은 별장에 가지 않고 저택에서만 생활할 거다. 지금도 저택에 있고.”
“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공녀가 별장에서 돌아왔는데, 계속 별장으로 들락날락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수군거리기 시작할 테니까.
지금쯤 한창 자기 방에만 처박혀서 질질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라크 오라버니도 같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이리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하자, 그가 조금 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알렉시스 공작과 똑같은 청색의 눈동자가 단호했다. 말을 가려서 하라는 의미에 내가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바라크 힐 라이즈는 늘 예민하고 성질이 더럽지만 평소보다 배로 더 예민한 날이 있었다.
그게 바로 건국제 기간이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공작가 전체가 축제 기간과 달리 축 가라앉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는 공작가의 모든 사용인들이 눈치껏 그리고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조심히 행동해야 했다.
바라크가 건국제에 에이프릴을 잃어버렸으니까.
저택에 있다 하니 걱정하는 척하면서 그 잘난 낯짝이 보고 싶었다.
지금쯤이면 둘 중에 하나겠지. 희멀겋게 질린 얼굴로 누워 있거나 죄책감 때문에 울고 있거나.
“네가 바라크에 좋은 감정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언행은 가려서 하거라.”
“제가 바라크 오라버니 앞에서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무릎 위에 있는 꽃다발의 꽃잎을 만지작거리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바라크 오라버니는 언제 제 앞에서 언행을 가리셨나요?”
“…….”
“대역으로 있을 때도, 에이프릴 아가씨를 찾은 뒤에도 말이에요.”
불과 찌꺼기라고 불렸던 게 3년 전 일이다. 바라크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상처가 많으니 이해해 달라고 말했던 공작가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새삼 카나의 말이 떠올랐다. 바라크가 그렇게 행동하는데, 나만 참을 이유가 없다는 말을 말이다.
“지금 어떤 얼굴로 계실지 궁금하네요.”
“좋은 얼굴은 아닐 거다.”
“듣던 중 기분 좋은 이야기고요.”
빙긋 웃는 내 모습에 리안이 숨을 작게 내쉬었다.
나랑 동행하는 건 이런 날 선 분위기도 감당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리안은 적응이 되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에이프릴을 찾았다고 할지언정, 에이프릴을 잃어버렸던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공작가에서 금기어였다.
그랬기에 리안도 이 대화 주제가 불편했던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데미안이 저택으로 왔다고 하던데.”
잠깐 말을 멈춘 그가 덧붙이며 물었다.
“요즘 페르포네 전하와도 가까이 지낸다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냐?”
“무슨 생각이라고 할 게 있나요.”
“…….”
“그리고 다시 전처럼 친하게 지내면 전 공작가의 여러분들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배시시, 무해한 웃음을 보이자 그가 찜찜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