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아도니스 경을 보고 용기를 내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더 생겨날 거예요.”
리안 힐 라이즈는 나와 다른 생각이겠지만.
하긴, 그가 어디 다른 사람에게 부정당하고, 반대당하기만 하는 삶을 알고나 있겠나.
내 말에 아도니스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공녀.”
“…….”
“그리고 단장님,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취소가 된다 한들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가 알게 된 마당에 수습이 되겠어요?”
“맞아요.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도니스 경이 본인 가문의 제 1세대가 되는 거잖아요.”
그것만큼 멋진 게 어디 있겠나.
“경의 가문의 첫 역사가 되는 거고.”
조금 굳어 있던 아도니스 경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녀의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기를 바라며 한 말이었다. 실제로 굳었던 분위기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고.
이제부터 괜찮겠지 싶을 때였다.
“아도니스!”
뒤에서 벼락같이 떨어진 베트리체 백작의 노성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백작……!”
알은체를 하기 무섭게 대기실에서 찢어지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뺨을 맞은 소리는 짝! 보다는 퍽!에 가까운 소리였다.
“베트리체 백작님!”
다시금 높이 올라가려는 손을 막은 건 누구도 아닌 리안 힐 라이즈였다.
갑작스럽게 맞은 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아도니스의 앞을 막아섰다.
“아도니스 네가 진정 미친 게 분명하구나!”
올라가는 언성에 바깥에서 사람들이 힐긋힐긋 안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 베트리체 백작의 성미를 봤을 때 지금 당장 뒤집으러 오면 왔지, 아도니스 경이 백작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인물은 아니었다.
맞았던 뺨이 얼얼하게, 그리고 붉게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고개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간 탓에 지금 아도니스 경이 어떤 얼굴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동시에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도니스 경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그리고 어떤 감정일지도.
백작에 대한 실망감일까, 자포자기일까. 눈가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그녀가 두 손으로 쓸어넘겼다.
아까 전만 해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던 녹색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실망감도, 자포자기도 아닌 흔들림 없이 단단한 눈이다.
“아버지.”
“아버지? 네가 날 아버지라 생각하긴 하느냐! 날 진정 아버지라 생각했으면 오늘 같은 이런 일을 멋대로 만들지도 않았을 거다!”
미간에 절로 주름이 지는 말이었다.
“베트리체 백작님, 화가 나신 건 알겠지만 일단 진정하십시오.”
“비키시오, 공자!”
다혈질의 성미를 갖고 있는 백작에게 나나 리안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공작가의 자제들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기는 어려울 텐데.
“부모 말 좀 들으면서 살면 안 되겠느냐! 시키는 대로 살면, 너도 나도, 모두가 문제없을 텐데!”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내가 입을 열었다.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걸 원하셨다면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합니다.”
“공녀.”
“하물며 아끼는 반려동물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인간이라고 안 그러겠습니까.”
“공녀, 남의 가정사에 신경 끄십시오.”
“남의 가정사라고 신경 끄기에는 백작께서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본 게 이번이 벌써 두 번째여서요.”
처음이 아니라는 말에 리안이 아도니스와 베트리체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백작이 아도니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긴 했지만, 손찌검이 지금이 처음이 아니란 사실에 놀란 듯했다.
“짐승도 자기 자식은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공녀!”
백작에게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결국 그가 험악하게 말했다.
어디 나도 한번 칠 테면 쳐보라는 요량으로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만하세요, 아버지.”
침묵만 유지하고 있던 아도니스가 조용히 말했다.
살짝 낮고 허스키한 음성에 자리에 있던 모두의 행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멈추었다.
걱정 어린 내 눈짓에 아도니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신호를 보냈다.
눈빛은 흔들림 없이 태산의 바위처럼 단단했지만, 아도니스의 목소리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오늘 제가 말한 소원이 아버지와 저의 마지막 합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아버지는 아돌프를 가주로 내세우고 싶고, 그렇게 하기엔 제가 걸림돌이라고 생각되시잖아요. 그러니 제가 포기한 겁니다.”
“…….”
“애초에 가주 자리는 관심도 없었고요.”
아도니스의 관심과 신경의 끝은 온통 검이었지 집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검을 잡는 걸 포기 못 하겠어서 나름의 합의점을 도출한 겁니다.”
“너……!”
따박따박 대꾸하는 아도니스에 백작이 손을 뻗는 그 순간이었다.
멱이라도 잡으려는 손에, 아도니스가 아버지의 손목을 차갑게 내치며 말했다.
“제가 아버지께 맞는 건 방금 전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제가 성을 하사받고 싶다 말한 순간부터 이제 우리는 남이고요.”
“건방진 자식! 네가, 가문과 성을 버리면 남는 게 뭐가 있느냐!”
남는 게 왜 없어.
그녀에게 많은 것이 남아 있고, 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아도니스에게는 동료도 여전히 남아 있고, 직위와 검술 실력도 그대로다.
발끈한 내가 끼어들려고 하자 그녀가 괜찮다는 듯 나서지 말라는 의미로 날 제지했다.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겠죠.”
담담한 목소리의 아도니스가 처음으로 입술 끝을 올렸다.
“하지만 제 검은 제 곁에 끝까지 남을 겁니다.”
검만 남는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얼굴에 베트리체 백작이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는 몸을 팩 돌렸다.
“망할 것!”
나가면서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상황에서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대기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아도니스가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전과 달리 확연하게 부은 뺨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일 신문지에 집안 개판 났다는 걸로 며칠만 더 시달리면 되겠죠.”
그 정도야 각오한 거고. 그녀가 뒷말을 짧게 덧붙였다.
개판이야 날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개판 나면 뭐 또 어떤가. 만약 100개의 가정이 있다면, 각 가정마다 100개만큼의 개판이 있을 것이다.
리안은 가정사보다 그녀의 뺨을 더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검지로 뺨을 가리키는 모습에 아도니스가 손으로 감싸 쥐며 웃었다.
“괜찮습…….”
“그대로 나가면 사람들이 더 수군거릴 거예요. 사람 시켜서 차가운 물수건 좀 들고 오라고 할게요.”
괜찮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아도니스는 그런 말 없이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가정사가 신문기사로 나오는 건 괜찮아도, 경기장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건 싫었던 건가?
살짝 드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기실을 나섰다.
* * *
“베트리체 백작이 손버릇이 나쁘다는 걸 몰랐군.”
무거운 리안의 목소리에 아도니스가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좋은 일은 아니니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들키는구나.
“에이프릴이 알고 있었다는 것도 의외고.”
“우연히 들켰습니다. 제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고요.”
“…….”
아도니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리안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황이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아도니스가 한쪽 뺨을 어루만지다 말고 머리를 대충 정돈했다.
머리카락이 짧다 보니 볼을 가리는 게 어려웠다. 거울에 비친 부은 볼을 볼 때였다.
“혹시 네가 오늘 빈 소원과 에이프릴이 관련 있는가 싶어서.”
거울을 보던 아도니스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거울 속 비친 리안이 조금 불안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도니스에게 리안 힐 라이즈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쭉 존경해 왔던 선배였다.
강인하고 단단한, 흔들림 없는 모습에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내.
자신이 알고 있는 리안은 그런 기사였는데, 지금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정확히 따지자면 에이프릴 공녀가 공작가로 돌아온 뒤로 종종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짧은 침묵이 이어질 때, 아도니스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예.”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속 시원히 떨어지는 한마디였다.
혹시나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이었군.
“공작가의 상황을 잘 모르니 그냥 입 다물고 있으려고 했는데 여쭤보시니 대답하겠습니다.”
“…….”
“굳이 저만 참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도 하더군요.”
리안이 볼 안쪽을 꾹 씹었다.
“날 가장 위하는 건 가족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더군요.”
이리나가 아도니스에게 했던 말은, 그녀가 공작가에서 지냈던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이리나 역시 아도니스처럼 우리들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버티고 버티다가 버려진 것이다.
아도니스에게 한 말로써 리안은 또 한 번 실감했다.
자신들이 과거 이리나에게 한 행동이나 친부를 죽인 일에 대해 아무리 진심으로 빌고 반성해도, 미안하다고 말해도, 상처받은 과거에 대해 충분히 보상을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