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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98)화 (98/109)

98화

“저한테는 그 말이 크게 위로가 되긴 했지만…….”

“…….”

“또 달리 생각하면 공녀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란 걱정이 드네요.”

위로가 됐지만, 하나뿐인 딸로 사랑만 온통 받고 자란 귀족 아가씨가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아무 일도…….”

누군가가 입안에 모래알을 가득 넣은 것처럼 까끌했다.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불편해졌다.

“없었다.”

리안이 어설픈 거짓말을 내뱉었다.

이리나 데빈이 라이즈 공작가의 사람들을 용서하는 날은 죽어도 오지 않을 거란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차가운 물수건 덕분에 아도니스의 볼이 살짝 가라앉았다.

“아도니스 경은 이제 어쩌시려고요? 백작가로 돌아갈 건가요?”

“돌아봤자 시끄럽기밖에 더하겠나요. 레르비앙 경 댁에서 한동안 신세 지기로 했습니다.”

레르비앙의 이름이 아도니스에게서 나올 줄은 몰랐다. 그 예민해 보이던 남자가 순순히 지내게 해준다던?

“친하신가 보네요.”

“전하만큼이나 오랫동안 뵌 분이니까요.”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백작가로 돌아가는 건 아니어서.

내가 정말로 에이프릴이었다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도니스 경보고 라이즈 가에서 지내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을 텐데.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 테니 레르비앙 경 댁까지 데려다주마.”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마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리안에게 내가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저택으로 바로 들어가실 건가 보네요.”

“그…….”

“아뇨, 조금 더 구경하고 들어가려고요.”

“에이프릴?”

그런 말은 없었지 않느냐는 부름에 내가 시치미를 뚝 뗐다.

축제 구경을 더 하고 들어갈 생각이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을뿐더러, 굳이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말할 만큼 우리가 각별한 사이도 아니지 않나.

“들어가고 싶은 거면 오라버니 먼저 들어가세요. 이제는 혼자 다녀도 미아가 될 리도 없고요.”

에이프릴처럼 공작저로 가는 길을 잊어버리기엔 나는 너무 어른이었다.

“아도니스, 우리 마차는 네가 타고 가거라.”

“예?”

“에이프릴이 축제 구경을 더 하고 싶은 모양이니 어울려 줘야지.”

먼저 걸음을 움직이려는 내 팔을 잡아끌며 자신의 곁에 단단히 묶었다.

아. 싫은데. 표정이 살짝 구겨지려고 했지만 앞에 아도니스가 있는 바람에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귀한 동생이 혼자 움직이면 위험할 게 분명하니까.”

혼자 있게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혀를 짧게 차면서 리안이 아도니스 경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당황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아도니스를 보고 난 후, 억지로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축제 때 더 보고 싶은 거라도 있던 거니?”

다정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목소리였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걸까?

귀족들 특유의 눈치 없음인지, 아니면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같이 다니다가는 내 속만 뒤집어지겠네. 나중에 보다가 따돌리고 혼자 다닐 생각을 하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택으로 돌아가 봤자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밖에 더 있겠습니까. 내가 거기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건국제 기간은 공작가의 초상 기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까지 눈치 보게 만드는 그 분위기도 싫고. 지금이야 바라크가 내게 패악질을 하면 똑같이 굴겠지만, 그때는 마냥 눈치만 보면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고는 했었다.

쯧, 혀를 차면서 경기장을 벗어나 화려한 길목을 눈에 담았다.

공작가에 떠맡겨졌지만, 실상 건국제 기간을 제대로 즐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과거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건국제의 소란스러움 사이에서도 리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미안한 게 너무 많구나.”

이제 와서 하기엔 너무 늦은 말이었다.

쓸데없는 헛소리에 걸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공작가로 왔을 때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리안의 말에 이제는 살짝 궁금해졌다. 또 자주 내뱉는 미안하다는 말이 적당히 사과를 받고 끝내라는 말 정도로 들렸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요?”

많은 것들이라고 두루뭉술하게 하는 표현이 아니라, 정확히 뭐가 미안한지 알고 싶었다.

“날 딸이라며 억지로 데리고 갔던 거? 공작부인께서 내 아버지를 죽이도록 방치한 거?”

말이 날카로운 칼처럼 그에게 푹, 푹, 박혔다.

“아니면 아가씨를 찾자마자 날 다락방으로 내쫓은 것? 이름을 부르지 않고 철저히 무시한 것?”

“…….”

“결국엔 날 버린 것?”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예상도 가지가 않네. 무너지는 리안의 얼굴을 보는 게 즐거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과거인데 왜 본인이 아픈 얼굴을 하는 건지.

공작부인이 내 아버지를 죽인 것만 제외하면 저 아픔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 없었고. 미안하다는 말에 용서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널 그렇게 내보내고 나서 행복하지 않았었다.”

“아쉽네요. 행복하셨으면 좋았을걸.”

행복했으면 좋았을걸. 그래야 조금이나마 무너뜨리는 재미가 있지 않나.

내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면서 걸음을 옮기자, 리안이 다급하게 뒤따라왔다.

경기장을 벗어나자 건국제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회가 끝난 시간은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저녁이었던지라 노상에 있는 상점에서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바라크를 떠올리게 만드는 오렌지빛 불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이나 건국제를 구경하는 외국인들이 제법 눈에 들어왔다.

새삼 어른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아이를 잃어버리기 좋은 시기이기처럼 느껴졌다.

“바라크나 그 아이가 했던 말, 믿지 않았다. 믿는 사람도 없었고.”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풍경에서 그 말에 내가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크나 에이프릴이 한 말은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에이프릴이 한 주장에 대해서는 부정했지만, 바라크가 한 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

“네가 그 애를 밀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 애가 가짜이길 바랐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오라버니는 도대체 저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제가 그렇게 성녀 같은 이로 보이시나 봅니다.”

“뭐?”

“바라크 오라버니가 사람들에게 말했던, 에이프릴이 아니게 해달라고, 사실은 이미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부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바라크 말이 사실이라는 소리냐?”

“예.”

싸구려 반지와 목걸이를 보면서 태평하게 긍정했다. 말문이 막힌 얼굴로 날 보고 있는 그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왜 배신당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바라크의 말에 부정한 적 없었고,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우긴 적도 없었다.

하물며 바라크의 주장에 내 말은 한마디도 들어보지 않고 열흘간 별채에 유폐까지 시키지 않았나.

“에이프릴을 데리고 온 남자가 사기꾼이길 바랐으니까요. 그 애가 가짜이길 바란 것도 맞았고.”

“어째서…… 어째서 그랬지?”

“공감하지 못하시겠지만, 그래도 여쭤보시니 대답하자면…….”

“제발, 제발 그 애가 에이프릴이 아니게 해주세요.”

“진짜, 에이프릴은 이미 죽어서 영영 못 찾게 해주세요.”

지금 쓰던 방에서 달밤에 혼자 기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달이 워낙 환하고 내 방을 가득 채웠던지라 내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걸 바라크가 들었을 줄은 몰랐지만.

“그 남자가 데리고 온 애가 진짜 아가씨였다면 전 쫓겨날 테니까요.”

그러니 가짜이길 바란 건 당연하지 않나?

가짜와 가짜 중에서 고르라면, 그래도 조금 더 친분이 있는 가짜와 생활하지 않겠나. 불안했으니까. 진짜가 돌아옴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고, 나는 골칫덩어리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를 테니까.

친아버지와 공작 부부 두 사람 전부 부모님으로 생각했던 시기였다.

충격받은 얼굴에 오히려 내가 당혹스러웠다. 사람이라면 필히 가질 수 있는 감정 아니었나?

“하지만 그 애를 계단에서 밀지는 않았어요. 내기는 했었지만.”

“내기?”

중간에 말 한마디 자르는 것 없이, 리안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쫓겨날 당시에는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고, 공작가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구태여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니 제법 속이 시원하기는 했다.

“네가 계단에서 날 밀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누구 말을 믿을까.”

“네가 계단에서 날 밀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누구 말을 믿을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라버니들도, 그리고 몇 년간 네 옆에 있던 가솔들도.”

“난 확신할 수 있어.”

“내 말을 믿을 거라고.”

“내 말을 믿을 거라고.”

오래전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채, 에이프릴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기는 그 애가 이겼고요.”

그래도 함께 지낸 시간이 있었으니 내 말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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