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99)화 (99/109)

99화

공작가로 와서 지냈던 시간 동안 내가 말썽을 부렸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공작부인의 기억 속에 있는 에이프릴을 그대로 연기해 주었고, 보통 귀족가 아가씨들처럼 행동했으며,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에는 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었다.

거리는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데도 리안과 내 사이는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다.

가을바람이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지럽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하나로 모아 묶었다.

“그리고 제 앞에서 더는 미안하다, 네 말을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후회했다, 따위의 말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후회해서 한 말이었고, 네게 사과하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저는 오라버니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사과받을 생각 따윈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순간이 와도 바뀌지 않을 마음이고요.”

“…….”

“솔직한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싶은 마음이 더 크네요.”

사과받을 사람도 없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지긋지긋하고 짜증 날 지경이었다.

“더는 따라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못 박힌 듯 자리에 서 있는 리안을 뒤로한 채 걸음을 움직였다.

* * *

“올 때가 됐는데…….”

아까 전에 창을 통해 앨런이 별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자신의 방으로 오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 때문에 별장에는 아주 극소수의 사용인들뿐이었는데, 지금은 사용인들도 전부 돌아간 상태였다.

건국제 기간이다 보니 둘째 오라비인 바라크도 며칠 간은 별장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에이프릴은 새삼 자신이 이 별장에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페르포네를 떠올렸다. 아무리 파혼을 원한다고 했던들, 그래도 아직은 약혼자인 자신에게 괜찮냐는 서신 한 번 보내지 않는 매정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 계집애, 그 애로 페르포네 곁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매정함이었다.

페르포네를 떠올리자 이불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일평생 그 계집애의 연기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상관없다고도 생각했었다. 연기든 진짜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자신이 페르포네 디니아 다우스를 원했고, 그와 결혼하여 명실상부한 유일한 황후가 되었다면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왜 파혼을 원하는 건지 말해주세요, 전하.”

파혼을 요구받은 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을 때, 자신이 어떤 얼굴을 했었더라.

“달리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거짓말 같은 그 말에 누구를 마음에 두었느냐고 물었던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신이 빚어놓은 것 같은 그 아름다운 외모와 다정다감을 잃지 않던 금빛 눈동자가 냉랭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페르포네의 앞에서 제대로 된 연기를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눈물을 한가득 단 채 스스로를 가리켰었다.

날 마음에 품었다고 하는데, 파혼을 요구하는 등신 천치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저잖아요……! 전하! 제가, 에이프릴 힐 라이즈잖아요……!”

완벽하게 배웠던 예법도 전부 잊어버리고 그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순간이었다.

눈물을 보이면, 사랑을 저버린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자신을 향해 마음 아픈 얼굴을 할 줄 알았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를 떠나서 황태자와 에이프릴은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였었으니까.

“아니에요, 지금 공녀는 달라요.”

“대체 뭐가요? 대체 뭐가 다른데요?”

처음으로 페르포네의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던 날이었다. 다정한 손길로 눈물도 닦아준 적 없이 그저 무미건조하게, 빛 한 줌 없는 눈빛으로 대답했었다.

“전부.”

아직도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모든 게 다.”

“……망할.”

작게 욕설을 중얼거린 에이프릴이 근처에 있는 목발을 챙기고는 몸을 일으켰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걷기에는 불편한 다리로 절뚝거리면서 방을 나섰다.

“앨런?”

너른 별장에서 앨런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분명히 별장으로 들어오는 걸 봤었는데?

“앨런.”

다시금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1층의 로비에도, 응접실에도, 그리고 테라스에도 없을 때 부엌 쪽에 불이 들어와 있는 걸 확인했다.

“앨런, 거기 있어?”

불러봤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에이프릴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불이 켜진 부엌으로 향했다.

별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재미없는 시간이었는데, 앨런이 주기적으로 오고 난 이후에는 제법 재밌어졌었다.

한 번씩 하는 카드게임도 재밌었고, 나누는 대화도 재밌었다.

반응이 없다가도 한 번씩 ‘버니스’라는 이름에서 보여주는 반응이 꽤 풋풋했기 때문이다.

불이 켜져 있으나 아무도 없는 부엌에 에이프릴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부엌의 식탁 위에, 본 적 없던 신문의 존재가 에이프릴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웬 신문?

바라크가 가져온 신문은 아닐 터였다. 왜냐면 자신이 별장에 있던 이후로 바라크가 가져왔던 건 소설책, 게임, 꽃다발이나 귀족가의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차 세트, 장신구가 전부였으니까.

마치 바깥세상과 자신을 차단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일상을 알려주는 신문기사 같은 건 들고 오지도 않았다.

절뚝거리며 식탁으로 다가가자, 신문은 누가 보다가 나갔는지 구겨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뭐야?”

그리고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에 에이프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왜.”

왜 이 계집애가.

신문에 있는 이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계집애였다.

자신보다는 조금 야윈, 긴 머리카락을 묶고, 페르포네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계집애.

“이리나 데빈! 왜 이 계집애가.”

페르포네와 함께 있는 거지? 그리고 왜 자신이 저택에서 입고 있던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거지?

1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에이프릴이 빠르게 우측 맨 상단으로 향했다.

신문사의 타이틀 밑, 우측에 작게 박혀 있는 기사의 날짜는 벌써 몇 주 전이었다.

“아가씨?”

신문을 콰작, 세게 구길 때 바로 위에서 들리는 앨런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걱정 어린 앨런의 목소리가 들리고 에이프릴의 시선이 밑의 신문으로 향했다.

“당장, 공작가로 갈 거야. 마차 준비해.”

“아가…….”

앨런의 부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그 목소리가 찢어지는 비명처럼 들렸다.

이리나와 똑같은 얼굴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반쯤 돌아버린 듯한 모습에 앨런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리나의 분노와 에이프릴의 분노는 완벽하게 달랐다.

이리나의 분노가 조금 더 고요하고 낮은 분노였다면, 에이프릴의 분노는 금방이라도 세상을 뒤덮을 것 같은 활화산과 비슷한 분노였다.

이런 걸 기대하고 신문을 보여주길 바랐나.

며칠간 지켜봐 왔던 에이프릴은 첫 만남 때 같은 예민함은 보이지 않았었는데.

“내 말 듣고 있어? 당장 공작가로 갈 준비 하라잖아!”

귀가 찢어질 듯했다. 앨런은 에이프릴이 이 난리를 부리는 게 그나마 상대가 자신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치는 거라 생각했다.

만약 별장의 사용인들이었다면 첫 만남 때처럼 비슷한 모습을 보였었겠지.

“화가 나신 건 알겠지만, 지금 당장 마차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알 바가 뭐야! 내가 찾고 있잖아, 마차를! 부르라고 하잖아, 내가!”

맨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히스테릭한 면모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앨런의 한숨에 움찔했지만, 그래도 분노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지 그녀가 계속 씩씩댔다.

“공녀님.”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가 더 에이프릴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저는 공녀님의 사용인이 아닙니다.”

“……뭐?”

“저는 제 주인이 따로 있고, 제게 이렇게 명령을 내리셔 봤자 공녀님의 힘만 빠질…….”

식탁 위에 있던 유리 물잔이 단박에 날라왔다. 다행히 얼굴로 던지지는 않아 몸에 맞았다.

퍽! 하고 가슴팍에 맞자마자 아래로 떨어진 물컵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공녀님께서 제게 행패를 부리고 닦달하셔 봤자 나오는 건 없다는 소리입니다.”

“너…… 너……!”

“계속 이런 식으로 화만 내신다면 전 돌아가는 수밖에 없고요.”

차가운 말에 에이프릴이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고작 평민 사내가 저따위로 말을 지껄인다는 게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앨런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지금,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이는 확실히 앨런 하나뿐이었다.

앨런이 하는 말은 저를 길들이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고, 자신이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정말로 나갈 것이라는, 일종의 확인 사살이었다.

앨런은 제게 속해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