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02)화 (102/109)

102화

이렇게 흥분한 레르비앙의 모습은 또 낯서네.

페르포네가 여러 사람들에게 선을 긋고 벽을 세운 것과 달리 레르비앙과 아도니스는 진심으로 그를 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목소리를 높이며 왁왁대는 레르비앙에게 잔소리를 페르포네는 웃으면서 듣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이지만, 저 웃는 얼굴이 더 레르비앙의 속을 썩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아……. 일단 돌아가시죠. 지금 시간이 빈 탓에 일이 또 쌓여 있을 겁니다.”

“알겠으니 미간 좀 풀어요, 레르비앙 경.”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데……. 도움 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이프릴 공녀님.”

“아뇨, 도움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어요.”

이미 페르포네는 볼일을 다 보고 나온 것처럼 보였으니까.

“감사 인사는 나중에 따로 하겠습니다. 가시죠, 전하.”

“그럼 건국제 마지막 날 봅시다, 공녀.”

페르포네가 입술 끝만 말아 올리며 웃었다. 폭풍이 지나가자, 어깨에 힘이 축 빠졌다.

……돌아가서 침대에 눕고 싶네. 축제도 돌아볼 만큼 돌아봤겠다, 몰려오는 피곤함에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 구경은 더 할 생각이냐?”

“아뇨, 볼 것은 다 봤어요.”

더 이상 볼 것도 없고. 제대로 둘러본 적 없던 축제에 대한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축제가 재밌다기보다는 살짝 시시하다는 생각만 들었으니까.

뒤에 서 있는 리안은 내버려 두고 걸음을 라이즈 공작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리안이 따라오든가 말든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

방금 전 레르비앙과의 소란도 소란이었지만, 축제 분위기로 인해 수도 전체가 소란스러웠고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끼어들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만 들었다. 평범하게 가족들과 친구들과 놀러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리나.”

소란함 가운데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이름이었다. 저택이 아니고, 수도에서는 들을 리 없는 이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저러지? 미치기라도 한 건가? 몸을 돌리자 리안이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미치기라도 하셨나요? 이름을 헷갈리시네요.”

“에이프릴이 아닌,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 거다.”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고작 리안의 두 걸음 만에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나와 리안이 밀착되었다. 주먹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가까워진,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거리.

“네가 복수 때문에 저택으로 온 것이라면, 어떠한 복수를 하든지 받아들일 거다.”

복수라는 단어와 달리 그의 말은 가벼웠다.

리안은 화를 낸 적이 손에 꼽은 사람이었고, 내가 저택으로 돌아온 뒤로 전처럼 다정한 미소를 보여준 적 없던 인물이었다. 그가 내게 보여준 거라고는 죄책감, 미안함, 슬픔,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게 너한테 할 수 있는 사죄라면, 그것이라도 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리안은 조금 후련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말하는 그에 잠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저 말이 진심인가, 아니면 나를 기만하고자 하는 말인가.

리안은 저녁노을처럼 웃고 있었다. 따뜻하고, 그리고 조금은 쓸쓸했다.

쓸쓸함 때문에 그가 짓는 미소가 날 기만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리안 힐 라이즈는 진심이었다. 내가 복수라는 명목하에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고 말이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고 묻자, 그가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을 버린 죄가 있으니 그걸 감당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

“네가 우리를 원망하는 감정을 가진 채 대하는 것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고.”

묘하게 속이 시원해 보이는 건 그걸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가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리안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헛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내가 어떤 짓을 할지 알고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는 말 따위를 하는 거지?

“그래, 네가 하는 말이 전부 맞았다.”

무슨 말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이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네게 용서를 바라는 게, 네가 전처럼 우리를 대해주길 바라는 게…….”

욕심이란 걸.

뒷말이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고 연약하게 들려왔다.

“아버지가 아직까지 너를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네게 대역을 부탁하면서 무엇을 주겠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말 한마디로 다시금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맨 처음 공작가로 들어왔었던 그 시절을 말이다.

에이프릴과 똑같이 생겼던 내 얼굴에 놀라고 당황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던, 떨리는 미성으로 ‘에이프릴?’이라고 조심스럽게 불렀던 그 순간을 말이다.

리안은 바라크처럼 내게 모질거나 선을 긋는 것 따위의 차가운 행동은 없었다.

그의 친절이 내가 동생과 닮은 것에 기인해서 나온 건지, 아니면 내가 누군가와 닮든, 닮지 않았든 간에 상관없이 ‘동생’이기 때문에 잘해준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리안은 내가 공작저로 있을 시절 모든 걸 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상냥했고, 다정했고, 귀족가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좋아하는 것들이라면 한 아름 들고 와 내 품에 안겨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리안이 내게 줄 수 있는 건 그것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마 이제 더는 공작가가 건네는 물질적인 것을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내 오라비이길 바라던 그때 그 시절처럼 리안이 웃고 있었다.

노을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이다.

……저 말에 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네가 그런 생각을 가졌든, 내가 할 복수에 대해 감당을 하겠다고 생각하든 말든, 나와는 하등 상관없고 관심도 없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묘하게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기 때문인가. 모나고 뾰족한 말을 해도 그가 더는 큰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내게 천천히 다가온 리안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아까 전과는 달리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동생이 잃을까 손을 꼭 잡는 오라비처럼.

“가자, 이제.”

날 잡아끄는 손이 전보다 더 거칠어졌고, 또 따뜻했다.

* * *

“제, 제발……. 제발… 고, 공녀님을 한 번만 뵙게 해주세요……!”

“안 돼, 돌아가.”

라이즈 공작가의 저택을 지키는 사병 두 사람이 빌고 비는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천한 신분의, 그리고 공작가와 이렇다 할 연도 없어 보이는 꾀죄죄하고 바싹 마른 얼굴의 여자아이가 도대체 왜 공작가의 공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라도 안다면 집사장님께 말이라도 건넸겠지만, 이유라도 물어볼라 치면 입을 꾹 다무는 여자애에 두 사람의 경계태세가 심해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저, 저, 저 한 번만 살려주세요……!”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이는 이는 아니었다.

작은 키와 왜소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비쩍 마른 몸과 낡고 낡은 옷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가냘픈 손목까지.

하지만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저택의 문을 멋대로 열 수는 없었다.

“공녀님을 뵐 수 없으니 돌아가라. 계속해서 이런다면 무력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여자애가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은 공작가의 저택이 아니라 신전으로 보였다.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전에 가서 몸 상태를 먼저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신전’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낯빛이 까맣게 변했다.

꼭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처럼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다친 저 다리로 어떻게 공작가의 저택까지 뛰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을 내보내려는 공작가의 사병들의 모습에 여자애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시체들과 함께 버려진 몸에 겨우겨우 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온 곳이 바로 라이즈 공작가였다.

만약 몸을 숨기지 못했다면 그대로 불에 타서 없어졌을 몸이기도 했다.

살고 싶다는 욕망 하나 때문에 겨우 도착한 곳이었는데, 약물에 절인 몸에 라일라가 울컥 터져 나오려는 토기를 목 뒤로 꿀꺽 삼켰다.

다리의 힘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아 쿨럭! 기침을 토해낼 때 위에서 역겹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헉! 오셨다. 야야, 얘 치워, 치워!”

잃어버릴 것 같은 정신에 사병의 목소리가 흐리게 들렸다. 느리게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제 양팔을 잡아끄는 게 느껴졌다.

실험실에서 시체가 되어 내쫓길 때가 떠올라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든 이 손을 쳐내고 싶었는데 힘이 없어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