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오셨습니까.”
뿌옇게 변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건 수수하지만 깔끔해 보이는 옷차림의 남성과 그 뒤를 따라오는 차가운 인상의 여성이었다.
저택의 문 앞을 지키는 사병들이 두 사람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라일라는 직감했다.
신력이 있을지 모를, 그 라이즈 가문의 공녀라고.
“놔…….”
힘없는 목소리가 아이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잠깐 방심한 틈에 라일라가 사병의 손을 거세게 쳐내고 뛰어갔다.
“어이!”
그리고 라일라의 손이 라이즈 공녀에게 닿기도 전에 사병의 손에 붙잡혔다.
* * *
“어이!”
저택을 지키는 사병의 목소리와 뒤이어 꽈당! 하고 넘어지는 소리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엎어진 여자애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 애를 붙잡고 있는 사병에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사병의 몸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여자애를 거친 손길로 잡고 있는 게 여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고, 공녀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엎어진 여자애의 손이 꿈틀거렸다. 엎어진 채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애의 모습은 꼭 시체 같았는데, 빼빼 마른 손이 움직이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서 학대라도 당했는지 멍과 상처투성이인 손을 보고 있자니 미간에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에이프릴, 들어오지 않고 뭐 해?”
내가 저택 안으로 걸음을 하지 않자, 앞서 걸어가던 리안이 몸을 돌려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냥 구걸하러 온 계집이니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사병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찰나였다.
“공, 녀님…….”
힘없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내 발목을 붙잡았다.
사병의 손에 끌려 나가면서 나를 부르는 여자아이에 다시금 걸음이 멈추었다.
그 애는 무게 때문에 자꾸 숙여지고 꺾이려는 고개에 애써 힘을 주면서 들었다.
“살려, 살려주세…….”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내 쪽으로 다가오려는 여자애의 모습에 내가 사병에게 손을 놓으라는 시늉을 했다.
엎어진 채로 그래도 기어와서 내 치맛자락을 꽉 쥐는 여자애를 보며 내가 허리를 숙였다.
“주, 죽고 싶지 않아……요…….”
이 기시감의 정체를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는 눈 내리는 산속 풍경이었지만, 앨런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를 잡고 있는 멍투성이의 손과 어떻게 공작가로 왔는지 놀라울 지경인 얇고 얇은 다리까지.
“쿨럭!”
정신을 놓기 전에 기침을 한 여자애의 입에서 끈적거리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더럽혀진 어두운색 치마를 볼 때, 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아는 아이냐?”
“아뇨. 아는 아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이 어린 여자애가 찾아온 건 나였고, 날 붙잡으면서 하는 말은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으니까.
“사실은…… 이 아이가 공녀님을 뵙게 해달라고 계속 애원했었습니다.”
여자애를 보고 있던 사병이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아이가 찾아온 건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아니라, 성력이 있는 이리나 데빈이었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에게 성력이 있다는 소리가 어떻게 퍼져 나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앨런, 알리샤, 데미안, 그리고 타미타르테뿐.
이 네 사람 전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인물들은 아니었다.
혀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이 아이가 이대로 죽어서는 곤란했다. 이 아이가 들은 라이즈 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애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공녀님!”
이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계집애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할 줄 몰랐던 눈치였다.
“날 찾아온 손님이니 내가 챙겨서 가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어서.”
씨근덕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이 한데 섞여 여자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망설이던 사병 하나가 결국 여자애를 안아 들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리안이 도착했다는 말에 사용인들이 마중을 나왔는데, 꾀죄죄한 계집애와 함께 들어오니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어디에 눕힐까요?”
“내 방으로 데려가.”
다른 이들이 갑작스러운 손님에 대해 궁금한 눈치였다.
여자애를 안아 든 사병이 내 방으로 걸어 올라갔다.
공녀의 침실에 정체도, 이름도 모를 이 여자애를 내려놓아도 되는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아, 아가씨?”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앰버에게 말했다.
“이 애 옷을 벗겨.”
“예?”
“어서, 벗기라고.”
아마 앨런과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앰버가 조심스럽게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을 벗겼다.
“세상에……!”
열서넛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의 몸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앨런을 맨 처음 만났을 당시보다 더하게 말이다.
입가를 가리고 경악에 찬 앰버를 뒤로한 채 내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아이의 엉망인 몸 상태를 보면서 어린아이를 걱정하는 훌륭하고 성숙한 어른이라면 좋겠지만, 이 상황에서 그럴 수가 없었다.
“너에 대해서 아는 아이인 것 같은데, 정말로 모르는 아이냐?”
걱정된다는 듯이 따라 들어와서 물어보는 리안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모르는 아이예요.”
“네게 위험이 될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데리고 들어오느냐.”
걱정 섞인 리안의 말에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이 애 몸 상태가 도대체 왜 이렇고.”
내가 라이즈 공작가와 리안 힐 라이즈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는 것과 별개로 내가 멋대로 데리고 온 신분도 불분명한 아이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것만 봐도 리안은 제법 좋은 어른이었다.
나는 엉망인 아이의 몸을 보면서도 내 안위부터 먼저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멍자국이나 팔 곳곳에 있는 바늘 자국들에 내가 숨을 들이켰다.
어쩌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이 아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앨런과 마찬가지로 신전에서 말하는 인체실험 대상자이겠지. 그런 아이를 신관에게 보인다는 것 자체가 다시 죽으러 가게끔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들 뭣들 해, 신관을 불러오지 않고!”
벼락같은 노성을 내지른 쪽은 리안이었다.
미치겠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애가 정신을 차릴 동안,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내가 데리고 있어야 했다. 괜히 나가서 쓸데없는 소리라도 한다면 큰일이었으니까.
아이가 피를 토한 드레스를 꽉 쥔 채, 다급히 나가려는 앰버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예? 왜 그러세요, 아가씨?”
신관을 불러도 절대로, 다른 신관이어서는 안 됐다.
“신전에서 타미타르테 신관님을 모시고 와. 다른 신관 말고 꼭 그 신관이어야 해.”
의문스러운 듯한 리안의 눈동자가 날 향하고 있었다. 타미타르테 신관이 로지안의 곁에 늘 있는 그 신관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내가 콕 짚어 그를 지목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신관에게 아이가 아프다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아프다고 전해.”
이미 아이의 몸 상태를 목격한 이들이 다수였다. 내가 성력을 사용해서 이 아이를 치료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다수였고, 한통속인 신관들 사이에서 그나마 내 편과 이 아이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이는 타미타르테 한 사람뿐이었다.
“만약 신관이 못 오는 상황이거든 다른 신관도 데리고 오지 마. 시간 되실 때 꼭 방문해 달라고만 말하고 돌아와.”
“하지만…….”
지금 아이의 상태를 보면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았던지라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서.”
“네,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 빠르게 뛰어나가는 앰버의 뒷모습을 보면서 얄팍하게 숨을 내쉬었다.
내 방 안에서 카나와 리안이 이해하지 못할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 여자애를 데리고 들어왔는지, 그리고 왜 하필 타미타르테 신관을 콕 짚어 찾은 것인지, 복잡하고 의문이 섞인 얼굴이었다. 꼭 어떤 범죄 현장의 용의자를 보고 있는 듯한 눈초리이기도 했다.
아랫입술을 꾹 씹으면서 저들의 시선을 모르는 척 고개를 홱 돌렸다.
어서 빨리 타미타르테가 와야 할 텐데.
적어도 타미타르테가 곁에 있다면 그의 성력으로 아이를 고쳤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자아이의 가파른 숨만이 방 안을 가득 메울 때, 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너…….”
불신과 의심, 의혹이 뒤섞인 부정적인 눈빛이 날 향할 거라 생각했는데, 피하지 않고 바라본 눈동자에서 의심이나 불신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과거, 우리가 정말로 남매였던 그 시절, 불신 따위 없이 순수함만 남았던 그때의 그 눈빛이었다.
리안의 눈동자에는 내가 혹여나 위험한 일에 휩싸인 건 아닐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이 아이가 찾아온 게 에이프릴이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에 돌덩이가 달린 것처럼 무거웠다.
“이리나, 널 찾아온 거 아니야?”
휙, 카나의 고개가 매섭게 내 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우수한 하녀장이라고 할지언정, 이 상황에서까지 표정 관리를 완벽하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내 대답을 기다렸으나,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