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공녀님!”
다급하게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타미타르테의 두 볼이 살짝 붉었다. 내 명령대로 내가 다쳤음을 알렸기 때문인지 그의 낯 위로 급박함과 걱정이 물든 상태였다.
리안과 타미타르테, 두 사람 다 날 걱정했지만 걱정의 양상은 달랐다. 늘 얌전하고 차분해야 하는 신관임을 잊고 뜀박질해 왔던 건지 그의 깨끗하고 매끈한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였다.
“신관님.”
“허억, 허어, 하아……. 후우.”
가파른 숨을 살짝 내뱉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가 어디 아픈 곳도 없이 멀쩡히 서 있으니 놀란 눈치였다.
“몸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되신 겁니까?”
급한 걸음으로 바로 코앞에 다가온 타미타르테가 내 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멀쩡해 보이는 내 몸 상태에 그가 미간이 좁아졌다.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려서는 앰버 쪽을 바라봤다. 감히 주인의 몸 상태를 가지고 거짓말이라도 했냐는 힐난의 눈치에 앰버가 고개를 푹 조아렸다.
“다들 나가 봐.”
“하지만, 아가씨.”
“에이프릴.”
“신관님이 오셨으니 이제 쓸데없는 걱정 할 필요는 없잖아. 어서.”
공녀의 방 안에 있는 게 비단 나 혼자가 아니라 하녀장인 카나와 오라비인 리안까지 있으니 아리송한 눈치였다.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인상을 굳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걸음을 물러섰다.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말하거라,”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는 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휙휙 저었다.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리안이 몇 번 망설인 끝에 마지막으로 문을 탁― 닫고 방을 나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온 건데.”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이쪽이라.”
“예?”
뒤에 서 있는 타미타르테를 스쳐 지나가 휘장을 걷었다.
허리 반쯤에 올 법한 여자애의 모습에 타미타르테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아이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 같은 분노 어린 표정이었다.
새삼 나를 제외하고 전부가 제대로 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애의 상태에도 아이를 향한 걱정보다는 내 안위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었는데.
물어볼 게 많아 보이는 타미타르테에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살려달라면서 날 찾아왔어요. 앨런이랑 맨 처음 만났을 때, 앨런의 상태가 이랬었거든요.”
타미타르테의 목울대가 짧게 일렁거렸다. 날 걱정했던 얼굴과 달리 희게 질린 낯에 내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전에서 아직까지 인체실험을 하고 있네요.”
아이의 몸을 살펴보고 있던 그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자신이 희생하면서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던 인체실험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지간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찾아온 게 에이프릴 힐 라이즈가 아니라 나였어요.”
이리나 데빈이라는 이름을 몰랐기에 에이프릴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거겠지.
“성력이 있는 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타미타르테의 표정이 굳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 같은 얼굴에 파르르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흘러나온 걸까.
나한테 성력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고는 수도에 없는 앨런과 대공가에 있는 알리샤, 수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데미안과 타미타르테가 있었다.
라이즈 공작가에게 배신당한 적 있는 내가 또 사람을 함부로 믿는 것이라고 말할지언정, 적어도 이 네 사람 중 나에 대해서 말하고 다닐 이는 없었다.
특히나 타미타르테는 나보다 더 어머니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좋아하던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전.”
희미하게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근처 의자에 풀썩 앉았다.
“전 아닙니다.”
“신관님이 떠벌리고 다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적어도 저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 중 말하고 다닐 인물은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럼 어떻게 된 걸까. 세상에 정말 들키고 싶지 않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던데.
얼굴을 한 번 쓸어 내리면서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알려면 이 아이부터 살려야죠.”
이 아이가 살아야 어떻게 된 건지, 누가 내 이야기를 한 것인지 들을 수 있으니까.
나와 생각이 같다는 듯이 타미타르테가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본인의 성력에 집중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푸른 빛이 여자아이의 몸을 휘감았다.
타미타르테의 성력 덕분에 거칠던 아이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라앉는 게 느껴지고, 동시에 방 안을 비추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지? 앉아 있던 내가 침대로 성큼 걸어갔다. 표정이 살짝 편안해지기는 하겠지만, 몸에는 아직도 멍자국이나 상처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딴에는 정말로 집중했던 것인지 타미타르테가 숨을 몰아 내쉬면서 눈을 번쩍 떴다.
“이제 괜찮은 거예요?”
“……아니.”
튀어나온 대답은 부정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몸을 살피던 타미타르테가 짓씹으면서 중얼거렸다.
“몸이 너무 약에 절여진 상태라.”
어쩐지 울고 싶어 하는 목소리 같았다. 자괴감과 자책, 슬픔이 한데 섞인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했다.
아마 내가 이곳에 서 있지 않았으면 고개를 푹 숙인 그가 눈물을 뚝뚝 떨궜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미미한 성력으로는…… 이 애를 완전히 고칠 순 없어.”
사르륵, 아래로 흘러내리는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에 내가 숨을 짧게 들이켰다.
수도의 대신전 내에서도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력 보유자가 그였는데, 그의 성력으로 고칠 수 없을 정도라면……. 도대체 이 작고 여린 몸에 얼마나 많은 실험을 했다는 건가.
인간이라면 모두가 혐오감을 느낄 비윤리적인 행동이었다.
이를 으득 짓씹은 내가, 타미타르테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뻗었다.
아버지는 이 성력을 나를 위해서만 사용하라고 했었지만, 이 능력을 갖고도 오롯이 내 보신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 시절 다쳤던 데미안도, 도망쳐 나왔던 앨런도, 그리고 이 작은 아이에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온유한 기운에 타미타르테가 홀린 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백색의, 새하얀 빛이 방을 가득 채우다 못해 창 너머로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이게 다니엘 데빈이 갖고 있던, 그리고 이리나 데빈이 갖고 있는 성력이구나.
성력은 이리나 데빈이란 그릇을 버거워할 정도로 풍부했다.
자신의 성력이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었더라면, 아니, 시냇물이 아니라 그저 비가 내린 이후 고여 있는 물웅덩이였다면, 이리나의 성력은 모든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 그 자체였다.
눈부신 백색의 빛이 쓰러진 여자아이의 몸을, 그리고 방 안을 휘감았다. 불씨가 사그라드는 것처럼 점점 사그라지는 빛 사이로 아이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허.”
제 성력으로 고치지 못했던 여자아이의 팔이 매끈하게 변했다.
아프게 남아 있던 멍자국도, 바늘 자국도 전부 사라진 하얗고 고운 피부였다. 약에 절여져 썩어가던 발가락 끝도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이 모든 걸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새삼 로지안 스타리유가 왜 죽을 만큼 다니엘을 찾아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다니엘이 가졌던 성력에 대한 말은 듣기만 들었지,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정말 이 정도의 능력이라면 늙지도, 죽지도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기도 했다.
능력을 씀에 따라 피곤하거나 지친 모습도 보이지 않는 이리나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여자아이의 이마를 확인했다.
“약물에 중독된 상태는 아니었으면 하네요.”
성력이 예를 들면 트라우마나, 약물 중독과 같은 정신적인 부분까지 고쳐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타미타르테가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이리나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용인들이 이 아이의 몸을 확인한 상태예요. 타타 님이 아이를 성력으로 고쳐줬다고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얼마든지요.”
안도감으로 연한 미소를 짓는 이리나에 타미타르테가 일순 움찔했다.
한 번도 이리나와 버니스가 닮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미소 짓는 얼굴은 새삼 그녀와 닮은 것처럼 보였다.
“말이 어디서 새어 나온 건지 최선을 다해서 알아볼 테니…….”
타미타르테가 조심스럽게 이리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긴장과 걱정 때문일까, 아니면 성력을 썼기 때문일까 이리나의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리나의 존재를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숨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