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07)화 (107/109)

107화

울음도,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멈추지 않았을 깨닫게 된 건 바로 내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잘게 흐르는 웃음소리와 바깥의 바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그리고 창 너머로 보이는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들의 모습까지.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공녀님께서도 가장 먼저 눈치채셨으면서.”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날 데리고 온 인물에 ‘공작님’이라고 말을 내뱉었으면서.

거짓말이라는 저 말은 그저 회피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너, 너, 흑, 너……!]

“그래서 리안 오라버니가 절 데리고 왔죠.”

[바라크 오라버니는 그런 말 없었어……!]

“당연하죠, 저택에서도 가장 늦게 아신 분이 바라크 오라버니이신 걸요.”

반대하는 바라크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 거고.

“공작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답니다. 딸이 되어달라고.”

기간이 정해진 부탁이기는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오해하게 만든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나. 귀족들의 화법은 원래 이런 화법이기도 했고.

내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지금 에이프릴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왠지 내가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분노와 열등감이 섞일 대로 섞여서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그 얼굴.

세상이 무너지고 모든 게 믿었던 이들에 배신감만 남은 그 얼굴.

버림받은 것도 아닌데 고작 이런 걸로 배신감을 느끼면 어쩌면 좋아. 내가 이 공작가에서 쫓겨났을 때 느꼈던 것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감정일 것이다.

[거짓말…….]

“진짜예요. 궁금하시면 직접 공작가로 오셔서 확인해 보세요.”

[거짓말이야…….]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공녀님, 3년 전에 했던 내기 기억하세요?”

“가족들이 널 믿을지, 날 믿을지 말이야.”

“그때 공녀님께서 말씀하셨죠. 결국 저는 공녀님의 대용품이었던 것뿐이라고.”

진짜를 찾기 전까지 이용하는 그저 단순한 인형이고, 대용품이었다고.

그때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대용품처럼 이용됐던 인물은 누굴까요?”

그 질문이 끝나자마자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통신구의 연결이 뚝 끊겼다.

쾅! 하고 박살 나는 소리를 보니 아무래도 통신구 던져서 박살 낸 모양이었다.

성질머리가 여전하네. 하긴, 지금은 몸이 아픈 상태니까 더 그렇겠지.

그나마 치료가 호전적이면서 예민함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던 시기였는데 내가 들쑤신 셈이니까.

앨런이 중간에서 좀 고생하겠네.

열려 있던 상자 뚜껑을 검지로 툭, 하고 덮어 누르고는 바라크의 방을 빠져나왔다.

자리를 비우라고 했었지만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앰버가 내가 나옴과 동시에 걱정 어린 눈동자로 날 쳐다봤다.

연한 갈색의 눈동자에 걱정이 한껏 묻어났다.

“아가씨…….”

사용인들 중에서도 바라크의 침실로 들어갈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예민함의 끝을 달리는 바라크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가서 통신구에 손까지 댔으니 그 인간이 알면 난리난리를 부리겠지.

“괜찮으세요……?”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

일부러 자극하려고 공작저로 돌아온 건데, 바라크가 화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바라크가 무서웠다면 애초부터 이 집으로 들어올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앰버가 괜히 바라크의 불똥에 데이지는 않기를 바랐다.

다른 사용인들은 모르겠지만, 앰버가 착한 아이인 건 눈에 보였으니까.

곧 떠날 나를 맡았다는 이유로 내가 돌아간 이후에 부당한 대우는 받지 않기를 바랐다.

“나중에 바라크 오라버니가 뭐라고 한다면 내가 멋대로 들어갔다고 말해.”

“예?”

“그러면 적어도 너한테 불똥은 안 튈 테니까.”

“하지만 거짓말이잖아요.”

“뭐가 거짓말이야. 사실만 말한 건데.”

멋대로 들어간 걸 부풀려 말한 것도 아니고.

보통 사용인들은 모시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박혀 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일 것이다.

“굳이 네가 나에 대해서 좋게 말할 필요는 없어. 1년 후에 떠날 사람을 좋게 말해봤자 너만 힘들어질 테니까.”

그리고 이 저택에서 나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도 하고.

다들 필요에 의해서 서로를 찾는 것뿐이다.

나는 돈과 복수를, 그쪽은 에이프릴이 전부 나을 때까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앰버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에이프릴 공녀님께서 얼른 돌아오시면 좋겠네.”

별장에서 파리하게 질린 낯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데.

나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걸음을 돌렸다.

* * *

“이곳이 도서관입니다.”

―신전은 제국민 모두의 것이다.

신전에서 표명하는 주장과 달리, 신전 내에서도 보통의 제국민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신전의 도서관이었다.

황실 도서관이나 공작가의 서재에서도 제법 내로라하는 서적들도 많고 어지간한 것들은 전부 다 있었지만, 성력과 관련된 자료들은 신전에서만 찾을 수가 있었다.

“따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앞의 수습 신관에게 물어보면 도움을 드릴 겁니다.”

신관의 말에 바라크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도서관의 문이 쿵!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건국제 기간이라면 바라크가 죽을 만큼 싫어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에이프릴을 찾기 전까지는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으니까.

자신이 나가면 듣게 될 말과 수군거림, 자신 때문에 에이프릴을 잃어버렸다는 그 모든 말들이 바라크에게는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개중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건국제 기간마다 심해지는 어머니의 정신착란 증세였다.

“하.”

좋지 않은 기억이 슬금슬금 피어오르자 바라크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 나온 이유가 있다면…… 역시나 에이프릴의 다리 때문이었다.

버니스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치료에 진전이 있긴 했지만, 다리는 아직도 절뚝이는 신세였다.

에이프릴이 자신의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바라크가 잘 알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이프릴의 다리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다.

제 동생은 자신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수모를 너무 많이 겪은 아이였다.

도박꾼 양부 옆에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때 에이프릴을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이리나 데빈 그 계집애가 다시 공작저로 돌아오는 일도 없었겠지.

만약 자신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시간을 되돌렸을 것이고…….

“생체이식은 어떠세요?”

문득 버니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잖아요. 다른 사람의 생체를 이식하는 거.”

그 달콤한 유혹 어린 목소리에 바라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생체이식 서적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거, 성력이 풍부하게 있던 시대에 사람들은 성력을 가지고 별별 실험을 다 했었기에 자료가 제법 남아 있었다.

다만 인간으로 하는 생체이식이 아닌, 키에라나 동물로 하는 생체이식이 대다수였다.

―성력과 연금술을 이용한 신체이식.

아카데미 시절 자신이 썼던 논문보다 더 두꺼운 두께의 서적을 빼낸 바라크가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생체이식을 함께 있어 필요한 주된 힘은 세 가지였다. 연금술, 마력,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성력.

―신체 외부 이식의 경우 피를 많이 흘리는 경우가 대다수였기에, 이식받는 자의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신성력이 필수로 필요한 힘이었다.

―이미 죽은 이의 시체로 하는 이식의 경우에는 감각이 전부 사라진 상태라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법이지.”

이런 식의 여러 실험을 해봤지만 신체이식은 제국에서 불법으로 간주하며 금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인신매매가 자행하게 되었으니까.

돈이 많은 귀족들이나 상인들이 어린아이의 몸으로 회귀하고 싶어 이런 짓을 몇 번이나 꾸몄다는 기록이 신전에 여실히 남아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연금술과 마력을 쓸 줄은 알았어도, 이런 일에 성력을 빌려줄 이는 아무도 없…….

“……버니스.”

없지 않다.

돈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처럼 보이던 버니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애초에 가장 먼저 신체를 이식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도 버니스였다.

에이프릴의 다리를 고칠 정도로 풍부한 성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면 입을 다물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이.

바로 버니스뿐이었다.

* * *

“아도니스 경은 그래서 계속 레르비앙 경의 집에서 지내는 겁니까?”

페르포네의 물음에 아도니스가 레르비앙을 힐긋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요. 조금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본가에 들어가 봤자 좋은 이야기는 못 들을 테니까요.”

서로에게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사이인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