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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08)화 (108/109)

108화

보통은 그래도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남녀가 한 지붕 밑에 있으면 조금 서로를 신경 쓰거나 할 법한데.

서로가 서로를 직장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두 사람을 보면서 페르포네가 잘게 터지려는 웃음을 꿀꺽 삼켰다.

“그러잖아도 베트리체 백작이 서신을 보내더군요.”

듣지 않아도 뻔한 말이었다. 아도니스의 소원을 들어주지 말라는 말이었겠지.

그리고 페르포네가 할 말은 뻔했다.

불법적인 소원이 아니라면 모든 검술대회 우승자의 소원은 들어주는 것이라고.

씩씩거리고 있을 베트리체 백작의 얼굴이 상상이 갔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레르비앙이 짧게 중얼거렸다.

“있을 때나 잘하시지.”

쯧, 혀를 차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베트리체 백작가가 아도니스 베트리체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소원을 들어주지 말라는 그 말이 괘씸했다.

“한데 아도니스 경이 그런 소원을 빌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하지만 또 신기한 건 신기한 거였다. 평생을 베트리체 백작가 밑에서 지낼 거라 생각했던 가문을 버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소원을 빌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제가 한 가문의 첫 시작이 되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말해주더군요.”

“누가요?”

“에이프릴 공녀께서요.”

활기를 찾았던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살짝 묘한 분위기를 풍길 때였다.

“아, 공녀님께서 옷을 전달받으셨다고 합니다.”

에이프릴 공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떠올랐다는 듯 레르비앙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말에 페르포네의 준수한 외모에 짧게 빛이 서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묘하게 밝은 듯한, 기분 좋은 내색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레르비앙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을 했다.

맨 처음 페르포네가 파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 하더라도 그가 그녀를 싫어하고, 또 관심이 없다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으니 계속 반대하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또 전과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서 뭔가 묘한 감정이 맴돌고 있던 건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어제 길에서 보았던 두 사람을 봐선……

에이프릴 공녀보다 페르포네 전하께서 그녀에게 더 관심이 생긴 듯한 얼굴이었다.

“요즘 계속 잘 지내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굳이 파혼을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짧게 있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미 꺼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어제 보았던 에이프릴 공녀라면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그런 에이프릴 옆에서 페르포네가 마냥 예민한 기색도 없었기에 더더욱.

요즘의 두 사람을 보면, 두 사람이 과거 소꿉친구 관계였다는 게 믿어질 정도였다.

“아도니스 경도 그렇게 생각하죠?”

페르포네만큼이나 에이프릴 공녀를 자주 만나왔던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에이프릴 공녀에게 우승을 축하한다며 꽃다발까지 받았지 않나.

처음에 공녀가 아도니스 경에게 다가간 이유는 페르포네의 가장 가까운 수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꾸준히 관찰해 본 결과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만약 공녀에게 그런 속내가 있었다면 아도니스 경이 먼저 선을 그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고.

“아도니스 경이 그런 말에 말을 덧붙이는 걸 봤습니까?”

“그건 그렇죠.”

공감을 구하는 말에 아도니스는 늘 입을 다무는 사람이었다.

함부로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 같은 걸 내보이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

그게 아도니스 베트리체였고, 페르포네는 그런 아도니스를 좋아했기에 곁에 두었었다.

“……지금의 공녀님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데 자신이 알고 있던 아도니스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뭐?”

“제 의견을 물어보신 것 같아서 대답한 건데, 싫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싫다기보단…….”

의외라는 거지.

레르비앙 역시 아도니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침착함을 금방 되찾은 사람은 역시 페르포네였다.

의견을 말한 아도니스도 신기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리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약혼하고 난 후의 에이프릴 공녀님은 많이 예민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지금은 그런 면모도 많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가장 큰 차이는, 페르포네가 파혼을 요구했을 때의 일이었다.

“전하께 드리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평생 말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이라면 말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 못한 말? 그게 뭔가요?”

페르포네가 궁금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묻자, 아도니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하께서 공녀님께 처음 파혼을 이야기하셨을 때.”

처음 파혼에 대한 이야기라면 제법 오래된 이야기였다.

“공녀님께서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도니스의 말에 자리에 있던 페르포네와 레르비앙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으니까.

페르포네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있다면 단연코 아도니스의 열리지 않는 입이라고 생각해 온 이였다.

황족의 근위대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입이 무거워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도니스는 자신의 이야기도 꺼내지 않는 인물이었다.

“왜 그걸 여태까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하께서는 파혼을 진행하실 거였으니까요.”

말해봤자 에이프릴과의 파혼이 앞당겨지면 앞당겨졌지, 뒤로 미루거나 취소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에이프릴 공녀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제게도, 그리고 페르포네에게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아도니스에게는 파혼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하지는 않았었는데,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아도니스가 여러모로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표정 관리를 참 잘하는 이였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자신이 한 말이 칭찬이 아니라 은근히 놀리는 말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도 능청스레 하는 말에 페르포네가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새삼 아도니스에 대해서 많은 걸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뻔뻔한 인물이었을 거라고는 몇 년 만에 처음 안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에이프릴 공녀가 그 당시에 찾아와서 했던 말이 뭐였습니까?”

“전하께서 달리 마음에 둔 여성이 있다면서 파혼을 요구하시는데 혹 그 여성이 저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이런.”

그 말을 들은 아도니스가 기분이 나빴으리란 건 확신했다.

에이프릴의 저 말은 기사 아도니스를 순식간에 깎아내리는 말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이 사실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도니스가 저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페르포네가 가만히 있을 사람은 또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시간이 제법 지난 일이지만 페르포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떨떠름함과 언짢음이 페르포네의 주변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라고 했었습니다. 믿지는 않으셨지만요.”

“…….”

“달리 만나는 여성이 없느냐고도 물어보셨지만, 그건 제가 모르는 일이었기에 모른다고 답변했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는 지금의 공녀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레르비앙의 물음에 아도니스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돌아오시고, 제게 한 번 더 찾아오셨습니다. 전하께서 파혼을 요구하셨다고요.”

“…….”

“그렇게 말씀하시는 공녀님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생판 남인, 에이프릴과 접점이 그렇게 많지 않은 자신도 느낀 일인데 페르포네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그리 오래전의 과거도 아닌데, 기억을 되짚는 아도니스의 페리도트 색 눈동자가 먼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아늑해졌다.

“뭐가 이상했던 겁니까?”

질문은 페르포네가 아닌 레르비앙이 했다.

넘실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눈치챈 것처럼 보였다.

“다시 파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을 때는, 달리 만나는 여성분이 있느냐고만 물어보셨습니다.”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레르비앙이 물어보려고 할 때 아도니스가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맨 처음, 저와 전하 사이를 의심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목소리로 물어보셨는데 그게 꼭…….”

말이 길게 늘어졌다. 마치 길거리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는 착각이 들었다.

“파혼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으신 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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