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맨 처음 제게 찾아와서 눈물을 보이며 물었던 에이프릴 공녀와 차분하게 달리 만나는 여성이 있냐고 묻던 에이프릴 공녀가 전혀 다른 인물인 것 같았다.
예상하지 못한 아도니스의 말에 레르비앙이 멍청하게 입을 벌리다, 홀린 듯이 페르포네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그런 헛소리는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하겠다고 할 줄 알았던 페르포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전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 레르비앙이 물었다.
“그러니까 경은 에이프릴 공녀가 바꿔치기라도 됐다, 뭐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게 들릴 줄은 몰랐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의 공녀와 지금의 공녀가 다른 인물 같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자신이 늘 속으로만 생각해 오던 말을 아도니스가 하자 페르포네가 볼 안쪽을 씹었다.
동시에 또 위안이 되기도 했다. 아도니스의 말은 저가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전하,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라이즈 공작가에서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뭣하러 공녀를 바꿔치기하고 그런단 말인가.
“우리가 모르는 공작가만의 사정이 또 있을 수도 있죠.”
아도니스의 말에 페르포네가 마른 숨을 내뱉었다.
피가 차게 식는 느낌 때문일까, 내뱉는 한숨이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접점이 얼마 없던 제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라면 전하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래. 자신 역시 아도니스와 똑같이 생각했다.
오히려 더 오래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고, 동시에 또 알아보지 않았나.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던 시점은 정보길드가 제게 말해주었던, 이상한 남자가 공작가에 들어간 이후와 겹쳐졌다.
“전하.”
레르비앙의 뒷말이 생략되었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는 부름이었다.
헛된 희망이나 기대를 품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금의 에이프릴이 저가 알고 있던 그때 그 에이프릴이었다면…….
쭉 같은 인물이었는데, 3년 전부터 그저 단순히 그녀가 변한 것이라면 그 뒤로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 힘들 터였으니까.
“내게 필요한 건 의심이 아니라.”
페르포네의 낮은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불안하게 느껴졌다.
“확신이니까.”
* * *
날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는 알렉시스 공작의 시선이 매섭다.
사실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불편하다 보니 괜히 그렇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택의 많은 방 중 하나에 초대받지 않은 어린 손님이 숨을 색색 내쉬면서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아이의 몸에 성력을 퍼붓듯이 부었지만 바로 눈을 뜨는 건 아니었다.
약물에 절어진 몸이기에 회복함에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 했던 타미타르테의 예상이 그대로 들어맞기도 했다.
“뭐 때문에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
“그래서 저택으로 찾아온 그 아이는 누구냐?”
역시.
하긴, 이것 말고는 나를 부를 이유는 없지.
혀를 꾹 씹으며 말을 고르기 위해 차분히 생각해야만 했다.
그 아이가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빤했다. 나도 모르는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공작가에서, 특히나 알렉시스 공작이 모른다는 말 따위를 그냥 받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공작이 물끄러미 보다 마른 숨을 내쉬었다.
꼭 그 한숨이 철딱서니 없는 딸을 보고 있는 것처럼 걱정과 따뜻함이 한 가득 묻어났다.
“저택 경비들 말로는 에이프릴을 찾아왔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땐 에이프릴이 아닌 너를 찾아온 거 같더구나.”
“…….”
“맞느냐?”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고 계속 대답하지 않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어린애가 널 어떻게 알고?”
“……믿지 않으시겠지만, 그걸 모르겠습니다.”
“…….”
“어디서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떠들 게 만들 수가 없어서 일단 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
“눈을 뜨는 대로, 그리고 이야기가 정리되는 대로 내보내겠습니다.”
알렉시스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실 공작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공작가에 와서 그가 드러냈던 감정이라고는 날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뿐이었으니까.
“그 어린애가 아픈 몸을 참고 에이프릴이 아닌 널 찾아온 이유는…… 네가 자길 살려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겠지.”
“…….”
순식간에 정답 가까이 다가오는 말에 절로 숨이 막혔다.
알렉시스 공작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가 눈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게 나였고, 그때 성력을 쓰기도 했었으니까.
눈을 뜨고 난 뒤에는 몸도 괜찮아졌으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성력을 가졌다고 확신하는지, 아니면 다른 능력 때문에 의심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탁하던 푸른빛의 눈동자가 날이 맑게 개는 것처럼 원래의 깨끗함으로 돌아왔다.
아주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사라지는 입꼬리를 보았다.
“그래, 네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한두 개는 있겠지.”
“…….”
“내게도 그런 게 있듯이 말이야.”
“…….”
“굳이 캐묻지는 않으마.”
네가 직접 말해주기만을 기다려야겠지.
쇳소리 같은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부러 못 들은 척했다.
“네 친아버지가 우리에게 너를 맡길 때 했던 말이 있었다.”
“아버지가요?”
공작의 입에서 친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말마따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공작 부부 때문이었으니, 먼저 꺼내고 싶지 않은 금기어였을 것이다.
공작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불쾌하고 기분 상할 일이었지만, 이야기 자체는 듣고 싶었다.
부녀로 함께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많이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남의 입을 통해서라도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널 꼭 공작가의 딸로서 지켜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삼키지 않았지만 목울대가 짧게 일렁였다. 목울대를 움직이자, 목 안이 건조해진 눈가처럼 따끔거렸다.
“지키지 못했던 약속이고, 내 입으로 꺼내기에도 미안한 약속이지만.”
다니엘 데빈의 존재를 신전이 알게 되고, 그에게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도 그 딸이 공작가의 여식이라면 신전이 쉽게 손대지는 못했을 테니까.
어머니를 신전의 손에 잃었던 아버지가 할 수 있던 유일한 보호였을 것이다.
알렉시스 공작 앞에서 눈물 같은 건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괜히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으니, 혹시라도 네가 가진 비밀이 들킬 것 같으면 그 아이를 내보내지 않아도 괜찮다.”
“……그 말은 꼭, 제가 도움이 필요하면 건네주실 수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물론이지.”
알렉시스 공작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부탁인 것을.”
리안과 알렉시스 공작이 닮았다는 생각은 딱히 한 적 없었으나 새삼 지금은 두 사람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얼굴이 닮았다라기보다는, 지금 공작이 보여준 분위기가, 그리고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감당할 것이라 말하던 리안의 모습이 말이다.
조금 씁쓸해 보이는 다정다감한 미소에서 두 사람이 부자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건국제 마지막 날 입고 갈 드레스와 구두는 페르포네 전하께서 보내주셨다지?”
“예.”
“신기하구나. 지난 3년 동안 전하께서 에이프릴에게 그런 선물 같은 걸 보내신 적이 없었는데.”
“그러게요.”
당연히 그렇겠지. 페르포네는 나와 에이프릴을 구분하는 이였고, 또 에이프릴과는 파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페르포네가 파혼하겠다고 마음먹은 만큼 두 사람의 약혼은 결국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파혼하게끔 내가 도와줄 것이었고.
이미 정해진 결말이겠지만…… 새삼 파혼하지 못한 에이프릴이 페르포네의 옆에 있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이의 곁을 지키는 건 에이프릴처럼 연약한 아이한텐 굉장히 견디기 힘든 일일 테니까.
“리안이 파티에서 너와의 첫 댄스를 추고 싶다고 하던데, 들었느냐?”
“아뇨, 그런 말은 아직 못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바라크 오라버니가 해주시면 좋겠지만요.”
내 말에 그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7대 3의 비율 정도로 진담이었다. 물론 7이 진심이고, 3이 농담이었다.
강제로 내 파트너가 되어서 기함할 바라크의 얼굴을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그때다 싶어서 춤을 추면서 발을 꾹꾹 누르는 것도 재밌을 거고.
“바라크에게 네 에스코트를 맡겼다가는 또 별별 얘기가 돌겠지.”
“에이프릴 아가씨에 대한 별별 소문이 돌고 있나 보네요?”
그 물음에 대해서는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