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하기 싫어요-20화 (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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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형……. 분홍이 작게 신음했다.

멈춰 있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절 관심도 없어 보이는 무심한 눈길. 잠깐 훑다가 다시 서류에 집중한다.

그저 동떨어진 김분홍만이 우두커니 서서 힘없이 흘러 들어오는 과거의 기억을 마주한다.

어느새 오디션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지고 그저 그곳에 단둘이서만 남겨진 것처럼 그를 애달프게 응시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결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그를.

기억 속에서 어떠한 장면이 떠오르기보다도, 이도가 했었던 뼈아픈 말들이 가장 먼저 쏟아졌다.

‘당분간 인터넷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듣고 네가 보고 상처받았으면서 나보고 어쩌란 거야.’

그렇다. 분홍의 회상 속에서 정이도는 나빴고,

‘나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원하지 않아. 그게 설사 너라 해도.’

싸늘하기만 했고,

‘너, 절실하게 뭔갈 해 보고 싶다는 생각, 해 본 적은 있어?’

다정하지 않았던, 그리고 분홍을 절대로 사랑해 주지 않은 과거의 연인이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이 김분홍의 목까지 치고 올라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상의 정이도는 너무 싸늘해서, 그들이 함께일 때면 김분홍은 그의 곁에 있어도 있지 않은 것처럼, 존재하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굴어야 했다.

왜냐하면,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시가 돋친 말보다 더 무서웠던 정이도의 침묵.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길 때면 그걸 지적하는 대신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았다. 마치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끌어안은 것처럼, 알고도 독배를 마신 것처럼.

이도를 목격한 이후부터 꽉 막혀 있는 줄로만 알았던 간절한 분홍의 속마음이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내가…… 절실하게 원했던 게 뭐냐고요?’

그건 바로 다름 아닌,

‘형이 쓴 곡으로, 노래하고 싶어.’

그의 꿈은 그저 그런 이도 곁에 머무르는 것…….

‘나를 위해 노래를 만들어 줘요.’

오직 그만이 이도가 가진 모든 언어의 주인이 되는 것.

그런 정이도가 누군가를 위해 곡을 썼다는 걸 과거에 두호를 통해 들었을 때.

곡을 받는다고, 그게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분홍은 그것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 왔었기에 줄곧 기다렸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가 바라던 대로 결국 흐르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곡은 한빛의 것이라고 두호가 말했기 때문에.

‘그 노래? 당연히 이한빛이 부르겠지.’

그렇게 분홍만 몰랐던 그들만의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뒤통수를 맞아야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이 부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가 얼마나 절망했는지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맹목적이었던 그의 사랑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그 순간조차, 김분홍은 혼자였다.

그런데도 그런 이도를 미워할 수 없어서 이한빛을 미워해야 했다. 증오했다.

너는 다 가졌으면서. 형의 노래까지 나에게서 가져가 버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는 소모적인 감정이란 걸 알면서도 그 당시 김분홍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 그를 지탱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를 지탱했던 건 바로…… 증오란 감정이었다.

오랜 침묵이 거슬린 듯 얼굴을 숙이고 있던 남자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말했다.

“김분홍 씨?”

언제나 김분홍의 시선은 그만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 부름에 자연스럽게 두 눈이 마주쳤다. 과거의 잔상을 지워 내기 위해 분홍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드디어. 이제 와서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과거에 그가 사랑했던 목소리에 순간 저절로 분홍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누구도 보지 못하게 몰래 닦아 냈다. 그리고 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분홍을 보며 더 이상의 시간이 지연되는 걸 막기 위해서 심사 위원 중 누군가가 재촉을 해 왔다.

“준비해 온 곡 말씀하세요.”

그 말에, 김분홍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

“저는…….”

느릿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무반주로 할 겁니다.”

이도만을 바라보던 시선이 마침내 앞을 향한다. 정면을 보고서 김분홍은 구부리고 있던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세상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사랑 역시, 그러했으니. 이제는, 모두 놓아 버릴 때가 왔다.

* * *

‘사랑해요. 이도 형.’

그 일곱 글자는 자기표현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못했던 김분홍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심을 담아 했던 말이었다.

열등감과 자기 불확신, 그리고 외로움으로 똘똘 뭉쳐진 거짓된 삶에서 유일하게 선명하게 덧그려진 감정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존재를 부모라고 인식하는 새끼 오리처럼, 그렇게 맹목적으로 그를 사랑했었다.

그는 백지나 다름없었던 김분홍의 세계에서 언어를 탄생시켰다. 분홍은 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 그 언어들로 사랑을 노래하고 싶었다.

원래도 남들의 시선을 끄는 남자이긴 했지만, 굳이 눈에 띄는 특징들을 나열하자면 백금발에 가까운 탈색모와 뱀파이어처럼 핏기 없는 창백한 피부, 그리고 각진 얼굴형과 언뜻 흘기듯 째진 눈으로 고양이처럼 무심한 눈길을 보내는 남자.

사람들이 그를 봤을 때 느끼는 첫인상은 ‘아. 참 예민하게 생겼다…….’ 이 정도.

웬만하면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강단과 인내심의 소유자. 평소에는 조용한 편이지만 알게 모르게 단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저절로 가지는 뼛속부터 지도자형의 인간.

늘 소문으로만 듣던 정이도를 처음 봤을 때 김분홍이 느낀 인상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괜히 위축되고 설설 눈치를 보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습관적인 독설.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하대하는 듯한 말투가 입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얘야? 그 김분홍이?’

그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의 방식이었단 걸 알게 된 건, 같은 팀이 된 이후였다. 그전까지는 무섭기만 한 선배, 아마추어이지만 어느 정도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알아주는 작곡가였다.

이미 명성을 가졌는데 왜 굳이 데뷔를 하려는 거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며 대답했다.

‘돈.’

‘…….’

‘명성은 돈이 안 되니까.’

‘…….’

그러면서 무슨 진짜 음악을 하겠다고, 비아냥거리는 그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야. 헝그리 정신으로 예술을 한다는 거 다 옛말이야. 간절할수록 좋은 영감이 떠오른다고? 빌빌대면서 배를 곪아 봐야 정신 차리지. 열정 페이 이딴 거 개나 주라 해. 다 자기 배 채워지고 등 따스워야 예술을 찾게 되는 거라고.’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닌가…….

오고 가는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분홍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완벽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여겼다. 한창 신문지 일면에 권위 있는 대회에서 대상을 탄 어느 작가 지망생이 단칸방에서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릴 때였으니까.

그러던 중 하필 난생처음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목격한 게 김분홍이었던 건 우연이었을까.

술에 취해 있던 이도의 얼굴에 올라온 홍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그가 탄식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평소에는 무심하기만 한 이도가 속마음을 털어놓은 순간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건, 김분홍은 실은 그게 우연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홍이 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몰랐을 시기에도 알게 모르게 그의 주변을 맴돌았기에 가질 수 있었던 기회였다.

‘…….’

용건도 없이 작업실에 들렀다가 얼떨결에 술주정을 듣게 된 분홍이 아무 대꾸 없이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도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게 되었다. 아마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진 거라고 훗날 분홍은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음악 마음껏 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말하는 속삭임과 함께 펼쳐진 하찮고, 미련한 정이도의 세상을 분홍이 엿보게 된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선택받을 수 있었던 게 흔치 않은 기회였다는 점이었다. 정이도는 그 자신에게조차 엄격해, 남들에게 틈을 보이는 걸 허락하지 않는 그런 남자였으니 말이다.

조명이 꺼져 어두컴컴한 작업실 내부. 자욱이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테이블뿐만 아니라 기계 장비들 위까지 잔뜩 널려 있는 구겨지고 찢긴 상태의 악보들. 손때가 묻어 나올 정도로 몇 번이고 고쳐 쓴 흔적. 쉴 새 없이 덧그려지느라 마치 낙서처럼 형편없이 변해 버린 음표들.

솟아오른 연기가 조금씩 희미해지자 그 틈을 뚫고 보이는 집중한 마른 등. 정신없이 작업에 열중하느라 몇 번 제대로 펴 보지도 않은 구부러진 자세.

일생에 단 한 번, 그 사람만이 보이는 시기는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눈앞이 반짝거린다거나 운명의 종소리가 울리는 마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너무 고요하게 스며들어서 분홍은 처음 그게 사랑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분홍은 사랑이 악마가 남겨 놓은 선악과 같은 거라고 여겼다. 어느 순간 밀려 들어와서 내쫓지도 못하게 영영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긴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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