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러자 루시의 그 말에 고생했다고 차연이 한마디를 얹었다. 두호는 다음 촬영 타자가 자기였는데, 물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고작 발가락만 담그고는 무섭다며 진을 빼는 루시를 기다리느라 힘들었다며 툴툴거렸다.
그게 뭐랄까. 대화가 묘하게 티키타카가 되는데 그제야 그들이 한팀이라는 게 실감이 난 분홍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말이다.
‘분명 다 같이 있는데, 내 곁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혼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시작이었다. 자신만 섞이지 못하고 둥둥 떠 있는 듯한 불순물 같은 이 감각. 모두 떠드는 와중에 공허함을 느낀 분홍이 무릎을 끌어와 양팔로 끌어안은 뒤, 마저 뮤비를 감상했다. 여러 번 돌려 보고 있는데 매니저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구석에서 뭔갈 확인하더니 소리를 질렀다.
“와, 대박! 미쳤다!”
그 비명에 다들 몰려가서 허겁지겁 순위를 확인하자 놀랍게도, 차트인에 성공한 뒤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10위권 안이었다. 이한빛의 합류 이전에는 아예 순위권 안에 들지 못했던 걸 감안한다면 놀라운 성과였다.
미리 회사에서 만들어 두었던 공식계정을 통해 다 같이 찍은 셀카와 함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다들 기분 좋게 해산하여 차를 타고 숙소로 가는 도중, 운전을 하던 매니저가 잊고 있던 게 갑자기 생각난 듯이 갑작스럽게 분홍에게 말을 걸었다.
“참 분홍아, 너 앞으로 소포가 하나 왔더라.”
“소포요?”
“응. 내가 찾아서 뒤에 뒀으니까 이따가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거 가지고 가.”
어리둥절하던 분홍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매니저가 언급한 꾸러미를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게 뭐지?”
겉의 포장지를 풀자 안쪽에 신문지로 몇 겹 더 꼼꼼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그걸 완전히 다 벗겨내자 툭, 하고 포근한 이불 위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뒤집힌 걸 똑바로 세우자 반짝이가 쏟아졌다. 물건의 정체는 워터볼이었다.
유리구 안에 박힌 조그마한 집 위로 쏟아지는 반짝이들을 바라보던 분홍이 떨리는 손으로 침대에 떨어진 편지지같이 보이는 것을 집어 들었다. 포장을 벗겨내느라 정신이 팔려 침대 발치까지 밀려난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건 분명…….’
「팬입니다.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분명 익숙한 내용, 익숙한 글씨체였다.
한참 살피던 분홍은 이 물건이 제게로 온 게 단순히 우연의 일치 정도가 아니란 걸 빠르게 눈치챘다. 왜냐하면, 글씨체와 내용도 모자라서 심지어 편지지까지 죄다 회귀 전에 그가 팬으로부터 받은 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받았던 시계는 이미 분홍이 가지고 있었는데, 시계 대신 워터볼로 내용물이 바뀐 걸 제외하고서는 모두 동일했다.
‘신기하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신인 그룹 블랙을, 그중에서도 자신을 어떻게 알고 이런 선물을 보낼 수 있었을까,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경로가 궁금했다.
워터볼 내부를 관찰하자 조그마한 집 안에는 작은 소년도 있었다. 망원경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홍은 생각했다. 이 작은 유리구 속에 갇힌 채로 아이는 대체 무얼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는 걸까. 손가락으로 가볍게 워터볼을 톡 건드리자 반짝이들이 한곳으로 쏟아졌다. 도착지는 소년의 시야 속이었다.
“얘, 나랑 닮았네.”
워터볼 속의 소년처럼, 그는 태어나기를 그런 사람이었다. 현실에 집중하기보단 언제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별을 찾았다. 불을 끄는 순간 천장에서 은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별 모양의 야광 스티커처럼, 당장은 눈앞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어딘가에는 별들이 존재하고 있다 믿었다.
그래서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고 분홍은 감정을 되새김했다.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는 그들이 존재할지라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훤한 대낮에는 이 세상에 꼭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와아!”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낮에도 반짝거리는 워터볼이 분홍에게는 별이었다.
‘누굴까? 나에게 이 선물을 보낸 이는. 나의 첫 번째 팬은.’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줄곧 자신만 동떨어진 행성에 있는 이방인 같았으니까. 그런 분홍을 위로하는 건 언제나 노래였다. 노래는 남들이 가볍게 뱉고 마는 위로와 다르게 진실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존재였다.
어쩌면 음악을 처음 시작했던 계기도 유일하게 주파수가 맞았던 노래 속 화자들이 지구라는 행성 곳곳에 흩어져 있다면,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랐던 건지 모른다. 분홍이 그들을 알아봤던 것처럼, 언젠가 그들 또한 그를 알아보길.
회귀 이전에도, 회귀한 이후에도. 시간을 거슬러 그를 찾아온 진심. 답장을 할 수 있다면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고, 진실로 감사하다고 전해 주고 싶었다. 어느새 커다란 눈에 맺히기 시작한 눈물을 닦아내며 분홍은 베개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제대로 운 것도 아니었는데 한참 뒤에 고개를 드니 베개에는 흠뻑 젖은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 * *
“……말해줘요. 내가 뭔갈 실수한 걸까?”
오늘 하루만 벌써 스물네 번째 물음이었다. 끝도 없는 한글의 되물음에 제대로 질린 매니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탄을 들어주다 못해 가루가 될 지경이었으니.
“정 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네가 먼저 연락해보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니.”
최근 들어 한글의 매니저는 거대한 환멸이 들어 자신의 일이 극한 직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많은 스케줄 탓이 아니었다. 순전히 자신의 조언을 들어먹을 생각이란 실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대는 저 입을 틀어막지 못해서 생기는 분한 감정이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글이 다시 풀죽은 목소리로 되뇌며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그럴 수 있었으면 벌써 그렇게 했죠……. 마음만큼 행동으로 옮기는 게 쉽게 되지 않으니까 그게 문제지.”
“그건 그렇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매니저가 한글에게 뒤이어 물었다.
“……너 진짜 그 머리는 언제 자를 거야?”
한글이 충동적으로 뒷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게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변덕이 얼마나 오래가겠니, 하고 방치하며 매니저로서 본분을 망각한 탓일까. 작품을 끝낸 뒤 단순히 스트레스 풀기용인 줄 알았는데, 어느덧 머리 길이는 어깨선에 닿을 정도로 길어 있었다.
그러자 자신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던 한글이 말했다.
“기다리던 연락이 오게 되면?”
“…….”
“진짠데.”
나는 진심이라고요. 차마 거기까지는 고백하지 못하고 한글이 과거의 회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게 시작된 때가 아마도 분홍이 자신을 뒤에 두고서 멀어지던 그날부터였다.
‘연락 줘요, 번호도 안 바꾸고 얌전히 기다릴게요!’
분명 한글이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하루 이틀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은 오질 않았다.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 후로도 끝없는 스케줄에 시달리며 매일매일을 무탈하게 보내기 위해 바삐 지내느라 한글 역시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그대로 분홍에 대한 기억도 까마득히 잊었다고 여겼는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케줄이 끝나고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바뀐 신호에 걸려 잠시 도로 위에서 정체되었던 적이 있다.
한결 여유를 가지고 창밖을 보니 멀리서 과거의 한글이 길거리 공연을 했었던 그 장소가 갑작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곳에 시선을 빼앗겨버린 한글이었다. 동시에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는지 앞좌석에 있던 오오라의 멤버들 중 한 명이 외쳤다.
“와, 눈이 진짜 많이 내리네.”
이러다 도로 위 교통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겠다며 매니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말이 예고편이라도 된 듯, 첫눈이 내린 그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윽고 거세게 눈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날씨 탓인지 거리는 관객들이 넘쳤던 그때와는 달리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내리는 눈이 마치 모든 걸 지워버릴 하얀 지우개처럼 순식간에 거리 위로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한글의 머릿속에서 흐릿했던 모든 게 선명해졌다. 잊고 있었던 기억도, 감정도.
차의 유리 위로 습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 위로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일 때마다 그 끝을 따라 자연스럽게 길이 그려졌다.
그렇게 불현듯 깨달음은 찾아왔다. 한글이 고뇌로 가득 찬 머리를 감싸 안고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등을 구부렸다.
“……몰랐는데 나, 진짜로 기다리고 있었구나.”
어딘가 서글픈 듯한 음성에 놀라 다들 고개를 들어 뒷좌석을 기웃거렸다. 순식간에 얼굴을 바꾼 한글이 불편한 관심을 제발 거둬달라며 그들을 향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뭘 봐요.”
그러자 그런 한글의 태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중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왜 저래. 갑자기 돌았나?”
“내버려 둬. 실연이라도 당했나 보지.”
“천하의 오한글이……?”
“막내야! 드디어 너 연애하니? 누구랑?”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쑥덕이며 자기네들끼리 소설을 쓰기 시작한 오오라의 멤버 형들을 제대로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한글이 자신의 몸 위로 멘 안전띠를 꼭 끌어안으며 툴툴거렸다.
“치……. 다들 내 마음도 모르면서.”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선호작품 등록/취소알림 등록/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