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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하기 싫어요-78화 (7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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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긴 시간 동안 한글이 분홍의 곁에서, 팔이 저려 올 텐데도 같은 자세로 있었던 것은.

아무런 재촉 없이 묵묵히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각자의 어둠에서 헤매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어 주진 못할지라도. 적어도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홍에게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악몽에서 벗어나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게 자신을 기다리던 누군가의 웃는 얼굴이라면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한글이 그런 생각을 하며 식은땀이 흐르는 분홍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이 든 얼굴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길어진 머리카락이 순간적으로 분홍의 코끝을 스쳤다.

“……!”

그러자 순간적으로 재채기를 하며 분홍이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눈동자는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며 한글은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기다리겠다는 계획은 멋지게 실패하고 말았다.

서로 자세가 낯부끄럽다고 느낄 때쯤 한글이 먼저 재빨리 몸을 떼고 거리를 넓혔다.

그때였다. 분홍이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자신의 콧등을 문지르며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말을 한 것은.

“와. 하마터면 콧구멍에…….”

“…….”

“그게 들어갈 뻔했어요.”

덕분에 둘 사이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한글이 질끈 눈을 감으며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빨리 잘라야겠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풀 죽어 있는 게 안쓰러워서 분홍은 얼른 그런 그를 달랬다.

“잘 어울려요.”

그러자 한글이 반색하며 물었다.

“진짜요?”

“그럼요. 완전 멋있어요.”

“사실 저도 알아요. 저 잘생긴 거.”

“…….”

“아니지. 예쁜 건가?”

너무나도 뻔뻔한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건, 솔직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글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실은 부러웠던 분홍이 쓸쓸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더니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매번 못난 모습만 보이고…….”

“…….”

자신이 한 선택이랍시고 상처만 잔뜩 주고 떠났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거예요.’

……라고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잘되는 모습만 보여 주지 못할망정 언제나 이런 꼴만 보이게 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참 신기하게도, 분홍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는 언제나 이 남자가 존재했다. 딱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디디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 텐데.

언제나 줄곧 인생에서 자신이 혼자일 거라고 단정 짓고 살아온 분홍의 확신을 처참하게 구기듯. 다시 위로 올라오라고 손을 내밀었다.

분홍이 이어 말했다. 마음속에 숨겨둔 비밀을 털어놓듯이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예전에, 제가 데뷔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

“나름 잘해 보고 싶어서 선배님 앞에서 당당하게 말한 거였거든요.”

“…….”

“있잖아요. 실은 돈보다도, 그게 컸어요. 훨씬 더.”

“알아요. 왜 모르겠어요.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한글의 말에 분홍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껏 확신이 들지 않았던 자신의 선택이 작은 격려 하나에 굳어졌다.

“선배님은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어요.”

“…….”

“……어쩌죠. 그런데 마음먹은 만큼 잘 안 풀리네요.”

그러자 시선을 떼지 않고 줄곧 듣고 있던 한글이 물었다. 거의 속삭이듯이. 아직 그치지 않은 빗소리에 비하자면 지나치게 고요한 음성이었다.

“그럼 그 상황에서, 그런 다음에 제가 했던 말도 기억나요?”

“네……?”

아직 가까이에 있었기에 겨우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그 제안 아직 유효한데.”

“……!”

“……나랑. 음악 하지 않을래요?”

뭐야. 이 사람. 진심인가? 진심으로 어리둥절해지다 못해, 도리어 화가 났기 때문에 분홍은 거의 쏘아붙이듯이 몰아붙였다.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차오른 건 오랜만이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

“솔직히 장난치는 것 같아요. 선배님.”

“…….”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죄송하지만……. 재미없어요.”

정색하며 말하자 한글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 가볍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아닌데.”

손을 들어 자신의 목 부근을 힘없이 어루만지며 분홍이 비관적으로 얘기했다.

“왜냐고요?!”

“…….”

“무슨 의민지는 모르겠지만. 보나 마나 저 같은 건, 민폐만 될 거니까요.”

자꾸만 한글이 하자고 제안하는 음악이 뭔지는 몰라도…….

이한빛의 창법을 따라 하기로 한 이후부터,

조금이라도 무리를 가하기만 하면 형편없이 갈라지고 마는 목소리를 과연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의심부터 들었다.

그렇다고 작곡을 하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쓸모있는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연인이었던 이도에게도 끝까지 곡을 받지 못했는데, 그런 자신에게. 굳이 이런 제안을?

차가운 분홍의 반응에 생각에 잠긴 한글이 잠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렇다고 여기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충분히 잘 해내고 있어요.”

“…….”

분홍 그 자신보다도 분홍의 직캠을 자주 돌려 봤던 한글이었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알려 줄 수 있었다.

언젠가 보여 주고 싶어서,

영상 아래에 달린 좋은 댓글을 하나하나 캡처해 뒀던 한글이었다.

고민 끝에 휴대전화를 꺼내 든 한글이 만지작거리더니 그걸 분홍에게 내밀었다.

“여기 보여요? 다들 칭찬만 하고 있잖아요.”

조회 수가 회귀 전보다 잘 나온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분홍이 그동안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던 팬들의 반응이었다.

사실 지금껏 보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다른 누군가의 흉내를 내는 마당에 그게 진짜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무대로 인해 칭찬을 받든 말든, 솔직히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기 때문에 확인하지 않았다.

분명 그랬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간절한 눈빛으로 애타게 자신을 바라보는 한글로 인해, 불신이라든가 부정적인 감정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힘겹게 마주하게 된 댓글. 한글과 함께 그것들을 살피던 중 분홍이 자기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와.”

“그것 봐요. 제 말이 맞죠?”

단순히 칭찬을 바라서가 아니었다. 실은, 감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스처라든가, 창법이라든가. 하다못해 목소리까지.

무대를 소화하는 내내 애초에 자기만의 것이 없다 여겼다.

그랬기에 죄다 이한빛에게 하던 칭찬을 똑같이 했을 거라 여기고 일부러 지금까지 반응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몇몇 다른 평들을 보았기 때문에.

실은 다 흉내를 낸 건 아니었다. 분홍이 혼자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도 미미하지만,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댓글을 확인하다가 분홍이 신기해하며 말했다.

“이 파트를 소화할 때 일부러 여기서 왼쪽으로 돌았는데. 표정 연기도 그렇고. 팬분들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나노 단위로 분석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이제껏 그 아이가 밟아 온 길을. 그 아이의 춤과 노래를 흉내 내고 있다고 여겼지만, 어느 순간에서만큼은 자신만의 색깔이 보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알아보았다. 그게…… 미치도록 가슴 뛰게 했다.

이윽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한글을 돌아보며 주체하지 못하고 분홍이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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