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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이 말한 표현 중 유독 마음을 건드리는 게 있었다. ‘다음’이라. 분홍이 작게 웃었다.
“……그럼요. 꼭 보여드릴게요.”
사랑에는 경험이 없다고 아닌 척했으면서, 예상외로 고단수일지도 모르겠다.
천성이 다정한 탓일까. 분홍은, 어쩌면 한글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길들이고 있다고 의심했다.
선배님은 지나가듯 가볍게 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들이, 분홍에게는 어느샌가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었으니까.
내일이 오길 기다리는 게 더는 두렵지 않았고, 단지 그것만으로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이 모든 게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생겨난 변화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한글이 손바닥을 짝! 치며 말했다.
“이제 선배님 말고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한글이 뒷짐을 진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서 걸어갔다. 산뜻하고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기왕이면 반말로.”
같은 그룹 멤버 형들에게도 지금까지 존댓말을 쓰는 분홍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그러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을 이상한 나라로 데려온 토끼는 사라진 채였다.
‘여우한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네.’
비도 그친 것 같고……,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페인트칠이다 뭐다 이른 시간부터 제법 무리를 하긴 했다. 분홍이 팔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비가 그친 뒤. 바깥은 모든 게 씻겨 내려간 듯 개운한 상태였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빠져나온 분홍은 자신에게 찾아온 눈부신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제 더는……, 외롭지 않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을 미소 짓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게 바뀌었다는걸.
그러니까 단지 선배님의 존재만으로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같이 가요!”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분홍이 소리쳤다.
* * *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우스울 만큼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가장 인파가 많이 몰리는 서울 번화가의 한복판에다 그런 엄청난 짓을 벌였으니, 잠자코 넘어가는 게 더 말이 안 되긴 했다.
결과적으로 오한글의 개인 SNS 계정이 난리가 났다. 벽면에다 음반 커버를? 기가 막힌 발상 하나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외모의 힘일까. 단순히 복면을 벗어 던지는 걸 하나의 퍼포먼스로 착각한 듯했다.
가뜩이나 높았던 팔로워 수가 껑충 뛰었고, 한글의 행보에 따라 관심 어린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말도 안 돼. 이거 진짜 오빠예요?’
정작 계정주인 한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일상생활을 올려대는 것 같긴 했지만.
아이돌로서 자신의 일정을 소화해 내는 와중에도 선배님의 SNS를 몰래 훔쳐보는 게 어느새 하나의 취미가 되었다.
“어! 여기는……?”
띠링. 그러던 중 분홍은 갑작스럽게 업로드된 게시글에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바로 터널 안에서 본 그림이었다.
‘이게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네.’
대체 어느 포인트에 꽂힌 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물끄러미 관찰했다. 그러다 보니 사진 아래 적힌 글자에도 시선이 갔는데.
[도로시 아자!!]
‘대체 몇 살이야.’
피식 웃었다. 미리 만들어둔 아무도 모르는 가짜 계정으로 들어가 게시글 밑에 하트 표시로 된 아이콘을 꾹 눌렀다.
그러던 중 여론이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의문을 품은 어떤 이의 댓글이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오한글 옆에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임?’
그러자 비슷한 의문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스태프 아닌가?’
‘그런데 일반인치고는 비율이 대단히 연예인 같으시네.’
‘실루엣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옴. 복면 벗으면 분명히 잘생겼을 듯.’
잘생겼다니! 이건 못 참지.
곧장 네티즌 사이버 수사대들이 출동했다.
명탐정에 빙의한 오오라의 팬들이 삼삼오오 모여 복면의 정체가 누구일지 토론했다.
‘얘는 저번에 한글이랑 같이 엠시 볼 때 키가 이거보다 훨씬 작지 않았나?’
‘언뜻 보이는 코 모양이 이것보다 높은 것 같은데.’
솔직히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얼굴도 다 가려져 있었고, 금방 관심이 식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라?”
놀랍게도, 수사망이 점점 좁혀지는 걸 지켜보면서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아직 블랙은 신인 아이돌이라, 그만큼 간이 큰 짓을 벌일 거라고 거기까진 다들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중 그런 견고한 방어막이 깨어진 계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소속사에서 합동 콘서트를 하게 된 것이다. 애초에 대형이긴 하지만 AT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가수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알게 모르게 아티스트 팬들 간에 기 싸움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티켓팅 도와주실 분 급구!’
처음에는 단순한 자리싸움 정도로 시작되었는데.
‘여기 팬 석 우리 자리인데요?’
어느새 오오라와 블랙, 두 팬덤 간에 과열된 경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오오라는 아직도 뜨고 있는 가수라는 점에서 갓 뜨는 신인 그룹에 오히려 위협을 느낀 남은 팬들을 똘똘 뭉치게 했다.
블랙은 블랙 나름대로 ‘우리 애들 기를 살려야 한다’라는 의지로 발버둥을 쳤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공연의 첫 번째 날. 급기야 응원봉을 끄고 양쪽에서 보이콧을 한 것이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잠자코 지켜보던 분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회귀 전에도 이랬었지.’
그때보다 블랙의 팬 수가 늘어나 오히려 더 개싸움으로 번지게 될 것 같았다.
착잡한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콘서트 둘째 날. 블랙의 대기실에 찾아와 줄곧 시간을 보내는 한글로 인해 바깥 사정을 다 파악하고 있는 스태프들이 수군거렸다. 혹시 아직 선배님이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싶은 분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와서 이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바깥에서는 팬들끼리 싸우고 있는데. 당사자 앞에서 이 말까지 할 수 없던 분홍이 끝말을 흐렸다.
아닌 척 굴지만, 은근히 눈치가 빠른 한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그럼 우리 사이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가 되는 거냐며 웃었다. 그 말에 어쩐지 못마땅해 보이는 분홍의 눈치를 보던 한글이 슬그머니 표현을 다시 고쳤다.
“……로미오와 줄리엣?”
어이가 없어서 입이 딱 벌어졌다.
“선배님다운 표현이네요.”
한동안 그렇게 의미 없는 말장난만 주고받다가 무대에 올라갈 때가 되어서야 한글이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한글 씨랑 진짜 친하신가 봐요.”
스태프 한 명이 하는 말에 분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선배님 말고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던가.’
아직은 당사자 앞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호칭이지만,
“진짜 친해요. 한글이 형이랑.”
언젠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날이 온다면, 선배님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구나.’
어머나. 그 모습을 보던 스태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분홍 씨가 진짜 많이 좋아하나 보다~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떠들고 다닌 건 나중의 일이었다.
* * *
“공연 마지막 날이네요. 오늘도 와 주셔서 감사하고요. 콘서트는 처음이라 많이 부족했지만, 다음번엔 더 좋은 공연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대망의 공연 마지막 날이었다. 단체로 하는 인사에서 자신에게로 곧장 다가오는 존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렇게 대놓고 온다고!?’
한글이 손을 흔들며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분홍이 겨우 입을 뗐다.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두 팬덤 사이 분위기가 어떻든. 둘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건 공공연하게 다 아는 일이니까 상관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다른 일이지.’
이를테면 복면의 정체 같은 거 말이다.
이렇게 대놓고 선배님과 붙어 있게 될 기회가 오다니. 불안함이 엄습했다.
‘설마. 모르겠지?’
분홍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해맑게 웃는 한글을 보니, 의식과는 다르게 따라 헤실거리게 되는 것이다.
셀카를 찍자며 한글이 분홍의 손을 이끌었다.
카메라를 들이미는데도 마냥 좋다고 웃었다.
그렇게 헤헤 웃다 보니 순식간에 콘서트가 끝나 있었다. 분홍은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제정신을 찾았다.
이런, 미인계였나. 잘생긴 얼굴에 당했네.
그리고 그날 밤, 한글의 SNS에 올라온 게시글 하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비밀계정을 통해 염탐하던 분홍은 눈을 크게 떴다. 한글의 계정에 올라온 건 그날 콘서트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분홍과 단둘이 찍은 동영상도 있었다.
웃다가 들이미는 렌즈에 당황한 분홍이 손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얼굴의 절반이 가려졌다.
그리고 그 익숙한 모습에 무언가가 연상되면서, 앞으로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 펼쳐질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그건 다들 마찬가지였는지 게시글의 댓글 창이 느낌표로 도배되어 있었다.
끙. 분홍은 머리를 싸매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씨. 들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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