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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상이 반드시 선배님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누구에게든, 평생 털어놓을 수 없는 사실이겠지.
굳어 있던 한글의 얼굴이 잠시 뒤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이 툭 튀어나오며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엠피스리, 분명 나는 곧장 돌려줬던 거 같은데…….”
자신의 물건이 어떻게 분홍의 손에 들어갔는지.
꼬마 도둑의 범행 동기 같은 걸 따지려고 든 게 아니었다. 그저 되돌려받지 못한 선의가, 안타까워서 한 말이었다.
혹시 숨겨진 사생인가? 만일 상대가 분홍이라면 그것도 그거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은 한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분명 시계는 그에게도 소중한 물건이 맞았다.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품이었으니까.
그러나 분홍으로부터, 시계를 향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힘없는 손짓을 발견했기 때문에. 쉽사리 뭔갈 할 수 없었다.
이 물건에 얽힌 어떠한 숨겨진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그 이후로 분홍이 마치 아무것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어서 차마 무슨 이유냐고 물어보진 못했지만.
시계를 손에 넣게 된 이후부터 좋은 일만 일어났다고.
분홍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잔뜩 움츠러든 몸에, 순간적으로 한글의 눈앞에 잊지 못한 과거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하나뿐인 유품이었던 남겨진 시계를 끌어안고 방 한구석에서 남몰래 눈물짓던 작은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고개를 푹 숙인 후배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며 한글이 말했다. 이 시계, 비싼 건 아니지만 아주 귀한 물건이라고.
“그 당시 제게는 외로운 날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행운의 부적 같은 거였어요. 이걸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시간이 흘러 원하는 미래로 데려다줄 거라고 굳게 믿었거든요.”
“……!”
“아주 예전에, 어렸을 때 멋대로 지어낸 말이었는데. 분홍 씨가 이 물건을 두고 그런 말을 해주니 거참 신기하네요.”
“…….”
과거에 간절히 불어넣은 바람이 지금에 와서야 효력을 발휘한 걸까?
시계는 얄밉게도 어린 한글의 소원을 이루어주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다른 누군가의 소망은 실현하게 도와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애초에 제게는 통하지도 않은 주문이었고, 이젠 필요 없는 거니까.”
“…….”
“그러니까 제 말은, 꼭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선배의 반응에 놀란 후배가 가뜩이나 큰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끼는 거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 말에 대답하기 전 한글이 하품하며 살짝 기지개를 켰다. 근래에 꽤 자주 잠을 설친 탓에 피곤했다.
“분명 그랬는데. 이제는 크게 의미가 없네.”
뒤이어 사실 원래 물건을 소유하는 것 자체에 애착이 별로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
정말로 당황한 듯한 분홍의 반응에 한글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씩 웃으며 그를 얼른 안았다.
“걱정 마요. 이래 봬도 아끼는 사람에게 싫증이 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분홍은 그 말에 두근거리는 자신이 비정상이라고 느꼈다. 동시에 자신을 안아 든 넓은 가슴팍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심장 소리에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대신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오랜 시간 안겨 있었다.
품 안에서 울먹이다가 문득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저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회귀 전에, 자신의 악행으로 망가뜨린 모든 걸 떠올렸다. 단지 남들보다 앞서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일어난 일이었다.
‘모두 없던 일이 되긴 했지만…….’
비록 이 시계가 원점으로 되돌려놓긴 했지만 말이다.
자신이, 삶에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걸 뒤늦게 깨달으면서, 무서워졌다.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나는 그날 죽었어야 했어.’
그러나 한글이 제게 준 시계는 여전히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걸 계속해서 소유하고 있어도 되는지, 더 간절하고 억울한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건 아닌지 계속해서 의심했다.
“지금이라도 더 좋은 후배를 찾아보시는 게…….”
분홍이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앞에서 한참 망설였다. 그러다 못해 괴로운 듯 짓이긴 신음을 뱉었다.
차마 사실을 완전히 고백하지 못하고 그저 더럽고, 추악한 사람이라고 덧붙이자 분홍의 단어 선택에 충격을 받은 한글이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많고 많은 이들 중에서 하필 제 손을 잡는 걸 택했는지 새삼 분홍은 한글이 안쓰러웠다.
부족한 거 하나 없는 사람이, 그다지 잘난 구석도 없는 분홍의 ‘팬’이 되길 자처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러자 아무런 대가 없이 시계를 가지는 게 미안하다면 한글이 자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고 했다.
“대신에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 그게 뭘까. 분홍은 한글이 원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심지어 하늘에 있는 별을 따다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힘이 미치는 한, 손에 닿는 곳까지 열심히 노력해 볼게요.”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귀찮을 거라며 한글이 부탁하기 전에 미리 사과했다. 대신 작업실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달라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가지고 있던 물건을 정리하는 김에 이것도 치워 버려야 할 것 같아서요.”
한글의 손이 가리키는 건 그의 어머니 생전 모습이 담긴 액자였다. 사진 속 영원히 박제된 그녀의 젊음이 고스란히 있었다.
망가진 액자를 바꿔 끼워 놓으면서까지 아꼈으면서, 대체 왜!?
한글이 작업실 안을 청소하며 그걸 소각장에서 태우기로 했다고 머릿속에 있는 계획을 간단히 설명했다.
“……사실 아직은 사랑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준비는 된 것 같아서요.”
“준비요?”
이전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 보려고 한다며- 한글이 씩 웃었다.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준비.”
그런 의미였나. 뜻밖의 고백에 당황한 분홍이 설마 그 ‘누군가’가 자신이냐고 질문했다.
소리 내어 웃은 한글이 그건 비밀이라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여차여차 모든 걸 정리하고 난 뒤. 비로소 자유로워진 아름다운 여배우를 추모하며 한글은 짧게 기도했다.
그런 뒤. 소각장을 뒤로하고서 곁에 있던 분홍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 * *
그날 밤, 분홍에게 갑작스럽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포장된 선물 하나가 놓여 있었다.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우선 안의 내용물이 뭔지 확인하기로 했다.
“……이건 신발이네?”
구두를 신고 상처 입은 분홍의 발을 떠올리면서 선물해 준 걸까?
신어 보니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하게도 제게 딱 맞는 크기의 운동화였다. 발이 아주 편안했다.
이윽고 분홍이 작은 목소리로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나의 하나뿐인 ‘도로시’에게.」
내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딛는 모든 걸음이, 네가 간절히 바라는 목적지로 인도하기를.
도착하게 된다면, 그곳에서는 부디 더는 슬픈 꿈을 꾸지 않고 편하게 잠들기를 바라.」
그리고 그 뒤에는 동화 속 오즈의 마법사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었다.
“너의 은 구두가 사막 너머로 너를 데려다줄 것이다. 구두의 놀라운 힘은 세 발자국만 걸으면 원하는 곳 어디에라도 데려다주는 것이란다.”
회귀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편지의 발송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여전히 너의 팬인, 한글로부터.
그리고 변함없이 한글의 글씨는 악필이었으나. 그곳에 담긴 서툰 진심을 분홍은 이번에도 역시, 알아보았다.
편지와 선물의 의미를 되새겨보던 분홍이 운동화를 신고 숙소의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갇혀 있던 새장 속을 벗어나기라도 한 듯이, 새삼 확 트인 하늘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 멋지네.”
새 신발을 신었으니, 오랜만에 산책하러 가야겠다 싶어 바깥에서 우연히 마주친 루시와 함께 걸었다.
“뭐예요. 신발 예쁘네요?”
그리고 루시의 칭찬에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 * *
그날, 한글이 분홍에게 선물한 건 겉으로는 고작 ‘신발 한 켤레’였을지는 몰라도.
분홍이 그 신발을 신고 떨리는 걸음으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 내면의 무언가가 확실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건, 더 넓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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