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하기 싫어요-100화 (100/103)

-100-

분홍이 살짝 몸을 떨자 얼른 뒤에서 한글이 그를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한 치의 바람이 새어드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끌어안았다.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구나.’

그 손길에 홀로 정처 없이 이 거리를 헤매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조심해요. 이러다 혹여나 누가 보면 어떡해요.”

살며시 웃으며 툭 밀어내긴 했어도 분홍이 고맙다며 덧붙였다.

날이 저물어 가면서 길가의 풍경도 바뀌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멈춰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퇴근길인지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곳곳에 보이다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차가운 날씨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듯, 구석구석에 길거리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음악 장비를 꺼내놓으며 마이크 세팅을 했다.

그걸 목격한 분홍이 눈을 반짝이며 손을 모아 쥐더니 탄성을 뱉었다.

“다들 열심이다. 그렇죠?”

나이와 상관없이 청춘이란 게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한글이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멀리서 누군갈 발견하고 그 방향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형들! 우와, 여기서 뭐 해요?”

표정이 너무나도 환하게 웃기에 누군가 했더니, 바로 밴드부 ‘클로버’의 멤버들이었다.

다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뻘쭘하게 남겨진 분홍이 혼자 뒤에 서 있자 한글이 그의 손을 끌었다.

어쩔 수 없이 분홍이 쭈뼛하다가 그들에게 다가가 소심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개의치 않고 밴드부의 일원들이 오랜만이라 반갑다며 어깨를 두드리는데, 그 모습이 선배님과 비슷해 친근감이 들었다.

‘성격이 다들 밝으시구나.’

다행히 여기서 소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뿐인 듯했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분홍이 아예 밴드부 일원 중 한 명이 건넨 막대 아이스크림까지 받아 들었다.

맛있게 먹는 분홍의 모습에 뿌듯해진 한글이 한 입만 달라며 어깨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만 보니 이거 너무 연인 같은 모습 아닌가?’

잘생긴 얼굴에 홀딱 넘어가 자기도 모르게 아이스크림을 넘겨주긴 했지만, 거의 볼이 맞닿을 정도로 둘 사이 거리가 가까웠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의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다들 둘의 모습을 흘끗 보긴 했어도 별다른 지적은 하지 않았다.

모자를 한층 더 깊게 눌러 쓴 분홍이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마저 다 먹어 버렸다.

그런 뒤 선배님을 막대로 콕콕 찌르며 의미 없는 장난을 치는 와중에 밴드부 일원 중 누군가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근처 공원에서 곧 불꽃놀이 한다더라. 보고 가.”

그 말에도 분홍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한글은 무지무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눈이 반짝거리다 못해 빛나고 있었으니까.

잔뜩 기대하는 듯이 보이는 선배님에게 차마 거절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결국 잠시 시간을 내어 구경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불안해진 분홍이 재빨리 먼저 선수를 쳤다.

“진짜 잠깐만 보고 가는 거예요!”

그때였다. 선배님의 휴대전화가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화면에 가득 찬 ‘매니저 형’이라고 적힌 글씨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이는데도 뻔뻔하게 무시한 한글은 바쁘게 공원 위치나 검색하고 있었다.

‘지금 이게……. 나만 보이는 건가?’

곁눈질로 보던 분홍이 경악하는데도 정작 당사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어서, 자신이 눈뜬장님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정도였다.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에 결국 받은 한글이 버럭 소리를 지른 뒤 곧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미팅 중이에요!”

-야. 오한글. 대체 무슨 미…….

내일이 없는 듯이 구는 선배님에게 익숙해진 분홍이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웃으며 먼저 한글의 손을 끌었다.

“시간 없어요, 서둘러요!”

* * *

그렇게 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직까진 인파가 그다지 몰리지 않은 듯 보였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던 분홍이 허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낮이니까 불꽃놀이가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겠네요.”

한글이 흘끗 주변을 살폈다.

“그러게요. 그동안은 뭐하지?”

그렇게 말했어도 눈길은 길가에서 파는 음식들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고소한 냄새에 결국 참지 못하고 한글이 분홍에게 물었다.

“혹시 현금, 있어요?”

“있을 리가.”

혹시나 해서 주머니를 뒤적이긴 했지만, 역시나 카드 말고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함께 있으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며 한글이 애써 훈훈하게 포장을 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분홍이 맞받아치며 아옹다옹하고 있는데 무언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넋을 잃은 듯한 분홍의 모습에 한글이 덩달아 멈춰 섰다.

“왜 그래요?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이럴 수가!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이한빛.’

바깥에서 보니 영 딴판이었다. 그때는 비슷한 의상을 입고, 비슷한 메이크업을 해서 그런 걸까?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이, 점차 몸이 굳었다.

‘거기서 형이 사고를 당했어요!’

아직도 수화기 너머로 언성을 높이던 과거의 목소리가 생생해서. 하필 마지막 모습이 그거라서.

회귀 이후에 수없이 많은 상상을 했다.

만일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옳은 걸까?

이대로 모른 척 지나칠지, 그게 아니라면 반갑게 인사를 할 수도 없는 처지인데 말이다.

‘아직은 접점이 없어 모르는 사이기도 하고……,’

고민하며 손톱을 물어뜯는 사이 사라졌다. 허망하게 작아진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바닥으로 눈을 돌렸다.

이한빛이 한참이나 보고 서 있던 홍보 인쇄물이 눈에 띄었다.

[급구. 버스킹 지원자 모집!

열정 있는 가수 지망생들의 많은 지원 기다립니다^^]

문구 뒤에는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 있었다.

“보나 마나 열정 페이…….”

선배님이 옆에서 구시렁거리는 게 들리긴 했어도…….

“버스킹.”

단지 세 글자에 분홍은 이미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누군가 밟고 간 흔적이 선명한데도 말이다.

바닥에 떨어진 더러운 종이를 주워 든 뒤에 소중하게 챙기기까지 했다.

“있잖아요. 선배님.”

“……?”

한참을 망설이던 분홍이 머릿속의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노래, 아예 라이브로 녹음을 하는 게 어떨까요?”

비록 한글은 별 관심 없이 지나친 홍보물이었으나,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분홍이 평소와는 다르단 걸 이미 눈치챘다.

함께하기로 한 밴드부의 의견도 들어야 하고, 아무래도 자기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지라 한껏 신중해진 한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자 분홍이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때, 저한테 바깥에서 노래하는 것부터 익숙해지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시도 했고.”

“네.”

아무래도 녹음실에선, 재량껏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항상 프로듀서의 정해진 가이드 그대로, 거기에 맞춰 목소리를 내던 기억이 전부라서.

당연히 선배님이라면 제게는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을 걸 알지만, 어떻게 보면 일종의 강박 같은 거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이왕 녹음해야 한다면, 차라리 야외에서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정말로 거리공연을 해 보고 싶기도 했고. 실은 그 열정이 가장 컸다. 주먹을 꽉 쥐긴 했어도,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실은 도망치지 않고 무언가를 해 보고 싶어서요.”

검색해 보니 불꽃놀이 공연의 일정은, 오늘부터 시작해 다음 날까지 계속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하루라도 번 게 어디냐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얼른 ‘클로버’ 밴드부 일원들과 상의해 보자고 한글이 재빨리 연락을 취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냈다.

“제가 리더니까. 소집해서 잘 얘기해 볼게요. 어차피 다들 근처에 있으니까.”

왜 잔뜩 신났나 했더니. ‘오오라’ 그룹 내에서는 막내였는데, 밖에서는 앞장서서 무언갈 이끌어서 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니 신이 난 모양이었다.

한 마디로 임시직이지만 완장을 차서 기뻤다는 거다.

‘리더까진…….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클로버’ 밴드부의 일원들도 그렇게 여길 것 같아서, 굳이 자기까지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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