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하기 싫어요-101화 (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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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계속해서 그 아이 생각을 했다.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슬슬 추워지고 있었으니, 이한빛이 세상에 이름을 알릴 때가 오고 있었다.

그건 곧 그해 겨울을 강타한 오디션의 붐이 돌아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필 마주친 곳이 이곳이라니, 참 이한빛답다 해야 할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전에도, 노래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분홍은 한빛을 여기서 마주한 것도,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오한글과 김분홍, 클로버의 밴드부 일원들까지!

때마침 하나의 자유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물감들이 죄다 이곳에 모였으니.

어쩌면 기회가 주어진 상황에서, 모른 척 상황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교복을 입은 채 길거리 공연의 무대를 보던 지난날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때. 작은 소원을 빌었던 게 생각이 났다. 결코 이루지 못할 거라 여겨서 더 애틋하게 느꼈던 그때 그 감정이.

‘……고 싶다.’

…….

‘……하고 싶다.’

분홍은 그 작은 소년의 간절했던 바람을 현재의 자신이 이뤄 주기로 했다. 그때보다 시간이 흘렀으니, 그때보다는 조금은 어른의 모습에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지금 여기서 노래하고 싶다!”

분홍이 뱉은 진심 어린 말에 한글이 씩 웃었다.

“공연하자는 거죠? 그거 좋죠.”

그새 통화를 마쳤다며 선배님이 후배를 위해 모든 상황을 정리해 줬다. 형들도 오케이래요. 다른 사람들이 무대를 하는 모습을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다며 오히려 좋아했다고 한다.

분홍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갑자기 제안한 것 같아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이걸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한글이 결국 입을 열었다.

“분홍 씨도 아시다시피 작곡이 먼저 끝났잖아요. 합주, 혹시나 해서 얼마 전부터 미리 맞춰 보고 있었거든요.”

예상보다 무대를 이른 시기에 하게 되긴 했지만.

덧붙인 선배님의 뻔뻔한 말에 어이가 없어진 분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헐. 역시 사기꾼이었어.”

“에이, 일부러 말 안 한 건 아닌데. 그나저나 분홍 씨가 괜찮아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해야 하잖아요.”

“저야 뭐. 어차피 제가 직접 쓴 가사니까, 이미 다 외웠어요.”

한글이 얼른 ‘도로시’의 가이드곡을 완성해서 넘겨 주겠다며 여기저기 바삐 연락을 돌렸다.

그렇게 모두를 소집했다. 몇 번 맞춰 보며 감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밴드부실로 모였다.

분홍의 가장 빛나는 장점인 ‘노력’이 여기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날 공연인데도 쉬지 않고 연습해서, 밤새 완벽하게 곡을 숙지했을 때쯤,

‘…….’

동이 트기 시작했다.

‘결국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다음 날이 왔구나.’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히며 흔들렸다. 그날, 함께 공연하기로 한 이들이 다 같이 모여 서로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당연하게도 한글이었다.

“그럼 오늘 잘해 보죠!”

씩 웃으며 손뼉을 치자 엉겁결에 분홍도 따라 쳤다.

* * *

어차피 단발성 공연이라 소속사로부터도 별문제 없을 거라고 확답을 받았고, 고작 하루 만에 즉흥적으로 계획한 것치고는 순탄하게 풀리는 편이었다.

다만 야외에서 녹음해야 했기에 날씨가 중요했는데, 다행히 비나 구름에 대한 일기 예보는 없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무대를 하게 되다니!

일생에서 절대로 시도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하게 되니 스스로가 낯설었다.

원래의 계획적인 분홍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으나, 곁에 한글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손톱을 뜯으며 분홍이 중얼거렸다.

지금에라도 도망간다고,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한글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동안은 넘어갔지만, 이번이라면 책임감 없고 이기적이라며 그를 질책하지 않을까?

그때였다. 한글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러면서 이마에 손을 대보는데, 그 태도에 선배님에게 더더욱 미안해진 분홍이 고개를 푹 숙였다.

“…….”

“혹시 어디 아픈 거면 공연은 나중으로 미룰까요?”

다른 그 무엇보다 분홍 씨 건강이 최우선이라며 한글이 그를 다독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럴 수가 없었다.

동시에 이번에 도전하기로 한 일에 시작부터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이번만큼은, 도망치지 않고 어떻게든 반드시 꼭 해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니요. 해 볼래요.”

여러 번 심호흡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연 장소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면서, 그동안의 어두웠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하나씩, 정리하듯이 말이다.

회귀 전부터 시작해서 회귀 이후까지 모든 기억을 떠올리며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다 지난 일이 되었네.’

홍보 인쇄물을 통해 알게 된 번호로 미리 연락을 넣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관리인이 사무적인 어조로 대응했다.

서류에 뭔갈 끄적이다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더니 뚫어지라 그를 응시했다.

“오늘 공연하기로 하신 분이죠? 어…….”

선배님은 공연 전에 어딘가 들러야 할 곳이 있다고 가 버리고. 신청서를 낼 때는 ‘클로버’ 밴드부의 일원과 김분홍만 있었다.

하필 그중 분홍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그동안 한글이 있을 때는 워낙 그의 존재감이 강렬해서 몰랐는데, 저 또한 무리에서 제법 튀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하필 모자를 쓰지 않고 와서, 뒤늦게 자신의 옷차림을 살핀 분홍이 머쓱하게 웃었다.

신인 아이돌인 블랙의 김분홍을 곧장 알아보진 못했으나, 한글이 주연인 드라마를 본 모양이었다.

그에게 혹시 연기자냐고 물었으니 말이었다. 잘생겨서 일반인은 아닐 것 같다며 덧붙이는데, 흑발로 염색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분홍은 생각했다.

연신 아니라고 손을 젓자 흥미를 잃은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인을 하라고 서류를 그들에게 넘겨줬다.

분홍이 머쓱하게 그걸 받아들었다.

“아. 네.”

전처럼 눈에 띄는 색이었다면 바로 들켰을 텐데, 그나마 얌전한 색이라 그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일단 신청은 ‘클로버’의 밴드 공연이 있는 걸로 해뒀다. 리허설을 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서 그곳에 다 함께 모이기로 했다.

야외긴 했지만, 워낙 이른 시간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몇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한글이 멀리서 뛰어왔다.

“저 왔어요!”

커다란 모자로 감싸, 꽁꽁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보자마자 입꼬리가 올라가며 분홍이 반갑게 인사했다.

“분홍이가 참, 한글이를 좋아하네.”

그들을 유심히 보고 있던 ‘클로버’ 밴드부 일원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러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당황한 분홍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한글이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 그래 보여요? 그런데, 사실 제가 더 좋아해요!”

그 주장에, 차마 소리 내어 반박하지 못하고 분홍은 생각했다.

‘아닌데. 내가 더 좋아할 텐데.’

선배님의 격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사랑을 배웠다고 주장했으면서, 아직 한글은 모르는 게 참 많았다.

어떻게 보면 이런 일에 있어서는 자신이 선배니까. 천천히 알려줘야겠다고 분홍은 생각했다.

헐레벌떡 뛰어온 한글이 숨을 고르며 천천히 설명했다.

“여기는 리허설을 하기 위해 임의로 만든 곳이고, 실제 우리가 공연해야 하는 장소는 불꽃놀이 하는 장소랑 가까워요.”

축제는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공연하게 되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전이라 했다.

“그럼 몇 시간 남지 않았네요. 공연하기까지.”

그럼 마저 연습하러 가자고 분홍이 나서서 얼른 사람들을 움직였다. 대충 장비를 설치하고 녹음이 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번 음향을 살폈다.

얼마 남지 않은 무대로 인해 긴장되는 게 분홍만은 아닌지, 다들 떨려 하는 게 보였다.

한글조차도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잃고 긴장한 듯 보였으니까.

“우와. 무슨 공연하는 거예요?”

지나가는 구경꾼들이 호기심으로 물을 때마다 한글과 분홍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가능한 애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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