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화 (프롤로그) (1/128)

#1. 프롤로그

며칠 동안 폭우가 계속 이어졌다.

바닥에 고이기만 했던 물웅덩이는 곧 발목을 차고 올라왔다. 지반이 낮은 곳은 이미 허리까지 물이 찼다. 불행스럽게도 기상학자들은 비가 계속될 거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불행은 항상 들어맞았다. 마을 사람들은 집 안의 물을 퍼내기 바빴지만, 야속하게도 비는 계속 이어졌다.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된 폭우에 황제까지 나섰다. 황궁 마법사들까지 불러 오랜 회의를 끝냈지만,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위대하다고 알려진 황궁 마법사라고 해도 정원에 넘치는 물도 아닌,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히나는 비를 맞아 축 처진 붉은빛이 맴도는 갈색 머리를 쭉 짜냈다. 그런다고 가벼워질 머리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찝찝했다.

우비로 감싼 몸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발목까지 찬 물을 헤집고 다니느라 치마 밑단과 신발이 흠뻑 젖었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하늘이 작정하고 퍼붓는 폭우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보통은 황궁 북쪽에 위치한 별궁에서 연구를 하면서 지내셔. 오늘은 계속된 폭우로 홍수를 막기 위해서 나오셨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나라 하나를 없앨 수 있다는 다소 과장된 소문까지 나도는 대마법사라고 해도 이 정도의 폭우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시녀장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끝을 흐렸다.

“이곳이다. 여기 계시면 곧 나오실 거야.”

야외의 커다란 원형 경기장과 이어져 있는 육중한 문 앞에 다다르자 시녀장이 걸음을 멈췄다. 성정이 괴팍하기로 자자한 대마법사의 시중을 하게 된 히나가 걱정되는지 시녀장의 눈에 연민이 비쳤다.

“저…… 제가 모셔야 할 분의 용모라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말하렴.”

걱정이 되지만 대마법사와 부딪히고 싶지는 않은지 시녀장은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났다.

“진짜 들어와 버렸네.”

히나는 아련한 눈으로 시녀장이 사라진 방향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녀장이 돌아올 기미는커녕 누가 올 것 같지도 않은 조용한 복도는 무척 음삼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히나는 곧 시선을 커다란 문 앞으로 돌렸다. 견고하게 닫힌 문을 멀뚱히 보기만 하던 그녀가 잠시 주변 눈치를 보더니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선대 황제가 야외에서 벌어지는 호화로운 구경거리를 좋아하여 만들어졌다는 야외 경기장, 프라코프.

화려한 싸움이나 승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지금의 황제는 지금 이곳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 대마법사를 불러 어마어마한 마법을 벌이기 위해 황제는 이곳을 찾았다.

우우웅―

문에 닿은 귀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웅장한 울림소리에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주변을 몇 번이고 확인한 후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작은 틈으로도 경기장 안쪽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었다. 황궁 마법사 특유의 하얀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 여럿과 황제로 보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남자, 그리고 황제를 모시는 제국의 호위 기사들과 시종들이 보였다.

호위 둘이 폭이 넓고 커다란 우산을 들고 황제가 비를 맞지 않도록 받치고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히나는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그들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했다. 훤히 뚫려 있는 하늘 위로 무겁고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히 보였다.

그중 유독 튀는 사람이 있었다. 황궁 마법사들이 입는 하얀 제복이지만, 모양이 살짝 달랐다. 커다란 남자의 키보다도 더 긴 지팡이에 하얀 제복 위로 유난히 튀는 금박의 띠가 둘러져 있었다. 그래서 눈에 띄는 것도 있었지만, 그 남자가가 한눈에 들어온 이유는 달리 있었다.

남자의 주변은 마치 공간이 어그러진 것 같았다. 기이한 힘을 뿜어내는 남자를 보자마자 히나는 단번에 그가 대마법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녀장의 말대로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그에게서 풍겨졌다.

‘생각보다 젊잖아?’

젊어도 너무 젊었다. 황제가 여럿 뒤바뀌는 동안에도 황궁의 대마법사 역할을 오랜 시간 해왔다고 치기엔 그는 많이 쳐 봤자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잿빛 머리칼과 수려한 외모는 꼭 동네 마담들을 꾀어내며 지내는 한량처럼 훤칠하였다.

“비만 없애주면 되는 거겠지요?”

길게 한숨을 내쉬는 대마법사의 얼굴은 밖의 상황과 다르게 천하태평이었다. 조금은 귀찮아 보이기까지 했다.

“자네는 대마법사라고, 대마법사! 이왕이면 마을에 잠긴 물도 좀 빼주지?”

“언제는 힘쓰는 모습 보이지 말라고 별궁에 박아둔 거 아닙니까?”

“잔말 말고 빨리 안 하나? 한시가 급하네.”

“네에, 그렇게 하지요.”

황제에게 존대를 하고 있지만 전혀 공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투덜대는 모습이 꼭 집안일을 하기 싫어서 도망 나오는 망나니 남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익숙한 일인 모양인지 다소 무례한 대마법사의 태도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과연 대마법사가 어떤 마법을 부릴지 주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대마법사가 하늘을 보며 굵은 지팡이를 허공에 한 번 휘저었다.

쿠르릉. 번쩍.

감히 마법사 따위가 날씨를 좌우하려는 것에 분노라도 하는 듯이 하늘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낮임에도 햇빛 하나 들지 않던 캄캄한 주변이 번쩍하자 히나는 몸을 살짝 떨었다. 아직도 천둥 번개는 조금 무서웠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대마법사가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높이 들었다. 그러자 그 위에 검붉은 빛깔의 작은 빛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 얼굴보다도 작은 빛은 순식간에 커졌고, 그 빛이 마치 불길하기 짝이 없게 보이는 또 하나의 다른 태양같이 보였다. 하늘 위로 검붉은 빛이 치솟으며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커졌다.

“어어?”

히나는 몰래 훔쳐보는 것도 잊은 채 놀란 신음을 흘렸다.

붉은빛이 감도는 형형색색의 작은 빛이 비구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붉은빛은 순식간에 넓게 퍼졌고, 곧 거대한 빛이 되었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커진 붉은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비구름을 삼키고 있었다. 그래, 저건 삼키는 거였다. 그 단어 외에 다른 표현으로 저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하늘 위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하게 안개가 끼기 시작할 때쯤, 조금씩 빛이 들어왔다.

붉은빛을 하늘에 비추는 건지, 아니면 비구름 뒤에 숨어 있던 태양이 땅을 비추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따뜻한 빛이 주변을 비추고 바닥에 떨어지는 물줄기가 사라졌다. 정말로 비가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짓말처럼 나온 햇빛이 축축한 땅을 비추었다. 이 정도 햇빛이라면 어지간한 물웅덩이는 금방 마를 것이다. 물론 발목까지 올라옷 빗물이 모두 마르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떻게 했는지 가서 묻고 싶었다. 히나는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모든 사람들을 시름에 앓게 한 비를 어떻게 없앤 건지 물어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히나는 간질거리는 입을 틀어막으며 다른 손으로 문손잡이를 꽉 틀어 쥐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문을 활짝 열고 뛰어갈 것 같았다.

“자네, 어떻게 한 건가?”

다행히 궁금증을 참지 못한 황제가 그녀 대신 물었다. 가서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를 없애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비구름을 불로 전부 증발시켰습니다만.”

증발? 즈응발?

히나는 자신이 증발이란 단어를 잘못 알고 있나 싶어 다시 한 번 증발이란 단어의 뜻을 떠올렸다. 하지만 처음 생각해 냈던 뜻 외에는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증발시키는 것처럼 한 게 아니라 정말 증발시킨 거였다. 위대한 대마법사는 정말로 비를 그치기 위에 하늘에 있는 모든 먹구름들을 태워 버렸다. 태양 한 줌 가리는 구름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도대체 어느 정도의 마력이 있는 걸까? 살면서 마법사를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그들의 마법은 저기 있는 대마법사에 비하면 아기들 장난 수준이었다.

분명 듣기론 한정된 마력을 넘어 마법을 마구 남용하면, 몸에 있는 생기까지 전부 마력에 빨려 그 자리에서 말라 죽어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대마법사는 아주 멀쩡했다.

조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긴 해도 그건 마법을 쓰기 전부터 그랬다. 단언컨대 구름을 없앤 피로는 절대 아니었다.

한쪽에선 그의 실력을 의심하며 대마법사의 칭호가 아깝다고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대마법사라는 호칭이 그에 능력에 비해 작게 느껴져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광대한 마력을 가진 악마. 악마라는 칭호가 그에겐 더 어울렸다. 잿빛 머리카락과 하얀 옷. 마치 천사로 위장한 것 같은 아름다운 악마의 모습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대마법사의 마력의 정도를 가늠하고 있던 히나는 저 멀리서 황제와 마법사들이 다가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대마법사의 마법에 놀란 것인지 멍한 얼굴로 앞서 걷던 호위가 미처 조금 열린 문틈을 보지 못하고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앗!”

문에 바짝 붙어 있던 히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아픔도 잠시,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황제와 대마법사의 모습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누구냐!”

문 앞에서 몰래 엿보고 있던 작은 여자를 뒤늦게 발견한 호위들이 히나의 목에 칼을 드리우며 외쳤다.

아무리 감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염탐꾼을 미리 발견하지 못하고 황제의 앞에 낯선 여자를 보인 건 중죄였다.

시녀 복장을 한 히나의 정체를 대충 알고 있음에도 기사들은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그녀를 더 강하게 나무랐다.

“저, 저는…….”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히나를 보며 기사들이 그녀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래, 너는 누구지?”

만약 대마법사가 히나의 앞에 다가와 쪼그리고 앉아 마주 보고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끌려 나갔을 것이다.

쿵쾅쿵쾅.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히나는 눈앞에 있는 대마법사를 멍하니 응시했다.

무례라고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멍했다. 뇌리에 울려 퍼지는 심장 소리에 골이 아파왔다.

“전…….”

이건 두려움일까?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머리까지 울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에 소용돌이쳤다.

“그, 그러니까…….”

대마법사는 말을 계속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그녀를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무서웠다. 여자 여럿 울릴 것 같은 잘생긴 남자였지만, 상대는 비구름까지 없애는 악랄하고 포악한 대마법사였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들고 있는 뭉툭하면서도 긴 지팡이가 날이 선 칼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히나는 곧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머금은 채로 숨을 고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저, 전 오늘부터 대마법사님을 모시게 될 히나라고 합니다.”

오기 전에 수십, 조금 과장해서 수백 번도 넘게 반복하며 연습했던 말이었다. 처음 연습했을 때보다도 더 엉망으로 말한 자신의 모습에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역시 실전은 어려웠다.

단지 소개를 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시녀장에게 말해 일에 능숙한 시녀로 바꿔달라고 하지.”

남의 시중을 제대로 못 들을 것 같은 히나의 모습에 황제가 혀를 찼다.

저런 류의 시녀는 실수만 하고 시끄럽게 한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대마법사님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서 하리라. 황제,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닙니다.”

황제를 향해 싱그럽게 한 번 웃어준 대마법사는 다시 히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제복만큼이나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가자.”

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옆에서 황제가 뭐라고 얘기했는지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지금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이 손을 잡아? 말아?

카신 K 로티우스.

소문에 의하면 카신은 성정이 포악한 마법사. 거기다 직접 확인한바로는 무려 폭우까지 멈추게 하는 대마법사다.

이런 악마의 시중을 들라고? 이 악마의 눈을 속이고 대마법서를 찾으라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의 시녀로 왔지만 사실 히나는 첩자의 신분이었다. 대마법사가 가진 엄청난 힘의 근원이라는 대마법서, 그리고 대마법사에게 무한한 마력을 준다는 저 지팡이. 그것들을 훔치는 것이 히나의 본 임무였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히나는 곧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악마 카신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 지금부터 노력하면 성공할 수도 있다. 아니, 꼭 성공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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