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2화 (2/128)

#2.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신의 앞에 향기로운 차가 놓여졌다. 여러 가지 약물이 담긴 병들을 한쪽으로 쭉 밀어놓은 카신은 포근해 보이는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널찍한 책상 구석에 처박아둔 두꺼운 서적을 하나 쭈욱 끌고 온 그가 자연스레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왔다.

넘치도록 향기로웠던 향만큼이나 차는 무척 썼다. 새로운 시녀가 또 조절을 하지 못하고 생각 없이 찻잎을 듬뿍 넣은 것이리라.

보통의 시녀는 방해되지 않게 사뿐사뿐 들어와 차를 옆에 두고 조용히 떠났다. 하지만 이 시녀는 무엇 때문인지 항상 차를 타면 주변을 힐끔힐끔 둘러보기 바빴다.

그러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실망한 얼굴을 하고 싫은 발걸음을 끌며 겨우 밖으로 나갔다.

“맛은 어떠세요?”

하는 행동이 귀여워 그냥 두고 있었는데, 오늘은 말까지 붙였다. 카신은 비스듬히 올라가려는 입매에 힘을 주며 겨우 웃음을 참았다.

“괜찮으신가요?”

별로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지 시녀는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뒤에서 그가 보기 시작하려던 두꺼운 서적을 조금이라도 엿보기 위해 발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쭉 뻗었다. 그 모양새가 꽤나 우스웠다.

저리 티 나는 행동을 몰래 한다고 하는 건지, 히나는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닫으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얼굴만 가리고 완벽하게 숨었다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사실 네 몸은 다 보여, 라고 말하며 숨바꼭질의 재미를 깨트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향이 좋구나.”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자 놀란 히나가 주춤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누가 보나 수상한 것이 분명한데도 정작 본인만 그걸 모르고 있었다.

“글자를 읽을 줄 아니?”

“아, 아니요! 전혀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전부 들린단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찾아낸 날카로운 지적에 히나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긴장한 나머지 너무 큰 목소리로 부정했다.

작은 글씨가 빼곡한 책은 가까이서 봐야 내용이 보일 것 같았다. 지금의 거리로는 무리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결국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수상한 짓을 했다간 들킬 것 같았다.

“대마법서를 훔쳐오너라.”

대마법사인 카신 K 로티우스를 만들어냈다던 대마법서.

히나의 임무는 이곳에서 대마법서를 찾아 훔치는 것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고 카신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그 마법 서적을 손에 넣는 마법사는 또 다른 대마법사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몇 권이나 되는지는 현 주인인 카신 외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갖게 되는 즉시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

책상 위에 있는 두꺼운 서적이 대마법서일 수도 있다. 나중에 방 청소를 할 때 다시 찾아보기 위해 히나는 책의 크기와 얼핏 보이는 표지 끄트머리 색깔을 봐두었다.

‘역시 난 완벽해.’

내용을 보지 못했다고 당황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보기 위해 어떤 책인지 외워두는 뛰어난 순발력에 히나는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냈다. 첩자 일은 처음 해보지만, 자신은 이 일에 꽤나 소질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엔 적응했느냐?”

짙은 녹색, 그러니까 청개구리 같은 색의 양장본에 집게손가락 정도 되는 두께. 청개구리 책이라고 기억해 두면 되겠구나. 청개구리 책.

히나는 카신의 방에 있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앞에 있는 책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서 여러 번 되뇌었다.

“청개구리 색…… 네?”

“청개구리?”

“아, 아니에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죄송하지만 뭐라고 말씀하셨죠?”

“이곳의 생활엔 적응했느냐고 물었단다.”

어떤 책인지 속으로 읊조리고 있던 히나는 속말을 뱉을 뻔한 입을 황급히 가렸다.

다행히 이상한 걸 느끼지 못한 것인지, 카신은 아이에게 미소를 짓듯이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물어보았다. 죄책감이 들게 하는 친절한 미소였다.

‘저 웃음 뒤에 악마 같은 악독한 본성이 있는 거야.’

죄책감 따위는 버려야 했다. 히나는 악독한 마법사에게서 제국을 구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되새겼다.

“아, 네! 물론이지요.”

대마법사의 시녀로 오래 일하기는 무척 힘들다고 들었다. 일단 성정이 포악하다는 대마법사 카신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거기다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황궁 북쪽 끝에 있는 이 별궁에서 외출은 드문 일이었다.

갇힌 건 아니었지만, 갇혀진 생활이나 다를 바 없다.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일을 하는 것보다 아무도 없는 별궁 구석에서 홀로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 더 힘들다고 들었다.

카신은 위대한 대마법사였다. 웬만한 건 다 마법으로 해결했고, 시녀는 실질적으로 필요 없었다. 연구로 어지럽긴 해도 방에는 먼지 하나 없었고, 목욕물은커녕 그가 씻는 것, 심지어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도 보지 못했지만, 그는 항상 단정하고 말끔했다.

처음 별궁에 들어와 목욕물이나 세숫물에 대해 물어봤을 때 됐다고 하는 걸 봐선 대부분의 모든 걸 마법으로 스스로 해결하는 듯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명이었던 시녀가 한 명으로 줄어든 건 그 이유였다. 그는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따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시녀가 하는 일은 고작 차를 타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제국 최고의 대마법사인데, 시녀를 한 명만 두다니. 확실히 수상해.’

듣기론 카신이 시녀로 인체 실험을 하는데, 다른 한 명의 시녀에게 걸릴까 봐 황제가 한 명으로 줄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마법사의 힘이 필요한 황제가 시녀를 줄임으로써 카신이 사람을 갖고 인체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암묵적으로 묵인한다는 거였다.

그 소문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할 일도 별로 없는 한가한 곳에 있어서 편하긴 했다. 조금은, 아니 무척 외롭긴 하지만.

“네가 오래 일했으면 좋겠구나.”

반달로 예쁘게 접힌 카신의 눈동자가 히나에게 향했다. 순간 히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가깝다.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잘생겼다. 살랑거리는 잿빛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티끌 하나 없는 백옥 같은 피부에, 인간의 눈처럼 보이지 않은 신비로운 노란 눈동자.

마법서나 실험에 푹 빠져 있는 늙고 재미없게 생긴 여느 마법사들과는 달랐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엄청 오래 살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젊게 보였다.

두근두근.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카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였다. 그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무서울 정도로.

‘뭐, 뭐야! 설마 마법을 부린 건가?’

마치 육식동물 앞에 있는 초식동물처럼 불안하게 빠르게 뛰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귀가 울릴 정도로 들려오는 심장 소리에 히나는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머릿속에서 위험하다는 경고음이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여기 오고 나서부터 계속 심장이 이상해.’

카신과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하루에 차를 가지고 들어올 때 마주치는 세 번이 전부였다. 하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임에도 그를 마주할 때마다 몸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네, 네!”

꽃게처럼 옆으로 어색하게 걸어가며 히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 이상 있다가는 카신이 자신도 모르게 부리는 이상한 마법에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거의 뛰다시피 방을 나오자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인체 실험을 하는 건가?”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 며칠 방 안에 박혀서 연구만 하길래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어쩌면 카신은 옆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자신도 모르게 인체 실험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시녀에게 인체 실험을 한다는 말이 소문일 거라고 애써 부정했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뭐지? 밥? 아니야, 물일 수도 있어.’

마법을 쓸 때 보였던 기이한 느낌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눈앞에서 마법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상한 약물을 만들어내어 몰래 먹게 했을 가능성이 컸다.

먼지 하나 없는 방이나 손 하나 건드리지도 않고 씻는 걸 봐선 당연히 물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사다. 멀리 있는 물을 바꿔치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마법으로 몰래 물에 이상한 약물을 탔을 수도 있다.

‘내가 속을 것 같아?’

다른 시녀들은 무서운 대마법사가 앞에 있어 불안함에 심장이 뛴 거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넘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이 인체 실험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카신이 원할 때까지 이용만 당했으리라.

‘어떠한 의심도 받아서 안 되고, 위험해져도 안 돼.’

절대 당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시녀로 위장한 스파이였다. 들켜서 만약 배후의 인물까지 걸리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어쩌면 제국인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황제에게 반하는 배후의 조직을 황제의 가장 최측근인 대마법사가 그냥 둘 리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의심하고 신중히 행동해야 해.’

카신의 시녀는 한 달에 한 번, 하루 동안 잠시 궁을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원래라면 시녀가 한 명밖에 없기 때문에 항상 별궁에 상주해 있어야 하지만, 하도 시녀들이 그만두는 사태가 발생해서 황제가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먹을 거에 무슨 약을 탔다면 아예 안 먹으면 되지.’

아무튼 외출을 하기까지 이제 닷새가 남았다. 닷새까지 황궁에 있는 물과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밖에 나가서 몰래 먹을 물과 음식을 가져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꼬르륵.

“하아.”

벌써부터 허기지는 배를 부여잡으며 히나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세상에서 제일 길고 느린 닷새가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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