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별궁에도 우물이 따로 있을 텐데……. 물이 부족했나?”
부족할 리 없었다. 원래 물이 나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카신의 마법으로 가장 깨끗하고 맑은 물이 별궁의 우물에 항상 가득 차 있었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바닥날 일도 없고, 마법을 건 지 오래됐다고 잘못될 가능성도 거의 희박했다. 만약 잘못됐다고 친다면, 방금 히나가 직접 가져온 차도 없어야 했다.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히나의 손목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미세했다. 며칠 사막에서 물을 찾아 헤맨 사람처럼 생기가 돌던 피부는 수분이 쭉 빠진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이, 이제 절 좀 놓아주세요.”
쓰러지려는 히나의 몸을 들기 위해 힘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점점 인상을 찌푸리며 아픔을 꾹 참고 있는 히나를 발견한 그가 그녀의 몸을 천천히 바닥에 내리며 손목을 놓아주었다.
“아, 미안.”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카신이 순순히 사과했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바닥이 반가운지 히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손목이 시큰하게 아파오고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아직까지 몸은 무사한 듯싶었다.
“그래서, 규율까지 어겨가며 밖에 나가 분수의 물을 마신 이유는?”
“저, 저를 괴롭히시니까요!”
“내가?”
“저를 갖고 몰래 인체 실험을 하고 계시잖아요! 인체 실험을 그만두지 않으신다면 전 절대 이곳에 있는 그 무엇도 먹지 않을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지만 그건 그거였고, 후련한 건 후련한 거였다. 끝이 같다면 망설이지 말고 억울함을 호소해도 괜찮으리라.
히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저는 그렇게 쉽게 당하는 여자가 아니라고요!”
연달아 소리를 내지르자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가쁜 숨을 내쉬며 히나가 아픈 손목을 문질렀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가지고 인체 실험을 했단 말이냐?”
흐려지는 초점을 다잡으며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무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작게 웃기 시작했다. 곧 그 웃음은 방 안을 울릴 정도로 크게 변했다.
“모른 척한다고 속을 것 같나요?”
“그래, 그래. 그래서 힘이 그렇게 없었구나. 하지만 그 이상 뭘 먹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카신은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제야 그녀가 한 말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성실한 건 알았지만, 정말 미련할 정도로 성실했다. 황제가 낸 헛소문 중 하나를 듣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일단 그 모든 걸 떠나서 참 웃기는 발상을 하는 히나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정원에 있는 물은 식수가 아니란다.”
그러니까 건강을 챙기는 것보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체 실험에 당하지 않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이 귀여운 첩자는 음식을 먹는 것조차 무서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참은 거였다. 혹여 실험을 당해 첩자인 것을 실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적에게 실험을 당할 바엔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지낸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리라. 스파이로 들어온 이상 목숨을 거는 건 당연했지만, 앞에 있는 시녀는 정말 독특한 발상으로 미련한 것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난 음식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당연히 물에도 말이다.”
“거짓말!”
순둥한 얼굴에 보이는 고집스런 눈매를 보자 카신의 입가에 실소가 머금어졌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무언가에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가진 건.
도대체 어떤 점이 사랑스러운 걸까? 귀염상이긴 해도 절세미인이라는 호칭을 달 정도로 아름다운 건 아니었다.
작은 체구와 불안하게 흔들리는 커다란 눈동자는 꼭 토끼를 연상케 했지만, 카신은 기억도 나지 않은 까마득한 어린아이였을 때 외에는 딱히 작은 동물에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일 수도.’
처음 봤을 때 보였던 그 희미한 능력부터가 눈에 띄었다. 그녀에게서 미세하게 흘러나왔던 빛은 아직도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신비로운 힘이었다. 그래서 히나에게 관심이 생겼다. 황제의 못마땅함을 뒤로하고 히나를 옆에 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우선 뭘 먹는 게 좋겠구나.”
“시, 싫어요! 그런다고 제가 뭘 먹을 것 같나요?”
히나는 머리를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귀가 멍멍했다. 그녀는 카신이 이상한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히나가 도망가려고 주변을 살피는 걸 보며 카신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절대 놀래키려는 의도는 없었다. 정말 순수하게 도망갈 궁리를 하는 그녀를 부른 것뿐이었다.
“으, 으아악!”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귀신이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란 히나가 혼자 소리를 지르다 그대로 쓰러졌다.
카신은 쓰러지는 히나의 몸을 잡으며 안아 올렸다. 굶은 몸으로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다 기절한 모양새가 퍽이나 웃겼다.
“하, 이거 참.”
가볍기 그지없는 무게를 느끼며 카신은 연구실을 나왔다. 처음 히나를 만나 데리고 왔을 때 이후로 처음 방 안에서 나오는 거였다.
있으려면 몇 년이고도 연구실에 박혀 있을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귀찮은 것도 딱 질색이었다.
“심심할 새가 없군.”
황제에게 청을 넣어 시녀를 한 명으로 줄인 건 시끄러워서였다. 여자가 두 명 이상 늘어나면 골이 울렸다. 적응을 한 시녀들의 수다 소리는 무척이나 밝은 귀를 가진 그에게 전부 들려왔다.
한 명으로 줄이자마자 덕분에 지루함을 못 견딘 시녀들이 줄줄이 그만뒀지만 그건 알 바 아니었다. 애초에 시녀가 없어도 그는 상관없었다. 모든 건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여자의 몸이 원래 이렇게 가벼웠나?”
품에 안겨 곤히 눈을 감고 있는 히나를 고쳐 안으며, 카신은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에게 신경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한다는 것이 더 맞으리라.
최고의 마법사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외로움이었지만, 그 시간을 견뎌 또 오랜 세월을 견디자 죽을 만큼 외롭던 감정은 사라졌다. 대신 지독한 지루함과 귀찮음이 그를 괴롭혔다.
편안함. 그리고 안락함.
히나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이었다.
황제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그의 힘의 가장 큰 원천은 어둠이었다. 큰 마법을 쓸 일이 없기 때문에 어둠에 사로잡힌 흑마법을 그리 잘 쓰지는 않지만, 필요할 땐 어쩔 수 없었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닳는 것도 아니었지만, 인간의 몸으로 큰 힘, 그러니까 어둠의 힘을 쓰면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비구름을 없애고 마을을 잠기게 한 물을 전부 없애기 위해 어둠의 기운을 조금 끌어 썼다.
그의 표정엔 그다지 변화가 없었지만, 역시나 찝찝한 기분이 올라왔다. 몸에 이상을 끼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기분이 그랬다.
‘이 힘은…….’
꽤나 길게 가던 그 불쾌한 감정은 아주 짧은 시간에 없어졌다.
히나를 보는 순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영롱한 빛이 가라앉았던 기분을 끌어 올려주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절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카신은 알 수 있었다. 곤두박질치던 기분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건 그 어떤 약으로도 없앨 수 없던 불쾌감이었다.
‘그때 이후로 보이지 않았지.’
얼빠진 표정의 히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자마자 불쾌한 기분이 완전히 없어졌다. 그리고 히나에게서 흘러나오던 그 영롱한 빛도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빛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히나를 데리고 온 거였다. 그 후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던 그 빛은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루하지 않았다. 히나는 빛을 보여주는 대신 지독히도 지루한 감정을 없애주었다.
‘인생이 이렇게나 즐거웠나?’
하루에 몇 번 볼 일은 없지만 잠깐 보는 그 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졌다. 처음 그녀의 어색한 행동과 불안한 시선을 봤을 때부터 즐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무료한 삶에서 게으르고 나태하게만 살았던 그와 달리 히나는 무척 성실했다. 처음엔 그게 신기했다. 그래서 그녀의 숨겨진 힘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관심이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녀의 어리숙한 행동이나 엉뚱함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 모두가 전부 귀엽게 보였다.
몰래 문을 열고서 빼꼼 얼굴을 내미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재미있었다.
카신은 지루함을 달래주는 히나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옆에 두고 계속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 아까운 걸 놓칠 수 없지.’
워낙에 강렬했던 첫 만남 덕분인지 히나의 수상한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황제가 여러 번 서신을 보내 시녀를 바꿔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카신은 몇 번이고 단호히 거절을 했다.
눈치 빠른 황제나 그의 측근들은 히나와 잠깐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아마 그녀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첩자를 감히 황제 따위에게 빼앗길 순 없었다.
“내게 이런 욕심을 만들게 하다니.”
첩자를 뺏길 수 없다니,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진심이었다.
처음 들어와 보는 시녀의 방에 카신은 제 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뭇거림 없이 들어서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덤벙대는 그녀답게 어지러울 거라고 예상했던 방은 의외로 깨끗했다. 깨끗하다기보단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에라도 도망갈 준비를 항상 해놓는 듯했다.
“정말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히나의 신분도 대충 알고 있고, 그녀가 처한 상황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떠날 준비를 항상 하고 있는 그녀에게 섭섭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아니다. 적어도 제 흥미가 완전히 가실 때까지는 그녀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히나가 속해 있는 조직을 뿌리째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의 즐거움을 절대 놓치지 않을 셈이었다.
“네 발로 직접 찾아온 네 잘못이야.”
어차피 그의 힘으로 황제, 아니, 이 제국 자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라 하나 없애는 건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신은 자신의 손을 히나의 얼굴에 가져갔다.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얼굴을 가리자 그는 잠시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치료를 위한 거였지만 자신의 손이 히나의 얼굴을 가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녀를 향한 시야는 항상 열려 있어야 했다.
“아프지 말거라.”
신비스런 빛이 카신의 손에서 히나에게로 내려앉았다. 신비한 빛이 퍼지며 푸석푸석하니 마른 히나의 피부에 생기가 돌았다. 부족했던 수분이 채워지자 불편해 보이던 히나의 얼굴이 다소 편안해졌다.
카신은 저도 모르게 히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부드러웠고,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갈증으로 말라 갈라진 입술로 찬찬히 손가락을 내리는 카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만지고 싶다.’
더, 더 많이 만지고 싶었다. 기분 좋은 이 느낌을 히나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서로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운 것인 줄 처음 깨달았다. 히나는 보고 있을수록 더 아쉬운 아이였다.
“진작 만져 둘 것을…….”
마법으로 몸에 수분은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지만, 며칠 새로 핼쑥해진 볼까지는 채울 수 없었다.
언제부터 굶었는지는 몰라도 성실하다 못해 미련한 그녀가 했을 행동을 상상하며 카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하게 살이 찼던 볼이 야위어 있자 아쉬웠다.
이왕이면 조금 더 살이 쪘으면 했다. 특히 볼이. 그러면 만지는 재미도 더 늘어나리라. 음식이 어디까지 들어가나 직접 먹여주며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음식에 뭘 탈까?’
식욕이 도는 약이라도 만들어 몰래 넣을까, 생각하던 카신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몰래 음식에 약을 타서 인체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그녀의 허무맹랑한 상상은 정말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너를 발견해서 다행이구나.”
눈을 감고 있는 히나를 보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말랑한 볼을 만지던 손을 힘겹게 거두며 카신은 천천히 일어났다. 히나가 일어날 때까지 책이라도 가져와 보면서 시간을 때울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