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목이 말랐다. 미치도록, 죽을 만큼 목이 타들어갔다.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굶주린 배를 안고 억지로 잠을 자려 했을 때 느꼈던 갈증이었다. 이걸 견디지 못해 새벽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분수대까지 뛰쳐나가 물을 마셔댔었다.
손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지만 벌떡 일어나 분수대까지 달려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물을 마시고 싶었다. 당장 실행에 옮기기 위해 히나는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으아악!”
눈앞에 있는 카신의 얼굴에 히나는 소리를 지르며 다시 누웠다. 눈을 꽉 감고 3초를 센 후 그녀는 이번에 한쪽 눈만 조심스레 떴다. 그리고 제 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편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카신을 보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요즘 유행하는 놀이인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카신의 목소리에 히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기를 반복했다.
스파이는 어떤 상황이 와도 바로 대응해야 한다. 지금 이 위기 상황을 넘기기 위해선 놀란 마음을 빨리 진정시켜야 했다.
“아, 아니요! 어째서 여기에……!”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몇 번이고 둘러보아도 히나의 방이었다. 고작 시녀의 방에 주인이 들어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눈앞에 있는 건 정말 카신이었다.
“걱정이 돼서.”
툭.
카신이 읽고 있던 두꺼운 책을 덮었다. 히나의 눈이 자연스레 그의 손에 있는 두꺼운 책으로 향했다.
“저, 저 책은……!”
청개구리 색의 양장본. 거기다 검지 길이만큼의 두꺼운 두께.
히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질하며 커다랗게 뜬 눈으로 책을 가리켰다. 카신이 히나의 시선을 따라 가지고 있는 책을 바라봤다.
“이 책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책을 가리킨 손가락을 당장에라도 부러트리고 싶은 마음을 접으며 히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 아닙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비록 그가 가지고 있는 책이었다고 하나, 일개 시녀가 손가락질을 했다. 거의 황족 취급을 받고 있는 대마법사에게 엄청난 무례였고, 중죄이기도 했다.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큰 실수인 것이다.
‘그러게 왜 여기까지 들어와서는!’
이제 막 깨어나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까먹고 있던 히나로서는 카신이 자고 있는 방에 쳐들어온 불한당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구나. 이 책이 그리도 궁금해?”
책을 한 손에 쥐고 당장에라도 보여줄 것처럼 구는 카신의 행동에 히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히나가 곧 울상을 지었다. 거울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카신은 책을 내밀었다.
꼭 사탕을 쥐고 따라오는 어린아이 같았다. 히나를 볼 때마다 미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괜히 앞에 있는 이 귀여운 시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편히 웃을 수도 없었다.
‘역시 본인은 모르겠지?’
스스로가 완벽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히나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조심성 없는 아이라지만 나름대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 적당히 감정을 숨겨야 했다.
“대가는 네 휴가.”
카신은 책을 완전히 보이자 당장에 일어나 덥석 가져갈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히나를 향해 말했다.
“네?”
“네 휴가를 반납할 때마다 원하는 걸 하나씩 들어주마.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좋단다. 이 책을 보여줄 수도 있어.”
히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휴가는 히나에게 아주 중요했다.
필요한 물품이야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동료 시녀에게 말하면 대부분의 것은 구할 수 있긴 했다.
대마법사가 지내는 별궁의 시녀가 쉽게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긴 했지만, 한 명밖에 살지 않는 시녀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하지만 히나는 밖으로 나가 카신에 대한 보고를 해야 했다.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휴가 때마다 갈 수는 없겠지만, 보고를 위한 은밀한 접촉은 꼭 필요했다.
‘들킬 수도 있으니 중요하게 보고할 게 있으면 오라고 했잖아. 알아낼 거 다 알아내고 가면 되지 않을까?’
휴가를 반납하면 알려준다고 했지만, 무조건 반납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거기다 궁금증을 풀게 해준다고 했으니, 책 외의 다른 것도 물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단순히 호기심 많은 시녀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먼저 제안을 해주는 카신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임무는 완벽히 성공해야 한다. 히나는 단호한 얼굴로 카신이 들고 있는 서적을 쳐다봤다.
“어때?”
얼굴만 봐도 그녀가 반쯤 넘어온 걸 눈치챈 카신은 슬며시 웃었다. 참 알기 쉽고 다루기도 쉬웠다.
“싫다면 안 해도 좋…….”
“반납할게요! 정말 제가 궁금한 걸 말해주시는 거죠?”
“그래, 다 물어보렴. 휴가를 반납하는 수만큼.”
카신은 이로써 아까 느꼈던 불쾌함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쪼잔하다고 누가 욕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시녀를 남과 공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시녀가 설사 첩자라 할지라도.
다른 시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히나에 한해서는 그랬다.
* * *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카신이 하루에 한 번, 별궁에 들르는 시녀에게 직접 어마어마한 요리들을 주문할 때만 하더라도 그가 대식가이려니, 했다.
‘대식가는 무슨.’
평소에 안 먹는 대신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한 번에 식사를 하면 음식을 비축할 수 있는 건가 했던 자신의 순수함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설마 카신의 거의 반협박 같은 명령으로 그와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약속하지. 음식엔 그 어떠한 것도 타지 않았어.”
카신이 자신 있게 말했지만 히나는 믿을 수 없었다. 음식을 옮긴 건 황궁에서 보낸 시녀와 히나였고, 카신은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직사각형의 기다란 식탁 위에 빼곡히 놓인 먹음직스런 음식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저는 같이 먹을 수 없어요.”
시녀의 의무를 내세워서라도 거절을 해야 했다.
“그런 것치곤 배가 무척 고파 보이는구나.”
괜히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히나는 얼굴을 붉히며 주린 배를 문질렀다. 속을 꿰뚫어 보는 카신으로 인해 민망했다.
‘아니, 왜! 어째서! 갑자기 나한테 말을 붙이는 거냐구우우!’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루에 세 번, 차를 마실 때 외에 카신을 만날 일이 없었다. 그는 따로 밥도 챙겨 먹지 않았고, 목욕물을 받거나 방 청소를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다.
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않아 따로 시중을 들 필요가 없었다. 차를 갖다 놓을 때도 대화가 거의 없어서 가끔은 숨이 막힐 때도 있었다.
도무지 카신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어마어마한 식사량을 부탁한 것도, 같이 밥을 먹자는 것도. 그의 시녀로 들어가기 전, 교육을 받았을 때 이런 상황에 대해 결코 듣지 못했다.
만약 카신이 식사를 원한다고 하면 간단한 수프 정도를 끓여서 드리면 된다고만 했다. 같이, 그것도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한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한 사항이었다.
“의심을 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 네 호기심 하나를 여기서 풀어주면 의심을 풀어주겠어?”
호기심?
카신이 말하는 호기심이란, 분명 궁금한 걸 하나 알려준다는 뜻이었다.
히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카신을 쳐다봤다. 인간 같지 않은 짙노란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었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히나에겐 자신의 감정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카신이 우아한 자태로 고기를 먹기 좋게 썰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가 거짓말을 해서 이득 될 것이 없었다.
“정말, 아무거나 물어도 되나요?”
당연히 카신이 먹기 좋게 썰은 고기 한 점은 그의 입으로 들어갈 거라 여겼다. 하지만 카신은 자연스레 그녀의 입가 앞으로 고기를 내밀었다. 마치 받아먹으라는 식으로.
질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히나는 난감한 얼굴로 카신을 쳐다보았다. 눈을 반달로 접은 채 예쁘게 웃으며 그가 무언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아주 곤란한 게 아니라면 대답해 주마. 대신 무고한 나를 더 이상 의심하지 말아다오.”
“그럼요! 전 원래부터 카신 님을 절대, 단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을 전혀 안 한다는 의미로 히나는 앞에 있는 고기를 덥석 받아먹었다.
잔인하고 극악무도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대마법사는 생각보다 착하고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왠지 그를 속이는 것이 많이 미안해졌다.
“그래, 내게 궁금한 것이 무엇이지?”
“그 책! 요즘 계속 읽고 계신 책이 뭔지 궁금해요! 그게, 궁금하다기보다 너무 재미있게 읽으시는 것 같아서…….”
카신은 의심을 받을까 봐 뒷말을 횡성수설 붙이는 것이 더 수상하다고 말해주려다가 말았다.
스스로를 완벽한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히나에게 사실은 네 정체를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녀는 크게 자책하며 도망가 버릴 것이다. 물론 도망가게 두지는 않을 거지만.
“아, 그 책 말이더냐.”
히나는 꽤나 그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 엄청난 마법을 봤으니 그러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세간에 떠도는 소문 때문에 더 그런 듯했다.
그녀에게만은 자신은 무고하다고, 건드리지만 않으면 무해한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꽤나 저명한 작가의 책이라더군. 별로 재미있지는 않아. 폐하께서 재미있다고 추천해 주시는 책들은 사실 다 지루하거든. 보고 싶다면 빌려주도록 하마.”
자연스럽게 히나에게 다시 고기를 한 점 먹이며 카신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에게 뭘 먹이는 것도,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누군가에게 음식을 먹이는 일이 이렇게 재밌을 거라곤 생각한 적 없었다. 하지만 조물조물 움직이는 입술이나 점점 차오르는 볼을 보니 뿌듯함이 몰려왔다.
‘얼마나 더 들어갈까?’
음식으로 꽉 찬 볼을 보던 카신의 눈이 아주 짧은 시간 반짝였다. 하지만 곧 표정을 지운 그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대화에 집중할 때였다.
“아, 글은 읽지 못한다고 했으니, 그건 안 되겠구나.”
“캑!”
글을 읽지 못한다는 거짓말을 들먹이자 먹던 고기가 목에 걸렸는지 히나가 가슴을 두드리며 기침을 했다. 그런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며 카신은 자연스레 물을 건네주었다.
장난이 지나친가 싶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얄궂은 심술이 갈수록 튀어나왔다. 이건 모두 순진한 반응으로 그를 즐겁게 하는 그녀의 탓이었다.
“폐, 폐하께서 주신 책이셨군요.”
“가끔 책을 주고 가시지.”
어깨를 으쓱하며 카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삶이 지루하다는 말을 지나가다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황제는 언제부턴가 그에게 책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하는 책이라서가 아니라 할 일이 없어 읽기 시작했지만 재미있어서 읽는 건 아니었다. 읽지 않고 어딘가에 던져둔 적도 많았다.
“전부 재미는 없지만 말이다.”
그나마 요즘 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히나 때문이었다. 뭘 보고 있기만 하면 뒤에서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쭉 빼서 보는 그녀를 보고 싶어서 손에 잡히는 아무 책이나 읽기 시작했다.
“그럼 평소에는 무슨 책을 읽으세요?”
히나는 실망감을 감추며 물었다. 한 달을 가까이 궁금해했던 책이었다. 너무 허무해서 어깨가 실망감에 추욱 늘어졌다. 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평소에 읽는 책이라…….”
카신은 턱을 괴며 생각에 빠졌다.
히나가 어떤 걸 찾고 있는지,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의도가 궁금했다. 그걸 알아내서 맞춰준다면 더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소문이 자자한 대마법사가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한 건가? 내게 뭘 기대하는 거지?”
너무 물어봤나?
히나는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감히 시녀 주제에 질문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며 비꼬는 건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