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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14화 (14/128)

#14.

한편 카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홀로 다시 내려온 히나는 신기한 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우아하고 고귀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이 자리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아…….”

풀토 공작과 시선을 마주치자 히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지, 히나?”

“아, 아닙니다!”

풀토 공작이 재빨리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계속 보고 있을 뻔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또 볼까 싶어 히나는 고개를 홱 숙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 아니에요.”

“괜찮으니, 편히 말해보렴.”

“배, 배가 고파서요!”

“그럼 뭘 좀 먹을까?”

부드럽게 웃으며 카신은 먹기 좋게 나열된 음식 앞으로 히나를 끌었다. 그러면서 히나의 시선이 닿았던 곳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대마법사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하이엘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자벨입니다.”

“대마법사님, 저는…….”

히나가 응시했던 곳을 보려는 순간 갑자기 몰려든 수많은 인파에 시야가 가려졌다.

처음 파티장에 등장한 대마법사의 인기는 엄청났다. 처음엔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곧 마구 밀려들었다.

대부분이 묘한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는 카신에게 추파를 던지려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대마법사에게 잘 보이려는 귀족들도 꽤 있었다.

“먼저 밖으로 나가겠어? 나도 곧 따라 나가지.”

카신은 난감한 얼굴로 히나에게 속삭였다. 한 번도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그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 하지만…….”

카신은 마법이 걸려 있는 자신의 몸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히나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을 풀어주마. 밖까지 걸을 수 있겠니?”

다부진 얼굴로 곧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은 카신이 곧 히나의 등을 살며시 떠밀었다.

카신의 손이 머리끝에서 떨어지자마자 히나의 몸이 휘청했다. 하지만 곧 중심을 잡은 히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카신에게 살짝 웃어 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후아, 사람들 진짜 많다.”

수많은 인파에 가려져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카신 쪽을 바라보며 히나는 살그머니 홀에서 나왔다.

“멀리 가면 날 못 찾으실 건데…….”

캄캄한 정원은 밀회의 장소였다. 홀 안과 달리 바깥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짝을 이룬 몇 쌍의 커플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어둠 속 곳곳에 보이는 남녀의 모습을 피해 히나는 천천히 걸었다.

“이래선 멀리 가려고 해도 못 가겠네.”

마법이 풀리자마자 가벼웠던 몸이 돌을 매단 것처럼 무거워졌다. 높은 구두 때문에 무게중심도 잡기 힘들었고, 발끝도 저릿하니 아팠다.

“하아.”

결국 발걸음을 멈추고 히나는 벽면에 편히 몸을 기댔다.

“앉아도 되려나?”

이런 값비싸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주저앉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다리가 너무 아팠다.

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정쩡한 자세로 주변을 살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에 몰래 앉으려는 생각이었다.

“들키진 않았겠지?”

“고, 공작님?”

옆쪽 벽면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히나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멍청한 것! 날 아는 척해서 소문이라도 낼 셈이냐? 그대로 앞을 보고 있거라.”

그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려는 순간 호통이 날아왔다.

“죄, 죄송합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히나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 미덥지 못한 건지, 풀토 공작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거지? 왜 네가 대마법사와 함께 파티에 왔냔 말이다.”

지금 히나를 만나는 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풀토 공작은 한시가 급했다.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던 대마법사가 히나를 데리고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도 전속 시녀로 데려온 것이 아닌 남부럽지 않게 한껏 꾸며서. 그녀는 귀한 귀족 영애보다도 더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카신은 히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신이 히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파티에 온 모두가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카신 님이 파티에 오지 않으려 하니 저라도 오라 하셔서……. 어쩌다 보니 카신 님도 절 따라오시게 됐어요!”

한낱 시녀를 위해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파티에 오다니.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가 직접 히나를 초대한 거라면 황제 또한 그녀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안 했겠지?”

“네, 절대 들키지 않았어요.”

능구렁이처럼 굴지만, 황제는 무척 의심이 많으며 교활하고 잔인했다.

황제는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발을 빼는 아주 신중한 사람이었다. 만약 히나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었다면 진작 그녀를 잡아다가 고문을 했으리라.

카신의 강경한 보호로 히나가 루이스에게 끌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풀토 공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대마법사가 히나에게 진짜 관심을 두고 있는 모양이야.’

황제가 대마법사에게 쏟는 정성은 엄청났다. 거의 기밀이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마법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주 찾아가 말 상대까지 하는 판이었다. 그것도 시간을 허비하는 걸 무척 아까워하는 황제가 친히 발걸음을 해서 말이다.

“안 그래도 공작님께 드릴 말이 있었어요.”

“뭐지?”

당연히 무언가를 알아낸 거라 여긴 풀토 공작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저기…… 그러니까 폐하도 그렇고, 대마법사님도 그렇고 두 분 다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아요. 비록 눈이 어두워 통치를 잘하진 못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풀토 공작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얼마 전에도 세금이 올라갔다. 황제는 그 세금으로 지금의 탄생 파티를 연 것이지.”

“저, 정말인가요?”

“이번 파티로 수많은 백성들은 굶어 죽게 생겼어.”

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풀토 공작은 그 모습을 보며 몰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히나, 앞으로는 날 찾아오지 말거라.”

“네? 그게 무슨…….”

풀토 공작은 지금이 아니면 히나를 만나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는 히나를 따라 나온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앞으로 황제가 대마법사가 있는 별궁으로 더 자주 찾아올 게다.”

“그걸 어떻게…….”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항상 공중에 뜬 것 같은 자유분방한 대마법사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황제였다.

뱀처럼 교묘하게 이용하길 잘하는 황제가 대마법사가 각별히 여기는 시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니 파티에 초대도 한 것이리라.

‘별궁 밖으로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 대마법사가 히나를 지금까지 옆에 둔 것도 모자라 친히 파티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여간 특별히 여기는 게 아니야.’

이렇게 좋은 기회는 평생에 있어 오지 않을 것이다. 관심을 받고 있으니 의심을 사는 건 시간문제였다.

만약 대마법사에게 의심을 산다고 해도, 신임하는 시녀를 의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상대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교활한 황제는 위험에 대한 감이 너무 높았다. 대마법사가 특별히 여기는 시녀에게 조금만 관심을 갖는 것으로 히나의 정체는 금방 드러날 것이다.

“네가 아무리 잘하고 있다 한들 황제까지 속이는 건 무리다. 대마법사는 몰라도, 황제에겐 네 정체를 곧 들킬 수도 있겠지.”

일을 서두르면 그르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빠르게 해치우는 방법이 더 좋을 때가 있었다.

풀토 공작은 히나를 어떻게 이용하고 버릴지에 대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 그럼 전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리숙할 것이 분명한 새장 속의 대마법사라면 몰라도, 뱀처럼 교활한 황제가 모를 리 없다. 시간을 끌면 불리했다. 이건 시간 싸움이었다.

“다음에 황제가 오면 그때 준 약을 황제의 차에 타거라.”

“하지만 전 폐하를 자주 뵙지도 않고 아직 딱히 신뢰를 얻은 것도 아니에요.”

다음에 카신을 보러 오는 황제를 당장 죽이라는 말에 히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우물쭈물 말했다.

“네가 아무리 지금까지 잘하고 있다고 해도 자주 오는 황제를 속이기까진 힘들게다. 눈치 빠른 황제는 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바로 이상한 걸 깨달을 게야.”

“그래도 이제껏 대마법사님께도 들키지 않았는데…….”

“원래 황제가 될 분의 자리를 빼앗을 정도로 지금 황제는 눈치나 행동이 빠르지. 제아무리 네가 완벽히 굴어도 황제의 관심까지 받으며 속일 순 없어.”

히나는 루이스를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묘하긴 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항상 차가웠다. 가끔 자신을 훑어보는 눈이 꽤 날카롭기도 했다.

풀토 공작이 왜 이렇게 조심하라고 당부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대마법서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느냐?”

“네? 아, 네! 얼마 전에 대마법서를 봤어요.”

“정말이냐? 그럼 황제를 죽이고 대마법서와 지팡이도 훔쳐 오거라.”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히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묻자 풀토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새 마음이 약해진 것이냐?”

“아, 아니에요!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불안해하는 히나에게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풀토 공작은 심각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참, 네 부친이 많이 위독하다고 오늘 연락이 왔더구나.”

“아, 아버지가요?”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구르며 살아왔다. 순진한 아이 하나 꿰어내는 건 풀토 공작에게 일도 아니었다.

대답을 하면서도 망설임이 가득한 히나의 속을 꿰뚫어 본 풀토 공작은 거짓말로 태연하게 그녀를 속였다.

“내가 도와주어 고비는 넘겼지만, 또 언제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지.”

히나는 보기 드물게 성실한 아이였다. 그만큼 이용하기 쉽기도 했다. 풀토 공작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이번에 황제가 세를 대폭 올리는 바람에 그걸 무리하게 내려다가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모양이야.”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부친이 아프다는 말에 히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지,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의사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하더구나. 히나, 황제를 죽이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네 아비를 위해 대마법서만이라도 꼭 훔쳐 와야 한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히나의 얼굴에 망설임이 사라지고 단호한 의지가 서렸다.

“네가 임무를 서둘러 끝내준다면 내가 끝까지 네 부모를 책임지마.”

“감사합니다, 공작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네가 임무만 제대로 수행해 준다면 된다. 나는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너로 인해 네 가족들도 행복해지면 되는 거야.”

“네!”

히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혼자 신이 나서 웃고 있는 사이에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었다.

‘이게 다 황제 때문이야. 믿고 싶진 않지만, 황제는 정말 나쁜 사람인 거야.’

세금을 올린 황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았을 것이다.

커가면서 봤던 피폐한 환경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카신의 시녀가 되기 전부터 그들을 구해주고 자신도 구원을 받고 싶었다. 풀토 공작은 황제가 죽거나 카신의 대마법서만 있으면 모두 해결될 일이라고 했다.

‘만약 대마법서를 훔치고 또 다른 대마법사가 여럿 등장하면 카신 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걸까?’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부친이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묵직하게 아팠다.

‘난 정말 나쁜 아이야.’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그쳐도 망설여졌다. 카신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할 임무만 생각하자.’

히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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