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카신의 몸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툭. 또르르.
지팡이를 손에서 놓친 앨버트는 처음으로 자신이 마법사인 것이 후회됐다. 바닥에 굴러가는 지팡이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앨버트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엄청난 마력!’
마력은 마법사만이 느낄 수 있었다. 불결하기 짝이 없는 위험스러운 마력이 카신에게서 끝을 모르고 흘러나왔다.
그 안에 있던 몇몇 마법사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한대로 증폭되고 있는 마력에 앨버트 또한 당장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를 떨고 있었다.
“보, 본 적도 없어.”
보통 마법은 불, 물, 바람, 대지 등 자연의 속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카신이 뿜어내고 있는 마력은 그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의 마력이었다. 눈앞에 있는 마력은 꽤나 많은 공부를 하고 마법을 본 앨버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건 마치…….
“어둠…… 어둠의 마법이라니…….”
카신의 마법은 어둠, 그 자체였다.
“히나,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야 한다.”
찌이익.
카신은 길게 늘어진 자신의 소매를 쭉 찢었다. 그가 찢어진 소매로 껌뻑이는 히나의 눈을 가리며 질끈 묶었다.
“내가 화를 더 내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알겠지?”
히나가 무의식적으로 다시금 끄덕였다. 이미 넋을 놓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고개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렴. 아무것도 보아서도, 생각해서도 안 돼.”
그가 손을 놓자마자 히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 전부터 풀려 버린 다리는 주인이 넘어진 것도 모르는 듯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카신은 그녀가 보지 않길 바랐다. 그녀만큼은 그에게 공포심을 느끼며 도망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카신은 주저앉은 히나의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끝에서 새어 나온 검은 기운이 그녀의 몸을 둥글게 감쌌다.
“나의 대마법서와 지팡이라.”
히나에게서 하늘이 무너져도 멀쩡할 보호 마법을 걸어둔 카신은 곧바로 몸을 빙글 돌렸다.
“다 부질없는 것을.”
풀토 공작과 앨버트 앞에 있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며 구석까지 도망쳤다. 몇몇은 서 있을 힘도 없어 카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바닥을 짚고 기었다.
“안됐지만, 대마법서는 세상에 없어.”
바닥에 내팽겨진 가짜 대마법서가 허공으로 올라왔다.
파앗.
가짜 대마법서가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되며 사라졌다.
마법진을 구현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않았다. 고작 종이 뭉치에 불과했지만, 먼지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에 앨버트가 몸을 벌벌 떨었다.
“그, 그럴 수가…….”
엄청난 기운이었다. 지금 카신이 내뿜고 있는 마력이라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짜 마법서처럼 먼지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질 수도 있었다.
“대마법서에 대한 소문을 낸 건 황태자 시절의 루이스지.”
황제의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것은 카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조차 있다고 하지 않으면 괴물이라며 다들 내게 손가락질을 할 거라더군.”
털썩.
그 소리를 듣자마자 풀토 공작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마법사 힘의 비밀이 대마법서라는 것은 최근 몇 년 전에 밝혀진 사실이었다. 진위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채 풀토 공작은 은밀하게 도는 그 소문을 당연히 믿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앨버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온몸을 감싸는 공포가 목을 옥죄어왔다. 방금 전 호기롭게 지팡이를 휘둘던 앨버트는 두려움 가득한 두 눈으로 카신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전부 죽이지 말라 했으니, 지금 죽이진 않을 거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가 무릎을 꿇은 채 빌고 있는 앨버트에게 잠시 머물렀다.
“한데 되도록 멀쩡히 데리고 가야겠지만, 지팡이가 없어서 확답을 줄 순 없을 것 같구나.”
“으, 으아아악!”
앨버트의 몸 주변에 어둠이 덮쳤다. 괴물이 먹잇감을 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둠이 앨버트의 몸을 먹고 있었다.
벌레가 살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어둠은 아주 조금씩, 가장 고통스럽게 앨버트의 온몸을 덮으며 갉아 먹었다. 팔다리를 움직여 떨쳐 내려 해도 어둠은 끈덕지게 그를 삼켰다.
“풀토 공작.”
시큰둥한 얼굴로 앨버트가 어둠에 잠식되는 걸 지켜본 카신의 시선이 이번엔 풀토 공작에게 향했다.
도망가기 위해 눈알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던 풀토 공작은 몸을 움찔 떨었다.
“히나의 부모는 어딨지?”
저음의 목소리는 끔찍한 비명을 뚫고 공작의 귀에 박혔다.
“히나를 어디서 데려왔나?”
“그, 그것이…….”
거짓을 말한다면 당장 어둠과도 같은 괴물이 나타나 자신도 삼킬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사람이 저렇게 죽을 수도 있다니. 단연 태어나서 결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서 있다고 말해.”
바들바들 떨며 사실대로 말하려던 풀토 공작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의 부모는 확실히 있는 거겠지?”
거짓을 말해도, 사실을 말해도 죽는다.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풀토 공작에게도 불결하고 위험스러운 어둠의 기운은 뼛속까지 느껴졌다. 마력을 느끼지 못해도 이 끔찍한 것에 위협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하.”
옅은 한숨과도 같은 탄식이 카신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풀토 공작의 반응을 예상했지만, 그래도 실망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 살려주시오!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날 살려만 준다면…… 으아아악!”
카신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동시에 앨버트처럼 풀토 공작의 몸에도 어둠이 덮쳤다.
쾅!
포격이 일어난 것처럼 거대한 소리와 함께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쾅쾅!
허물어져 내려가는 건물 사이로 세찬 빗줄기가 쏟아졌다. 건물을 씹어 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와르르, 소리와 함께 천장이 종이처럼 구겨지며 무너졌다.
건물의 파편이 여기저기 떨어졌고,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파편을 피해 도망쳐 댔다.
깊은 지하까지 내리는 빗줄기에도 카신의 몸은 젖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하듯 카신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히나에게 걸어갔다.
“히나.”
불쾌감이 밀려왔다. 역시 어둠에 관련된 힘을 쓰면 기분이 저조해졌다. 다른 이유와 겹쳐지며 최악이 되어버린 기분은 히나를 봐도 그리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났다.”
히나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둥글게 감싸고 있던 어둠의 보호막이 스르륵 사라졌다.
분풀이로 모든 것을 박살 내고 싶었다. 그 전에 마법진을 펼쳐 돌아가야 했다. 히나에게 나쁜 기억을 이 이상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만 돌아…….”
팍―
말이 채 다 나오지 못하고 입안에 머물렀다. 무미건조하던 카신의 눈이 곧 커졌다.
“이건…….”
히나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보다도 더 강하고, 영롱한 기운이었다.
최악을 달리던 컨디션은 히나에게서 나오는 강력한 빛으로 순식간에 정화됐다. 언제 흑마법을 썼냐는 듯이 몸이 가벼웠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졌다.
‘도대체 무슨 힘이지?’
기분 나쁜 기운을 정화시키면서도 그녀가 내뿜고 있는 빛은 어둠인 그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다. 신력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아니야. 비슷한 힘을 본 적 있어.’
카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기억을 되짚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히나에게서 나오는 힘의 출처는 쉬이 찾아지지 않았다.
“카신 님?”
히나가 우물쭈물 입술을 오므리며 작은 목소리로 카신을 불렀다. 눈이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불안한지 그녀가 허공으로 팔을 더듬으며 그를 찾았다.
어느새 히나가 뿜어내고 있던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카신 님.”
겨우 정신을 차린 카신은 히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손이 머리끝에 닿자마자 히나의 몸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강한 벽으로 세상과 단절을 시켜도, 보이지 않아도 허공에 떠도는 불길한 기운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히나는 둔하지만, 본능적인 감각은 좋았다.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카신 님, 괜찮으세요?”
카신은 손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눈을 크게 떴다. 히나가 머리 위에 있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괜찮으신 거죠?”
여자의 손은 언제부터 이렇게 작고 고운 걸까.
“그래, 괜찮다.”
“다행이에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저 입술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카신은 다른 손으로 히나의 턱을 잡고 올렸다.
“하지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구나.”
“많이 화나셨죠?”
풀이 죽은 목소리에 카신은 픽 웃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순진했고, 그는 무척 영악했다.
“그래. 그러니 네가 내 화를 좀 풀어주련?”
화는 진작 풀렸다. 가라앉았던 기분은 그녀의 힘으로 정화됐고, 분노는 그녀의 온기가 닿는 순간 사라졌다. 하지만 카신은 황제만큼이나 영악했다.
“카신 님?”
보이지 않는 앞이 불안했다. 히나는 손을 내려 자신의 턱을 잡고 더듬으며 카신의 손을 찾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아…….”
이마에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닿았다. 히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멀뚱히 서 있었다.
“돌아가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카신이 말했다. 영문도 모른 채 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