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황궁으로 초대가 되었다. 그것도 황제와의 식사 자리에.
히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본궁을 쳐다봤다. 카신이 지내는 조그만 별궁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컸다.
“굳이 원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아도 된단다.”
“어떻게 가지 않을 수 있나요? 폐하께서 부르신 자리잖아요.”
카신이 불만스런 표정을 잔뜩 지어봤자, 히나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눈에 보이게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동경에 휩싸인 눈동자는 본궁을 향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슬퍼하게 놔두는 것보다 복잡한 일을 만들어 그녀의 관심을 돌리는 것이 더 좋겠지.’
하룻밤 사이에 거의 다 아문 상처를 보며 카신은 별궁에서 혼자 계속 슬퍼하던 히나를 떠올렸다.
히나에게 슬퍼할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풀토 공작에게 받은 상처를 없애주고 싶었다.
“그런데 폐하께선 왜 저를 부르신 걸까요?”
카신도 루이스가 무슨 꿍꿍인지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신은 역대 황제 중 가장 친하게 지냈으면서도 제일 알기 어려운 루이스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한 건 루이스가 히나를 이용하여 그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려 한다는 거였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불렀겠지.”
그나마 어릴 때는 귀엽기라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루이스는 황제가 되고 나서부터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수작을 부렸다. 카신은 웃는 낯으로 뒤통수를 치고 가버린 루이스를 떠올리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키지 않으면 무시하렴. 내가 다 막아줄 터이니.”
전부 히나를 위해 한 말이었다. 그는 정말 히나가 내켜하지 않으면 전부 무시하고 그녀를 데리고 나갈 참이었다.
“카신 님은…….”
히나가 몸까지 돌려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그는 미간을 더 찌푸렸다.
“가끔 폐하께 너무 무례하게 대하는 것 같아요.”
단단히 빠졌다. 히나는 독살하려던 것을 완전히 잊은 모양인지, 루이스를 명군이라 칭하며 칭송하고 있었다. 어제의 티타임 이후에 그녀는 루이스의 성품까지도 찬양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는 그의 불편한 심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께선 국정을 돌보느라 항상 애쓰시잖아요. 그러니 카신 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야죠.”
루이스는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누구보다도 탁월했다. 이건 마법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카신은 히나가 루이스를 싫어하게 만드는 약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나는 널 위해…….”
“앗, 도착했나 봐요. 저기 보세요, 카신 님.”
히나가 변했다. 카신은 바로 앞에 보이는 본궁을 가리키며 더 긴장하는 히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디 가둬야 하는 걸까.’
그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차가 멈췄다. 미리 나온 시종의 안내에 따라 성 내부로 들어갈수록 히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당연히 황제 외의 인물은 없을 거라 여겼다. 카신도 그리 생각했다.
“반갑습니다, 카신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카신은 리베리아 후작을 보며 루이스의 의도를 알아내려 애썼다.
“오랜만이군요, 리베리아 후작.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하하! 내가 리베리아 후작을 불렀네.”
호탕하게 웃는 루이스가 이렇게까지 얄미울 줄이야.
“어째서 후작이 이곳에 있는 거죠?”
“초대받지도 않은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아?”
가시가 박힌 카신의 말에도 루이스는 능글맞게 받아쳤다. 오히려 그를 불청객으로 칭하며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정말 쫓겨날 분위기였다. 물론 쫓아낸다고 쫓겨날 만큼 낯짝이 얇진 않지만, 눈앞에는 히나가 있다.
뭐하면 전부 엎어버리는 건 무리였다. 특히나 방금 전에 폐하에게 무례하다고 말한 그녀의 앞에서 말이다.
카신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리베리아 후작, 이쪽이 내가 말한 히나 양이네.”
“바, 반갑습니다, 후작님! 히나라고 합니다.”
리베리아 후작의 시선이 잠시 히나에게 머물렀다.
“오늘 내가 이렇게 자네를 부른 이유는 말일세.”
카신은 퍼뜩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아니라 부정했다. 하지만 항상 이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리베리아 후작의 양녀로 들어갈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야. 히나 양만 허락한다면 여기 있는 라스 피안 리베리아 후작이 그대의 아버지가 되어 앞으로의 위험에서부터 지켜준다는구나.”
“야, 양녀요?”
리베리아 후작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지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다지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싫어하는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 히나는 제 시녀입니다. 후작의 양녀라니요.”
카신은 곧바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히나가 후작의 양녀가 된다는 건 그의 계산에 전혀 없었다.
“나의 말벗에게 그 정도 지위는 줘야 하지 않겠나? 리베리아 후작도 흔쾌히 좋다고 했는데 뭐가 문제인가?”
“단순히 말벗이 필요한 게 아니시지 않습니까?”
능구렁이 황제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꿍꿍이가 있는 얼굴이 무척 얄미웠다. 루이스의 시선이 히나에게로 돌아갔을 때, 그는 치미는 짜증까지 억눌러야 했다.
“가족이 없다고 들었네. 나는 히나 양에게 나의 말벗으로 부족함 없는 지위와 함께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만들었는데, 자네 말고 당사자는 어떤가?”
제삼자는 빠지라는 뜻이었다. 카신의 눈이 사뭇 사나워졌다.
카신은 히나를 다른 곳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그녀의 친부모가 나타나도 마찬가지였다.
버리다시피 한 그녀를 여태껏 방치해 놓은 사람들이다. 살아 있다고 한들, 애초에 히나의 존재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부모와 핏줄을 운운하며 히나를 찾아온다고 해도 그녀를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폐하.”
단도직입적으로 거절을 하려 할 때였다. 뭐하면 협박을 하고 다 뒤집어엎을 셈이었다. 그만큼 그의 기분은 바닥을 치닫고 있었다.
반박을 하려던 카신의 눈이 히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는 히나를 본 걸 후회했다.
“저, 정말 제 부모가 되어주시는 건가요? 제 아버지가요?”
강압적으로 파토의 말을 꺼내려던 말은 목구멍에서 더는 나오지 않았다.
히나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카신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하, 하지만 미천한 제가 감히 후작님의 딸이 되어도 괜찮은 건가요?”
“그건 이미 폐하와 얘기가 끝났네. 내 양녀로 들어온다면 전과 같은 무서운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게다.”
히나는 아무런 의심 없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리베리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정말 제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거죠?”
“그래.”
가족. 아버지.
히나가 자란 곳은 가난한 시골 마을이었다. 배부르게 먹으며 자라진 않았어도 욕심이 없는 그녀는 누구보다 그곳 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히나는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원하는 걸 이룰 수 없어 포기하고 산 것이었다.
‘나도 이제 가족이 생기는 거야.’
부모에게 투정을 부릴 수 있는 아이. 손을 꼭 잡아주는 부모가 있는 아이. 혼이 나서 뾰로통해져 있어도 그것을 풀어주는 부모가 있는 아이.
모두 가족이 있었다. 하다못해 형제라도.
어릴 적, 부모에 대한 갈망이 꿈으로 나타난 적도 있었다. 꿈속에서 부모의 품에 안기며 행복했던 그녀는 잠에서 깨자마자 펑펑 울어야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헛된 꿈을 꾸지 않기 위해 가족이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지.’
가족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면 풀토 공작에게 그렇게까지 쉽게 이용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용당했다는 것도, 배신당해 곧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갓난아기인 채로 버려졌다는 말이 그녀에겐 더 충격이었다.
‘가족이라고 꼭 피가 섞여야 하는 법은 아니야. 나도 이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
평생을 원했지만, 결코 얻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이고 포기해도 미련을 버릴 수 없을 만큼 간절했다.
“히나?”
히나는 카신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야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괜찮은 게냐?”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감히 명군이라 불리는 황제를 죽이려고 했고, 거기다 다정하게 대해준 카신을 배신했다.
그 죄책감에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가족이 생긴다는 말에 애써 무시했던 서러움이 쏟아져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친부가 아니라도 좋았다. 아버지가 생긴다는 사실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후작은 감히 쳐다보면 안 되는 아주 높은 신분이었지만, 부모가 되어준다는 말을 거절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 그렇게 좋은가?”
루이스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죄책감을 갖지 않은 지는 오래됐고, 오히려 제 뜻대로 이용당하는 사람을 보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진심을 다해 기뻐하는 히나를 보니 찝찝했다. 그는 울먹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히나를 보며 아주 오랜만에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저…… 잠깐…….”
오히려 먼저 등을 떠밀어 주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히나를 계속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갔다 오게.”
루이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녀들 중 한 명이 히나를 데리고 사라졌다.
가식적인 눈물은 결코 아니었다. 히나는 진심으로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거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루이스는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무를 건 아니었지만.
“지금 뭐 하는 짓이죠?”
지나치게 낮은 저음. 카신은 드물게 목소리를 낮추며 화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