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23화 (23/128)

#23.

“저렇게나 가족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나.”

루이스는 죄책감을 숨기며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카신이 히나 앞에서 어찌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다.

“과연 리베리아 후작께서 히나의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어줄지 모르겠군요.”

“흠흠.”

리베리아 후작이 헛기침을 했지만, 카신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기뻐할 줄은 몰랐다네. 그래도 저리 좋아하는데 잘되지 않았나?”

정치 문제는 질색이었다. 그래서 황궁에 살며 대마법사란 직위를 받았어도 작위는 끝까지 거절했다. 그리고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 썼다. 오히려 대마법사의 칭호를 이용해 별궁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설마 무를 생각인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히나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잔인한 짓은 절대 할 수 없었다.

“히나를 끌어내면 저도 끌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으름장을 놓고 있었지만 카신은 자신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했다.

확실히 앞에 있는 루이스는 정치판에 나뒹굴며 사람을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에 너무나도 능숙했다. 속세와 연을 끊고 편하게만 살았던 그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루이스는 약점을 간파하고 이용하는 것에 능한 황제였다. 카신은 루이스를 꿰뚫을 기세로 쏘아보며 경계했다.

“카신. 난 히나를 자네의 옆에서 빼낼 생각은 결코 하지 않네.”

“그럼 히나를 어째서 리베리아 후작의 양녀로 두려는 거죠?”

감히 루이스에게 이렇게 대드는 사람은 이 황궁 내에 그 누구도 없었다. 하지만 카신은 앞에 있는 이가 황제든 신이든 상관없었다.

“전 제 것을 그 누구와도 공유할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에 그를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자네의 옆에 있으면 히나 양은 그 이유 하나로 엄청난 이목을 받을 것이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아무런 신분도 없는 고아라고 한다면 그 후에 받을 손가락질을 어떻게 견뎌낼 건가?”

“손가락질 받을 곳에 둘 생각은 없습니다.”

카신이 히나를 황궁 파티에 잠깐 데리고 간 것만으로도 귀족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대마법사 옆의 여자가 누구냐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신분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쉬쉬하며 움직이는 세력도 꽤 있었다.

“이 황궁 안에서 살아가려면 그에 맞는 위치가 필요해.”

“애초에 저는 귀족도 뭐도 아닙니다. 신분이 천한 건 그녀나 저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네와 히나 양을 동급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네. 그걸 가장 잘 알면서 왜 이러는가?”

아무리 카신이 작위가 없다고 해도, 절대적인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와 친밀한 사이였다. 비록 하는 일이 거의 없더라도 루이스의 뒤에 카신이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협이 된다.

“자네는 제국의 대마법사이자 모든 마법사들의 우상이 아닌가. 자네의 옆에 고아 출신의 시녀가 있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가당치 않는 시선 따위, 저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다지 위협도 되지 않고 말입니다.”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카신의 옆에 있는 여자라면 당연히 시선이 쏠릴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천한 신분이 알려진다면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만약 그래도 방해가 된다면 히나를 데리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하아.”

치열한 신경전이었다. 카신은 뭐하면 제국을 없앨 생각도 하고 있었다. 별궁에 있는 건 편리함을 위해서지, 묶이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네가 언제든 황궁을 떠나도 상관없다는 건 아네. 지금도 황궁이 가장 편해서 이곳에 있는 거겠지.”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끊은 건 루이스였다.

“하지만 말일세. 과연 히나 양도 그에 찬성할까?”

“불편한 건 없을 겁니다. 갖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전부 이뤄주면 그만입니다.”

히나와 같이 여행을 다니며 사는 삶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은 마법으로 해결하면 되니 불편한 건 없으리라.

“카신, 나는 저 어린 소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와 단절하며 자네처럼 떠돌이 신세로 살 수 있을지를 묻는 거네.”

카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히나는 평범한 아이야. 설마 자네와 같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카신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사막 한복판에서 몇 날 며칠을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벼락이 내리치는 곳에서도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외로움에 미쳐 죽을 것 같은 감정도 이제는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달랐다.

카신은 히나 하나만 있어도 상관없지만, 히나는 아니다. 그녀가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자신을 따라올 마음가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온 히나가 과연 자네를 따라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카신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어딜 가나 그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앞에서 그를 칭송했지만, 뒤에서는 괴물이라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그는 그 시선에 익숙하지만, 아마 히나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리라. 그렇다고 인간이 없는 오지에서 사는 것도 무리였다.

‘이걸 노렸군.’

인간과 뒤섞이지 못하는 삶을 살며 히나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저는 그녀가 다른 사람과 깊이 교류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누가 뺏어간다고 했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루이스가 빙긋 웃었다.

“알고 있나? 리베리아 후작은 자네도 알다시피 대대로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을 맡고 있지. 난 히나 양을 후작의 양녀로 들여보내 세인트황실학교에 보낼 생각이네.”

“세인트황실학교?”

“카신, 아무리 단절된 삶을 살았다고 한들 세인트를 모르진 않겠지?”

세인트황실학교.

황궁의 수많은 마법사와 기사,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성직자가 나오는 곳이었다. 그 외에도 황궁의 다양한 인재들이 그곳을 통해 배출됐다.

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졸업과 동시에 황제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 하나만 인정받는다면, 졸업 후 웬만한 귀족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다. 어떤 반을 졸업하냐에 따라 차별이 있지만, 하급반을 졸업해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었다.

평민에게도, 귀족에게도 꿈의 학교였다. 그만큼 세인트는 쉬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마법사께서 아실지 모르겠으나 리베리아 가문은 아주 오랫동안 세인트를 운영하고 있죠. 당연히 저도, 제 자식들도 그곳을 졸업하거나 과정을 수행하고 있고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베리아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인트의 졸업장과 리베리아라는 이름만 있으면 대마법사님의 곁에 있는 것에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을 겁니다.”

“졸업을 하면 저 시녀도 꽤 성숙한 여인이 되겠지. 그때가 되면 데려가게. 세인트의 졸업장과 후작의 배경이 있으면 아무리 양녀라도 그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받지 않고 자네 옆에 있을 수 있을 거네.”

루이스의 말대로 히나를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황제의 계획에는 큰 결점이 있었다.

“히나에겐 마법사로서 그 어떤 재능도 없습니다.”

아예 가능성이 없었다. 있었다면 카신은 진작 그녀의 마력을 키워 쉽게 다치지 않는 강인한 몸으로 만들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마법사께서도 그 힘을 봤을 거라 생각되는데, 아닙니까?”

이런.

카신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리베리아 후작의 말대로 히나에겐 다른 힘이 있었다.

“듣기론 성스러운 빛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입을 다 찢어놨어야 하는 건데.

카신은 풀토 공작의 부하들을 전부 살려놓은 것을 후회했다.

그들이 찰나의 순간 뿜어져 나왔던 히나의 빛을 보고 실토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히나를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 성급한 나머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힘이 아니더라도 리베리아 후작의 양녀라면 세인트에 입학하는 것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거네. 원래라면 최소 5년의 과정을 걸쳐야 하지만, 예외적으로 중간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지.”

“후에 마법사님께서 데려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단지 이름을 빌려주는 것뿐이니까요.”

속세와 연결해서 살 거라면 강인한 제국의 황궁이 가장 편했다. 정치적인 관계에 얽히지 않는 한에서라면 말이다. 그래서 그도 오래전 이곳 황제와 계약을 하여 황궁에 눌러 붙은 거였다.

히나가 오래 살게 되며 현세에 미련이 없어지고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는, 적어도 히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그가 될 때까지는, 사람과 교류하며 살아야 했다.

“졸업을 하면 히나를 제게 주겠다는 말, 확실하겠지요.”

“그건 약속하지.”

히나를 불행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오랜 시간 속세와 단절된 삶을 살았던 그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좋습니다. 폐하의 뜻대로 이용당해 드리죠.”

먼 미래를 바라보면 황제의 뜻대로 하는 게 좋았다. 지금은 이용당하는 거지만, 반대로 이 기회를 그가 이용할 수도 있는 거였다.

“대신 히나를 확실히 잡아두고 제게 주셔야 합니다. 설사 그녀가 싫다고 해도.”

별궁에 있던 시녀들이 외로워서 나간 것처럼 히나가 도망가게 둘 순 없었다. 그녀를 잡아두기 위해서라도 사람들과 적당히 교류시킬 필요는 있었다.

“걱정 말게. 자네처럼 도망가게 두진 않을 걸세.”

루이스만큼 사람을 이용하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누구에게 속는다고 해도 히나가 전처럼 도망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몇 년이 걸리지요?”

“뭐가 말인가?”

“예외적으로 중간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셨죠. 졸업까지는 얼마나 기다리면 됩니까?”

리베리아 후작가는 대대로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 자리를 지켜왔다. 양녀라곤 하나 세인트황실학교의 졸업장을 가진 리베리아 영애가 대마법사인 그의 옆에 있는다면 아무도 히나를 얕보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히나에게 힘과 지위를 준다면 그녀의 세계는 그의 시야가 훤히 보이는 곳에 만들어질 것이다. 카신은 그 세계에서 히나가 사람들과의 교류에 미련이 없어질 때까지 살아줄 생각이었다. 히나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두는 건 싫었지만, 그 정도는 그가 감수해야 했다.

‘어차피 싫어도 받아들여야 해.’

아버지가 생긴다는 사실 하나로 정신을 놓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하는 히나를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만약 여기서 막아버린다면 그녀에게 평생 원망을 들으며 살지도 모른다.

“졸업까지 2년이네. 2년 후에 데려가도록 하게.”

간만에 아주 불리한 거래를 했다. 하지만 대가가 만족스러워 거절을 할 수도 없었다.

“카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카신이 루이스의 부름에 행동을 멈췄다.

“지금도 지루한가?”

루이스는 어릴 때처럼 개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볍게 농담처럼 주고받았던 약속이 떠올랐다.

“덕분에. 지루하진 않습니다.”

“그럼 날 명군으로 만들어주길 부탁하지.”

확실히, 이번 황제는 영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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