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24화 (24/128)

#24.

“많이…… 기쁜 모양이구나.”

카신은 겨우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하지 못하게 할까?

히나는 본궁을 갔다 온 며칠 내내 들떠 있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그녀를 보니 후회도 됐다.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 많이 생기는 건 질색이었다.

“그럼요! 제게 아버지가 생긴다고요! 오라버니도 둘이나 있어요!”

도저히 무를 수 없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온전히 기뻐하는 히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인간은 여러 인간과 교류를 하고 살아야 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하지 않은 건 카신이었다.

“그렇구나.”

히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카신은 부드럽게 웃었다. 잠시 주춤거린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분간 카신 님을 보기 힘들까요?”

히나를 양녀로 입적하는 수속을 오전에 끝낸다고 했다. 리베리아 후작은 오늘 오후가 되기 전에 그녀를 데려갈 마차를 보내겠다고 전해왔다.

짐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었지만, 그녀가 지낸 숙소를 비우자 벌써부터 쓸쓸했다. 이런 황량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언제든 놀러 오거라. 아니면 내가 찾아갈까?”

“정말요? 그럼 제가 올게요!”

딸아이를 시집보낸다면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카신은 오래전에 딸을 시집보내며 눈물을 글썽이던 한 어미를 떠올렸다.

그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조금 알 수 있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느낌은 비슷할 것 같았다.

“그때는 레이디 리베리아가 되겠구나.”

레이디 리베리아.

낯선 호칭이었지만, 어딘가에 소속된 기분에 히나는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이름을 버리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그래도 히나라는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제 이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카신 님만은 절 지금처럼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히나는 참 다정하고 정이 많았다. 이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쓸쓸한 얼굴을 하는 그녀를 보며 카신은 순순히 대답했다.

“나만은 평생 널 히나라고 불러주마.”

당사자이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히나가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이런 순수한 미소를 계속 지켜주고 싶었다.

모든 일은 루이스가 바라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히나는 곧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생길 테고 황궁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거기다 그는 앞으로 그녀를 위해 이용당할 일이 많아지리라.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줄이야.’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그녀는 보다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 하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네게 줄 것이 있단다.”

카신은 여러 실험 도구들이 뒤죽박죽 어질러져 있는 연구실을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언젠가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수정 구슬을 찾아 그녀에게 내어주었다.

“급한 일이 있다면 이걸로 연락하거라.”

히나가 한 손에 딱 들어오는 투명한 구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티 없이 맑은 구슬과 히나의 눈동자가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

“이곳에 대고 말을 하면 내게 연락이 닿을 거야.”

“이런 귀한 것을 정말 제게 주셔도 되나요?”

“물론이고말고.”

쓸쓸했지만, 떠나가는 히나를 막을 수 없었다. 루이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그렇다면 내가 널 지루하지 않게 도와주마! 그럼 너도 내가 명군이 될 수 있도록 날 도와줘야 할 거야!”

어쩐지 어린 루이스와 만났을 때부터 제 무덤을 판 기분이었다. 카신은 얄미워서라도 루이스의 뜻대로 순순히 이용당해 주지 않을 거라 속으로 다짐했다.

“저…… 매일매일 카신 님을 생각할게요!”

이렇게 예쁜 말을 하는 히나가 곧 떠나간다. 카신은 히나를 잡아다 별궁에 꼭꼭 숨겨두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조만간 보자꾸나.”

연구실 가까이로 시녀의 조심스런 발자국이 느껴졌다. 카신은 마지막으로 히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히나 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시녀의 목소리에 히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짐짓 우울한 얼굴을 하는 그녀의 두 눈동자에 곧 눈물이 맺혔다.

“저…….”

목이 메는지 히나가 말끝을 흐렸다. 카신은 그녀가 말을 끝까지 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정말 카신 님 곁에 있을 수 있을까요?”

곧 세인트황실학교로 들어갈 거라는 걸 히나도 알고 있었다. 정식적인 절차는 아니었지만, 일단 그곳의 졸업장이 있으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지도 안다.

“정말 노력할 거예요! 그러면 여자라도…… 높은 사람이 되어 카신 님의 곁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루이스가 능력 있는 인재를 중시하긴 해도, 제국에서도 여자가 받는 불이익은 상당히 컸다.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신분이나 성별로 인한 차별 대우가 분명히 존재했다.

히나는 카신의 옆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그간 진 빚을 이자까지 모두 갚고 싶었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인트에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게 정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걸까요?”

“그럼. 너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게다.”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잠시 떨어지는 것에 부쩍 서운해하는 히나를 보니 카신은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다.

혹여 그녀가 떠나고 더 나은 삶에 적응한다면 자신을 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히나의 말을 듣는 순간 안심이 됐다.

“나중에 꼭 내 옆으로 오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비록 지금 히나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었다. 카신은 애틋한 감정을 담으며 히나를 바라보았다.

“네! 저, 꼭 카신 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게요!”

히나를 태운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며 카신은 쓴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혼란스러웠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자신도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하, 정말.”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쉽고 서운할 줄이야.

“이렇게 이용당하고 싶진 않았는데.”

기뻐하는 히나를 옆에 두고 수천 번을 고민했던 카신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루이스의 계산에 들어가나 의심이 됐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이미 떠나가는 히나를 보고 결정했다.

곧 공간이 뒤트는 형형색색의 빛이 카신의 몸을 감쌌다. 마력이 온몸을 감싸자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대마법사님?”

함께 히나의 마중을 나왔던 시녀들이 뒤에서 놀란 목소리로 부르는 게 들렸다.

우웅―

카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순식간에 공간이 뒤바뀌어 있었다. 한적한 별궁도, 그의 시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루이스였다.

“대마법사?”

집무실에 함께 있던 로티스 공작이 벌떡 일어났다. 황제의 호위 기사도 카신을 경계하며 칼을 겨누어 루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폐하의 앞에 이렇게 함부로 나타나다니요!”

현재 루이스와 가장 가까우면서, 제국 내에서 황족 다음으로 제일 높은 로티스 공작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황제 폐하를 모욕하는…….”

“아니, 괜찮네.”

루이스는 다급히 로티스 공작을 막았다. 여기서 자유분방한 카신과 고지식한 로티스 공작이 붙는 걸 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선대 황제 시절부터 친황권파로 왕성하게 활동해 온 루티스 공작은 오랫동안 황제 옆을 지킨 만큼 보수적이고 우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황제의 측근으로 두 사람 이상의 몫을 할 정도로 기운이 넘치는 바람직한 귀족이었다.

“하지만 폐하……!”

“내가 카신을 급히 부른 거네.”

이런 거짓말에 속을 만큼 루티스 공작은 아둔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스는 뻔뻔한 얼굴로 공작과 그의 호위에게 말했다.

“나는 카신과 급한 볼일이 있으니 다들 이만 물러나 보게.”

이동 마법이 금지된 황궁 안에서 마법으로 황제의 앞에 나타난 카신의 행동은 루티스 공작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껏 찾아온 대마법사를 쫓아낼 순 없었다. 루이스는 거짓말 하나로 상황을 아주 자연스럽게 정리했다.

“예, 폐하.”

속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루이스의 예상대로 고지식한 루티스 공작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나는 호위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카신은 루이스가 상황을 모두 정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귀찮아서 다시 돌아가기는커녕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기다린 카신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래, 카신. 무슨 일인가?”

아무리 재해에 시달리고 사람들이 죽어가도 소용없었다. 황제가 몇 번이고 찾아가 간청해도 결코 별궁에서 나오지 않았던 카신이 직접 나왔다.

히나가 카신을 이용하게 해줄 수 있는 역할을 아주 잘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자신을 직접 찾아올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저, 저……!”

문을 닫고 나가려던 로티스 공작이 카신의 무례한 태도에 손가락질을 했다. 그의 눈에는 기본적인 예의도 보이지 않는 카신의 행동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하지만 루이스는 전혀 거리낌 없는 얼굴로 명령했다.

“괜찮네, 로티스 공작. 다들 이만 나가보라고 하지 않아? 공작은 내 명을 무시할 셈인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로티스 공작까지 나가고 묘한 기류가 흘렀다.

“공작이 나갔으니 이제 말해보게.”

“로티스 공작은 여전히 꽉 막혔군요.”

아아, 역시나. 자유분방한 카신과 로티스 공작은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이 둘이 섞이는 일은 아마 결코 없으리라.

루이스는 속으로 빠른 판단으로 로티스 공작을 바로 내보낸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래서 아주 믿음직스럽지 않나.”

“충견이니 퍽이나 믿음직스럽겠죠.”

감히 누가 제국의 공작인 로티스에게 충견이라고 할까. 루이스는 카신의 불만이 담긴 표현에 큭큭거리며 웃었다.

“내 앞에서 로티스 공작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 거네.”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있었다는 카신만이 할 수 있었다. 루이스는 한참을 웃으며 카신을 천천히 관찰했다. 카신은 숨기지 못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네가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내게 와서 공작의 흉을 보려는 게 아니었을 텐데?”

“맞습니다. 여기까지 로티스 공작의 흉을 보러 온 건 아니지요.”

적극적인 카신을 보는 건 즐거웠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카신을 보며 루이스는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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